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기본적인 진리를 공유하고 있기에, 교회가 소유한 복음의 보편성을 말할 수 있다. 기독교 교회는 보편성이라는 본질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참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권능을 통해서 용서받은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이 지구 상에서 가장 풍성한 은혜가 넘쳐 흘러나가는 곳이다.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서 온 인류 가운데에 새롭게 등장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시작된 곳이다. 오순절 날에 부름 받은 새로운 백성들, 하나님 나라의 은택들을 받으면서 참여하게 되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는 보편적인 신앙고백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성령이 충만하게 흘러넘쳤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 2장부터 인류 역사에 등장하는 교회가 사람들의 눈에 비쳐지는 모습은 가히 놀라움과 파격적인 충격, 그 자체였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으로서의 교회,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주일 날에 차별없이 한 자리에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다는 사실이다 (고전 16:2; 롬 16:16).
교회는 한국 사회에 보편적 은혜를 전달했다. 구한말 조선시대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남자와 여자를 한 곳에 모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유교제도에 따라서 반상의 계급을 강조해오던 나라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교회가 드러낸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성격을 반영하고자 모든 사람들을 다 차별없이 용납하고 받아주었다.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를 새롭게 세우고자 할 때에,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뇌하던 문제를 성찰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보편성의 원리이다. 지금 한국교회 안에서도 교단과 교파 사이에 여러 종류의 갈등이 있지만, 그 근본에는 복음진리의 보편성이 교류하고 있다. 내적으로 흐르는 교통처럼 외적으로도 건전한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서로 형제우애를 나누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교파와 교단의 우수성과 순결성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교회들이 있다. 분리주의적인 지도자들은 오직 자신만을 추앙하고 흠모하도록 조작하고 있다. 보편성을 잃어버린 교회는 이단적이고 사교집단적인 성격으로 전락해서 자기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선전하는 엉터리 주장을 하게 된다.
1. ‘보편적’이라는 원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있었다. 인종적인 벽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인 계층과 계급이 엄연히 존재하던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개념이 규정되던 시대라서, 새언약의 공동체로서 등장하는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적합한 용어가 필요했었다.
성경에 담겨있는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그 개념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성경 밖에서 채택되는 단어가 종종 있다. 보편성이라는 용어도 역시 성경에는 이 단어가 직접 교회의 속성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하면, 신약성경에서는 아직 교회를 “보편적”이라는 단어를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에 대해서 증거하는 표현으로 채택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나온 단어인데, “전체에게 관련된” 혹은 “모두, 일반적으로”라는 의미이다. “일부분” 혹은 “특별한” “분리된” 것에 대해서 반대 개념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교회는 지상의 모든 사람, 모든 계층이 다 포함된다는 의미이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매우 풍부한 뜻을 담고 있다. 따라서 특수한 교회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오직 은퇴목회자만 모이는 교회라든지, 혹은 연예인 교회, 체육인 교회, 장애인 교회, 대학생 교회, 농어촌 교회 등등 어떤 특수한 직업이나 계층이나 상황을 반영하여 만들어지는 교회라는 말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보편성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웅변적으로 증거하는 몇가지 계기가 된 사건들이 있었다. 2세기에 접어들면서, “보편적” 교회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요한계시록 2장 8절에 나오는 서머나 교회가 참된 교회를 표방하면서, 보편성을 잃어버리고, 특별하게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만의 모임이라고 주장하였다. “분파성” “분리주의” “배도성” 혹은 “이단적인”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는 보편적이라는 개념을 강조하게 되었다.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개념이 강조된 것은 초대교회의 박해상황에서 빚어졌다. 참된 교회를 염원하던 성도들은 거짓 교회와의 구별을 원했다. 로마 통치권이 강하게 미치던 아프리카 북부 지방에서는 황제 디오클레시안 시대 (303-305)에 극심했던 기독교 박해를 견뎌내면서 생겨난 그룹이다. 순결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박해시대에 배교한 자들에게 세례를 받은 자들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해가 오면 세상 권세와 타협하고, 평화 시대에는 기독교인 행세를 하려는 자들을 혐오하였다. 그러다 보니, 차별의식이 심화되고 말았다. 아프리카 북부 지방에서는 박해와 배교자들이 발생하면서 매우 심각하였다. 신앙을 잃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해오던 성도들은 배교자들로 간주되는 자들과 타협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칼타고에서 어거스틴이 전면에 나서서 강력하게 분리주의적인 도나티스트들에게 논박을 가하였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들과 대면하면서 심각성을 파악하였다. 이 논쟁이 거의 백 여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보편성에 근거하여 배도자들이 집례한 성례들이라도 회개한 자들이라면 유효하다는 입장을 강력히 피력하였다. 예루살렘의 씨릴 (386년 사망)도 이미 교회의 보편성을 여러 측면에서 선포하고 주장하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도나티스들에게 대해서 최대한 관용과 인내심으로 대하라고 주문하였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정통성에 도취되었던 무리들은 결코 일반 교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극단주의는 결구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주후 409년, 호노리우스 황제 시대에 칼타고의 마르셀리우스는 도나티스트들은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
교회가 반드시 보편적이 되어야만 한다는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보편성에 대해서 모든 것을 좀 더 살펴서 세계교회와 한국교회가 본질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서로 갈등과 대립을 벗어야 할 때이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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