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어떤 장소, 어떤 사람들에게 속하는가?
참된 교회는 어떤 특수한 지역 사람들에게만 귀속되어지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교리에만 집착하는 것도 역시 참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로 개신교회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보편적인 교회”를 항상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구원의 보편성과 구원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왜곡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개신교회에서는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말이나, 기독교인이라는 말이나 같은 의미가 된다.
벨직 신앙고백서(1561) 제 27항을 보면, 매우 분명하게 보편성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가톨릭 교회, 즉 보편적인 공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전적인 구원을 바라는 참된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하나의 거룩한 회중이며 회합이다. 이 교회는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왕이시지만 신하된 백성이 없이는 왕이 되실 수 없으므로 진리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교회가 때로는 사람들 눈에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이 거룩한 교회를 광분하는 온 세상에 맞서도록 보존하시고 지탱하신다. 아합의 위험한 통치기간에도 그러셨으니 그 때 주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칠천명을 보존하셨다. 더구나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혹은 어떤 인물들에게 국한되거나 구속되어 있거나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퍼져 흩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믿음의 힘으로, 같은 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으로 연결되고 연합되어져 있다.”
3. 로마 교회가 “가톨릭” (보편적)인가?
일반적으로 세계 교회사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어 왔다. 그래서 마치 보편적인 교회란 오직 로마 교회인 것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교회의 명칭이 로마 ‘보편적’ 교회라고 해서, 이름처럼 구성되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 “보편적” 교회라는 말은 지구상 어느 곳이나 모두 다 포괄한다는 의미이자, “공간적 보편성” (spatial universality)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복음이 우주 전체에 퍼져나간다는 인식하에서 사용된 말이다.
그러나, 로마 교회 신학자 한스 큉은 교회의 보편성을 숫자에 근거하는 보편성의 개념으로 지리적인 의미를 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보편성을 주장하면서 교회가 널리 퍼져나갔다고 할 때에, 그 과정에서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과연 무엇이 유익하느냐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보편성이란 기본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다거나 이미 정해진 상태에 대한 설명도 아니요, 역사적인 개념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보편성의 의미란 본질적으로 모든 시대를 통해서 동일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요, 그 외적인 표현을 통해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스 큉에 비해서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 로마 가톨릭 신학자 콩가 (Yves M. J. Congar, 1904?1995)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 훨씬 더 영향력이 컸다. 교회의 본질을 다루는 보편성의 원리에서 그가 주로 주장한 것은 질적인 충만성과 완전성이었다. 보편성이란 양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고, 질직인 의미에서 해석되어야할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교회의 보편성은 각각의 민족성과 문화들을 다 융합시키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루터와 칼빈의 것들도 수용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이들 종교개혁자들은 한쪽의 치우쳐 있다고 비판했다. 종교개혁은 보편적인 교회의 진리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면서, 그래도 로마 가톨릭교회야말로 어느 한 편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보편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아직 완전히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보편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각 국가별, 문화의 여러 형태에 대해서 더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것은 곧바로 다양성을 넘어서서 다원화 (pluralism)로 연계되어지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콩가는 로마 가톨릭과 종교개혁 진영의 개신교 교회들이 새로운 보편적 교회를 향해서 서로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콩가는 여전히 로마 교회의 입장에서, 그저 약간의 포용성과 수용적인 태도에 그쳤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여전히 개신교 교회를 분리주의자로 비판하는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 동조할 수 없는 것은 도리어, 제도적 통일성을 가지고 교회를 정치적인 집단화 하고 있는 자들의 심각한 이탈 때문이다.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면서, 단지 조직적인 전통만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시대의 통치개념을 가지고 여전히 세계 교회에 왕노릇을 하고 있는 교황청의 모든 처신들은 가히 적그리스도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속히 모든 정치적인 체제를 벗겨내고, 복음으로 돌아가는 순수성을 회복하여야 할 것이다. 로마 제국의 권세와 권력이 영원하지 못하고 무너졌듯이, 로마 교황청의 정치력이나 지도력도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전 세계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을 뿐이다.
4. 보편성의 성경적 기초
교회의 보편성은 기독교의 보편성을 전제로 하여 세워진 개념이다. 기독교는 보편적인 종교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따라서 하시는 것이며, 그 외에 어떤 기준이나 제한을 두지 않는다. 남녀의 차별이나, 나이에 따른 구별이나, 인종, 신분, 지위, 국적, 언어에 전혀 제한을 두지 않는다. 교회의 보편주의는 어떤 특정한 국가나 지역의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모든 민족” “열방”으로 나가라고 되어 있다.
보편성이 구체적으로 가시화 된 것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강림 때부터다 (행 2:11, 17, 21, 39; 10장 11절). 교회의 원리가 되는 보편성의 성경적 기초가 되는 오순절의 성령선물은 교회의 첫 출발에 나타난 보편적인 축복이었다. 오순절은 성령의 보편적인 선물이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차열없이 내려주셨음을 보여준다. 물론, 언약의 하나님께서 미리 예언한 것이요, 약속하신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온 모든 민족을 향한 축복이다. 창세기 12장부터 17장에 이르는 동안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차별이 없이 모두에게 내리셨음을 보여주셨다.
구속역사의 흐름을 놓고서 볼 때에, 오순절 날은 바벨탑 사건이 반대로 역전되어서 선포되었다고 본다. 인류를 흩어버리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다시 통일하시고자 동일한 말을 주셨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언어로 흩어버린 것은 사람에 대한 심판이었다. 오순절 날은 정 반대의 날이 되었다. 각기 다른 언어이지만 이날 성령이 부어주신 것은 오직 복음 하나 뿐 이었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이나 다 복음 안에서 서로 다른 언어가 통합되었다.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보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모든 육체위에 부어졌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다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부족의 언어와 모든 민족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반항적인 죄인들의 심령에도 내려주신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주신 약속의 성취과정이다. 구원역사의 중대사건이 일어났다. 오순절 날에 무려 3천명이 회개하는 일대 사건이다. 최초로, 회개와 성령의 부어짐이 동시에 발생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회개하였다. 돌판이 아니라 마음판에 새겨져서 결코 없어지거나 지워지지 않는 엄청난 은혜의 날이었다 (고후 3:3).
나는 한국교회에 이런 날이 다시 오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의 부흥 집회처럼 다시 회개하고, 행복을 회복하며 갱신과 회복의 축복을 얻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을 깨끗하게 씻어서 가능해진 일이었기에, 성령의 갱신사역을 기대한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김재성교수 |
http://www.ck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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