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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받는 기도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4. 10. 16.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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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성기도, 합심기도, 돌림기도, 작정기도, 새벽기도, 금식기도, 개인기도, 묵상기도, 또는 중보기도 등 수많은 기도들의 홍수 속에서 살아갑니다. ‘기도하면 뭣하니?’라는 비난도 듣는 상황입니다. 한국교회만큼 기도가 풍성한 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렇게 많은 기도생활을 하면서도 기독교인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뭔가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기도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예수님께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고, 주님도 그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줬기에 ‘주기도문’(主祈禱文, Lord’ Prayer)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셨고, 제자들이 배울 정도이고 매주일, 아니 모임마다 기도를 하면 기도는 정말 중요한 것 이상이라 여겨집니다. 심지어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일어날 수 없느니라’고 하실 정도입니다.
신앙의 선배들은 ‘주기도문’ 강해를 해오셨고, 지금도 기도하는 법에 관한 여러 책들이 서점가에 넘쳐 흘러날 정도입니다. ‘응답받는 기도’와 같은 책들의 제목은 성도들에게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곤 합니다.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할까?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즉 제사는 무엇일까요?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든 기독교 신자라면 흥미를 가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기도는 구약성경에서 제사로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만의 특권인 제사였기에 지금도 로마 카톨릭은 자신들이 일반 신자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며, 참회기도를 들으며, 그리고 사죄선언까지 감행합니다. 구약성경의 제사가 신약성경의 기도라 하여 그 형식까지도 가지고 온다면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사례들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번제(燔祭, burnt offering), 소제(素祭, grain offering) 등을 지금도 여전히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때마다 필요한 것만을 악용한다는 것을 잘못된 처사입니다. 심지어 개신교(Protestants) 교회들도 가끔씩 구약성경에 나타난 외형들을 모방하려는 처사들이 있는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를 제사처럼 드리는 것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기도는 향기 있는 제사이지만 의미상이지 결코 형식상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면 다시 질문이 던져 집니다. 어떻게 기도해야할까요? 구약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제사들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싫어하신다고 분을 내신 적이 있습니다. 많은 구절들을 인용할 수 있지만 대표적으로 미가 6:6~8의 말씀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화려하고 장엄한 제사를 원치 않으시는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 즉 기도는 무엇일까요? 대표적인 것이 시편 5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 . . 다른 말로 하면 ‘꺼져가는 등불’(이사야 42:3)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무엇에 대해 상하고 통회할까요? 또는 왜 꺼져가는 등불일까요?
분명한 것은 무슨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것은 틀림없습니다. 애통하는 것이니 죄와 관련 있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전체적이든 개인적이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심령’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무엇에 관련하여 힘들어할까요? 부귀영화를 얻지 못해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복을 받지 못해서도 아닌 것 같습니다. 화려한 휴가를 얻지 못해서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기독교인은 늘 애통하고, 심령이 가난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또는 의를 위해 핍박까지 받는 것인가에 답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시편 기자의 기도문들을 보면, 그들이 힘든 것은 악인들이 흥왕하고 의인들이 번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번영을 위해 기도하지 않아야하기에, 그들의 흥왕을 보고 부러워하지 말아야하기에, 그들의 화려함을 시기하지 말아야하기에, 의인들을 매우 힘든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과연 외롭고, 힘들고, 괴로운 이 길을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인지에 대한 확신마저 흔들리기에 이렇게 아삽은 말할 정도입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편 73:2~3)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편 73:12~13).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시편 73:16)
이 시들을 보면서 분명히 의인은 악인들의 흥왕을 보고 신앙이 흔들릴 정도이고 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른 길을 걷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길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2,000년 교회사에서 바르게살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분들을 수없이 볼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길이지 쉬운 길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이 상한 마음이고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 어디에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제사를 드리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교회 현실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우리의 행운을 위해 사업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아무리 계획을 세웠다가고 무산될 경우가 있음을 야고보도 말씀가운데 한 적이 있습니다(야고보서 4:13~1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는 바르게살기 위해 심정적으로 매우 힘들어하며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들이 육신적으로 원하는 기도는 이미 구하기 전에 그분이 아십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기도는 악인들의 형통함에 유혹받지 않고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고 겸손하게 행하기 위해 심적 전쟁을 치르는 기도, 악인들의 길을 걷지 않으려고 하나님께만 위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기도, 또는 주님께서 아시면 된다는 세리와 같은 기도를 주님이 받으실 것입니다. 죄악 젖혀 살지 않으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진리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정말 몸부림치는 기도를 주님이 진정 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33)고 하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더하십니다. 그분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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