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데 꿈을 꿀 때면 피곤하지 않다는 것처럼 느껴져서 일어날 때가 되었구나하고 깨닫곤 합니다. 꿈을 꿀 정도니 충분히 잠을 취했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게 꾼 꿈을 오래가지도 않고 금새 잊어버리곤 합니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평소에 원했던 내용이었다면 비록 꿈이더라도, 현실이 아니더라도, 계속 더 있고 싶은데 그렇지 못할 때 안타깝기만 합니다. 어쩌겠습니까?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죠.
우리는 바르게 살고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좋은 말들을 듣습니다. 책을 읽으면서도 맘에 담을 글들을 접합니다. 기억하고 싶어 합니다. 잊지 않으려고 수첩에 꼭 기입하죠. 또는 친구들이나 동료들과의 대화에서도 귀한 말들을 듣습니다. 심지어 영화나 드라마를 보아도 정말 감동되고 반성하고 싶은 순간들을 만나거나 귀중한 말들을 듣습니다. 그러니까 더 빠져들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당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 참으로 은혜 되는 말씀을 듣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천진난만하게 웃기도 하고, 또는 반성하기도 합니다.
꿈이든 좋은 말이든 느꼈던 일들을 현실로나 삶으로 실천하는 일은 정말이지 매우 힘듭니다. 아니 용기가 요구됩니다. 왜 용기까지 필요하냐고 물으실 수도 있겠지만.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소돔과 고모라가 아무리 악했다고 하더라도 요즘 세상과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의인 10명이 없는 것처럼, 과연 우리 주위에서 10%의 올바르고 바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10% 안에 살고자 하면 외롭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하지도 않는데 저 혼자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더불어 살지 않고 자만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꿈은 좋습니다. 말도 좋습니다. 하지만 실천과 현실로 옮기려면 용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 용기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용기는 바르게 아는데서 나옵니다. 진리를 바로 아는데서 비롯됩니다. 바로 알게 되면, 좋은 말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바로 알게 되면 용기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르게 알면 용기가 왜 생기는지 묻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아는 대로 행할 때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당황될 때도 있습니다. 낙망과 절망을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를 붙잡아주는 것은 정신적 위로입니다. 그 정신적 위로는 자신이 바르게 행하고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 확신은 지식에서 나오고 그 지식은 바른 지식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르게 아는 것이 확신이 되고, 확신은 용기를 실천하는데 힘을 주고, 그 힘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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