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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자유의 대가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9. 9.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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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갈라디아서 5:1). 수치와 멸시를 당하시고 죄로 인해 힘들어하는 우리를 위해 그분은 처참한 고난과 수난을 자발적으로 감당하셨다. 알다시피 자유는 방종과 다르다. 자유는 방임과 다르다. 다르다. 한계 없는 자유는 방종이며 개입 없는 자유는 방임이다. 자유를 염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자유의 문제를 다루려면 로마공화정에서 압박을 받아 자유인이 되고 싶었던 한 자유인이지만 노예의 삶을 살았던 인물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이름은 ‘스파르타쿠스’(Spartacus)는 실제 인물이다. 그는 기원전 73~71년에 있었던 ‘3차 노예전쟁’(Third Servile War) 또는 일명 ‘스파르타쿠스 전쟁’이라 불린다. 로마공화정에서 일어난 마지막 노예 반란이기도 하다. 검투사로 훈련받았던 78명이 탈출한 이 사건이 결국 남녀노소가 가세하여 120,000명으로 늘어났다. 로마장군 크라수소와 일전을 벌인 후 모두 죽고 만다는 실화이다. 스파르타쿠스를 현대 영웅의 한 사람으로 삼기 위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흰색 그의 대리석 동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인으로 태어났지만 로마인들의 야만적 행동으로 남의 자유를 자신들이 누리고자 했던 방종의 종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사건은 역사와 함께 기억될 것이다.
누구든 자유를 염원한다. 참된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그 자유에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분이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망상은 노예적 근성이다. 자유를 위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은 방탕이다. 자유는 지켜야하는 조건이 있다. 지키기 때문에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지만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원죄 아래 참된 목소리보다 이기적 목소리 듣는 일에 익숙해 있다. 이러한 양심의 가책을 피하기 위해 여러 법들 아래 자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숨기곤 한다. 하지만 뒤안길에서 자신을 돌아볼 때 후회하곤 한다.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된 자유를 위해 일제치하에서도 많은 순열자들이 희생했다.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는 자유를 얻었다. 명실 공히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이들의 고귀한 희생을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혜택을 받는 우리는 열심히 고수해야 한다. 로마인들처럼 우리의 자유를 침범하고 빼앗으려는 악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철통같은 방비에 힘을 기울어야 한다. 국방비 예산문제로 시끄럽기도 하지만 또는 그 예산을 통해 잔꾀를 부리는 자들이 없지 않지만 국민의 자유를 위한 예산을 논란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유를 위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궁금하다. 사도바울은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골로새서 1:24)고 한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과중한 사역을 통해 자유의 대가를 치르곤 한다. 바쁜 일정을 통해 그 대가를 치르곤 한다. 참된 자유를 위한 대가한 먼저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한다. 율법에서부터의 자유를 생각한다면 구원을 받기 위한 또는 은혜를 받기 위한 율법적 행위는 삼가야 하지만 우리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이단적 행위, 즉 은혜를 받기 위해 율법주의에 빠져 살아간다. 우리의 공로를 통해 그분이 은혜를 베푸신다고 쉽게 속아 넘어간다. 사랑의 율법, 즉 자발적 순종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방종하여 자발적이지 못하다. 여전히 노예적 근성이 남아 있어 무슨 형벌이 있거나 불운이 있어야 조심하는 경우가 흔하다. 참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감성과 이기적 이성에 따라 살아가면 그것은 노예적 근성에서 일어난 삶일 뿐이다. 진정하게 자발적이지 않는 경우 그릇된 자신과의 내적 투쟁이 있을 것이다. 이런 투쟁을 겪어야 한다. 이것이 참된 자유를 염원하고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첫 번째 대가인 것이다. 자유를 위해 이런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상실된다. 어떤 이들은 이런 내적 투쟁을 ‘죄 죽이기’ 또는 ‘죄 억제하기’라는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두 번째 대가는 자유를 유지하는데 치르는 것으로 첫 번째 대가는 자신 안에서 이뤄진다면 두 번째 대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생활하면서 직면하는 여러 일들 가운데 진정한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대가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생애를 보면 그는 자유인으로의 짧은 생애를 살지만 진정으로 살기 원했다. 그와 함께 했던 자들이 모두 그와 같았다. 그 자유를 자녀에게 주기 위해 치명적인 전쟁을 치러야 했다. 자유를 지키는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자인 경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그 믿음을 믿음 되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 위해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기독교인의 품성을 지니고 살아갈 수 없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오른쪽 강도는 행함 없이도 천국에 갔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특별한 경우를 일반적 경우로 확대 적용하는 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일반적 경우를 논의하고 있지 특별한 경우를 말하고 있지 않다. 일반적인 경우 신자들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인의 품위를 지켜 살아야 한다. 손해도 볼 것이고 억울한 일을 직면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기도교인의 정신을 결코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라도 교회 건으로 일반법정에 호소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런 경우라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실수하여 호소하는 경우가 있겠지만 무지한 경우가 아닌 경우 기독교인이려는 자유를 망각하고 노예근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기독교인이라 불리지만 사회인들 가운데 아무런 구별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노예적 근성으로 살아가는 자들과 아무런 구별 없이 살아가기 때문에 여전히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고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참된 자유를 받았고 유지하고 있는 우리로서 그 자유를 위한 대가를 얼마나 치르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는 경우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참된 자유를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마냥 살아가다가 구원을 받지 못할 불운에 빠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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