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상경하여 교회당을 찾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여겨집니다. 목사님들이나 매스컴, 또는 소문을 듣고 선택하는 경우가 있고 가까운 교회당을 찾기도 합니다. 아무튼 새로운 교회 일원들, 분위기, 목회자, 또는 다양한 관습들에 적응해야합니다. 이것이 힘들면, 당분간 대형교회를 방문했다가 부담 없이 다니다가 적절한 교회가 생기면 교회를 지정하여 등록하고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대형교회를 선택하여 날개 아래 안식을 취하는 경우가도 있습니다.
새로 이주한 곳에서 교회를 선택할 때 우선순위는 단연히 담임목사님의 설교 및 교회 일원들의 분위기입니다. 이것은 신앙적 색깔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몇 주 듣다가 선택하는 경우가 있죠. 교회를 자신의 신앙색깔과 같은 것을 찾는 것이 과연 옳은지 물을 수 있겠으나 개성이 있기에 맞는 교회를 가는 것이 옳다기보다 요즘에 와서 한국교회에 이단적 교회들이 우우죽순으로 들어서기 때문에 신앙적 색깔을 굳이 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민중앙교회’가 이단단체이니 ‘~중앙교회’만 보면 모두 이단적 교회로 여겨진다고 하기도 합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지만 한국교회의 현주소입니다.
더욱이 한국교회 현주소를 말하고 싶은 것은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초교파’적인 교회들로 변모한다고 할 수 있고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혼합주의’적인 교회들로 변화되었다고 평할 수 있습니다. 초교파든 혼합주의는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든 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누구든, 언제든, 항상 이란 말은 여전히 위험성이 따릅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누구구든, 언제든, 항상 취할 수 있다면 방부제와 같은 여러 재료들이 들어있지 않으면 어렵죠. 이런 음식에는 조심을 요합니다. 체인이 되어 상품을 판매하지만 실상은 그 지역에서 만들거나 동네에서 만든 음식이 훨씬 깨끗할 것입니다. 체인이 되려면 그만큼 값도 비싸지고 음식에 방부제를 넣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것에 따른 여러 부정적인 요소들이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 찾아들 수 있는 교회이지만 누구든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파주의를 지지한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파주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로부터 특별한 개성을 주셨기에 그것에 따라 신앙의 색깔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만병통치약이 없는 것처럼 오직 한 교회만을 고집하는 것은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외적인 통합을 주도하면 과거 로마 카톨릭 시대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역사적 오류를 다시금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든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수적 성장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인기 얻었던 용어가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 하여 목적으로 신앙을 삼는다는 어리석은 주장이 한국교회를 얼마나 어리석게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는 바른 신앙을 위해 노력하는 목적을 가지지 않고 성장을 위한 우둔한 자들의 모습처럼 목적을 갖고 나아갑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없습니다. 목표가 없는 셈이죠. 목적이 앞서면 수단이 정당화되는데 이것은 세상이치를 따른 것이고 세속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아니라 바른 신앙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대의 한국교회를 가리켜 ‘사사시대’라 칭하고 싶습니다. ‘사사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입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성결교회, 또는 순복음교회 든 어느 교파든 초대교회가 결정했던 신구약성경과 정통교리를 고수한다면 바르다고 봅니다. 정통교리라는 말음 1~4차에 이른 ‘공교회’ 또는 ‘범종교회의’가 결정했던 4대 신조, 즉 니케아신조, 칼케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그리고 사도신경을 고수한다면 일단 바른 교회라 평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과연 이 4대 종교회의를 기초하여 만든 각 교단의 고백서(confession)가 있는데 그것을 고수해야 합니다.
장로교인 경우에는 벨직 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도르트 신조(1618~1619),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고백서 및 대ㆍ소교리문답(1646~1647) 등을 고수합니다. 이것들을 알아야 구원받는 조건이 된다는 억지 주장이 아니라 알게 되므로 바른 신앙을 고수할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생명을 내걸고 작성된 위와 같은 신조들과 고백서들을 무시하면 역사적 신앙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역사성을 무시하면 신흥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이단성을 가진 신앙을 취하기 싶습니다.
한국교회는 하루속히 신구약성경 및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당은 놀이당으로, 교회는 세속화로, 그리고 신자들은 허무한 신앙을 가지게 되고, 더욱이 이단들이 날로 극성을 부릴 것입니다. 이단자들이 극성을 부려도 한국교회는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못할 정도로 바른 신앙에 머물지 않고 있습니다. 바른 신앙을 점검하려면 반드시 교리적 신앙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 신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신비주의로 전향되다가 결국 무신론교회로 나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