타락한 본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면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애(自己愛)이다. 자기애는 한 편으로 저주받을 것이라 여길 정도로 부정적이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부정적이라 할 때는 이기주의적 측면을 갖는다는 것이고 긍정적이라 할 때는 자신만 아니라 자기와 관련된 자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하여 자기애를 별문제 되지 않는 것이라 간과해서는 안된다. 타락한 본성을 자기애라고 말할 때는 매우 심각한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긍정적인 측면은 확률상으로 볼 때 10%도 되지 않는다. 이기적이란 말은 좀처럼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부정적인 측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자기애를 억누르고 국가를 위해 희생하면 애국자가 된다. 자기애를 지배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면 헌신자가 된다. 영웅이다. 자기애를 억누른다는 것은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연적이다. 누구든 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자신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국가나 타인에게 두는 자가 있다면 그는 존경을 받아야하는 자다.
자기애를 억누를 뿐 이기적 사랑을 없애지고 못하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경험과 지식을 통해 자기애를 지배한다는 것 역시 어렵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타인을 사랑하기도 어려운데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명령은 귀를 막고 듣지 않는 편이 좋을 정도로 큰 부담이 된다. 인간적 의지로도, 인간적 노력으로도, 훈련으로도 자기애를 억누른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성경은 여전히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권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애를 포기하라는 것이다. 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한다.
자기애를 없애기 어렵다면 그것의 방향을 바꾸어 선으로 바꿀 수 있다. 자기애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이끄신다. 자신을 지극히 사랑하신, 즉 자신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은 우리의 본성인 자기애를 극복하도록 한다. 일시적이지만 억누르고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자기애를 억누르는 기쁨을 맛본다. 영속적이진 않지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으로 순교와 헌신이 가능하다.
그분의 사랑이 날마다 확인되지 않으면 신자로서의 자기애를 억누르거나 자기부인의 삶은 불가능하다. 날마다 그 사랑으로 감동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이 사랑은 성경에 기록된 그분에 대한 지식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우리는 복음이라 부른다. 복음에는 그분의 사랑이 명시되어 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을 날마다 갖지 않으면 타락한 본성인 자기애와 우리는 싸울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 이 사랑은 습관적이지 않다. 가졌다고 언제든 효력을 발하지 않는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한 것처럼 고무줄처럼 자기애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삶만이 그분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다. 이런 삶이 곧 신자의 삶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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