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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언약’에 대한 교회론적 고찰

언약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4. 11. 16. 18:24

본문

노아언약에 대한 교회론적 고찰

- 창세기 9:25-27을 중심으로 -

 

이광호 목사

 

 

 

1. 서론

성경의 역사는 구속사이며 교회는 구속사의 줄기 가운데 존재한다. 그 구속사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으며 그 언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시대로 나누어 생각하게 되며 그 언약은 발전적 성격을 띠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담시대의 언약] - [노아 언약] - [아브라함 언약] - [모세 언약] - [다윗의 언약] - [새 언약]으로 이어지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언약의 성취가 이루어진다. 오순절 성령 이후 확증된 우리시대의 교회는 언약의 결정체라 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언약의 실체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창세기 9:25-27을 중심으로 한 노아 언약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추구하고자 한다. 노아언약은 앞의 아담시대 언약과 연결되며 그 이후 시대의 언약들과 직접 연결된다. 나아가 그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에 연결되는 언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이 본문은 근대 서구제국주의 사상을 뒷받침하는데 잘못 이해되어 왔다. 다수의 학자들은 우리시대의 백인들이 야벳족 계열, 황색인들이 셈족계열, 흑인들이 함족 계열이라고 단정지어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상 흑인들이 백인을 지배한 적이 없었다고 단정하며 현재 아프리카 흑인들이 서구인들보다 가난하며 백인의 지배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발전된 사상이 서구의 인종적 우월주의이며 함의 후손인 흑인들은 야벳의 후손인 백인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영향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미치고 있다. 창세기의 본문말씀이 과연 그러한 제국주의적 사고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요구한다.

한편 근래에 들어와서는 노아홍수와 그로 인한 언약을 환경신학과 연관지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신중한 주의를 요한다. 우리는 노아언약에서 메시야 약속을 배경으로 한 교회론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으로서 셈의 장막에 대한 예언성취의 본질적인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2. 노아언약의 신학적 위치

(1) ‘언약의 의미

성경의 역사는 언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성경에 기록된 노아에서 그리스도까지의 구속역사가 하나님의 언약관계의 영역 밖에 있었던 기간은 없었다. 결국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의 예언과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노아 언약(9:27), 아브라함 언약(15:18), 시내산 언약(24:8), 다윗 언약(89:3), 새 언약(31:31) 등에서 언약을 언급할 때 카라트 베리트’(תי?? ת??)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베리트언약이라는 말로 번역이 가능하며 카라트는 우리말에서 자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 가운데는 언약이 구약시대 예배와 관련하여 동물을 자르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 ‘베리트라는 명사에 따라 붙는 카라트에 대해서는 특별히 해석할 필요가 있지 않은 것이다. 이는 언어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양상이다.

언약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하나님의 자기 영광 회복을 위한 거대한 섭리적 계획이다. 그러므로 인간역사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 언약사상으로써 세상의 모든 일반 역사들을 해석해야만 한다.

그러나 죄인인 인간들이 추구하며 이끌어 가는 역사는 본성적으로 그 언약 사상을 일탈하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으로부터 끊임없는 탈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자신의 죄악의 역사를 전개해 가게 된다. 노아시대의 홍수심판도 결국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말씀을 떠난 인간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언약이 인간의 생명을 위한 것이라면 죄인인 인간의 역사는 영원한 죽음을 향해 나아갈 따름인 것이다.

(2) ‘의인 노아

성경은 노아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면 그가 의인이었던 것은 그의 윤리적 삶 때문인가? 윤리적 삶을 비교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은 문제이다. 적극적 윤리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소극적 윤리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한 답변을 제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소극적 윤리란 비윤리적인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다수의 사람들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이가 한두 살 되는 어린아이들이나 악행을 행할 처지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비윤리성을 말하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한편 적극적 윤리성이란 선행의 정도나 악행의 정도를 말할 수 있는데 과연 그 적극성이 소극적 윤리를 능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명확히 알고 있는 바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당대의 의인으로 인정하셨다는 점이다. 노아의 의인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 그의 사람 됨됨이나 윤리적 행위에 기초하지 않는다. 윤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노아보다 더 윤리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아는 홍수 이후 과음을 함으로써 상당한 실수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노아의 음주행위와 그로 인한 사건을 일반적 윤리 개념에서의 실수와 동일한 범주에서 해석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기는 커녕 그것을 빌미로 자녀들을 차등 대우하여 축복과 저주의 예언을 발설하게 된다. 그것은 화목한 가정을 깨트리는 행위일 수 있다. 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노아의 행위 자체를 선한 윤리적 행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아의 의인됨이 자신의 윤리성에 기초하지 않았음은 노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창세기 6:8에는,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은 노아가 의인이었다는 사실과 대비되는 구절이다. 결국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적 섭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신 것은 노아의 의로움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즉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노아가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에서 칭의 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비단 우리시대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인정으로 성도가 의롭게 되는 교리는 우리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다. 노아가 의인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메시아에 대한 그의 믿음과 연관된다. 아담 이후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 여자의 후손’(3:15)을 통해서만 인간의 삶의 의미가 있음을 그가 믿음으로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노아의 의(11:7)로 인정하셨던 것이다.

 

(3) 소수의 몇 사람만을 위한 거대한 방주

노아의 방주는 그 크기가 현대인들이 생각할 때도 엄청난 규모였다. 그 방주의 규모는 노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즉 노아가 그 방주에 타거나 싣게 될 사람의 수나 동물들의 수 그리고 물건들을 결정하여 그에 맞는 크기의 방주를 건조한 것이 아니었다. 그 방주에 들어가게 될 사람이나 동물의 수는 하나님께서 홀로 결정하셨다. 그 방주의 절대적으로 많은 공간은 다양한 동물들이 차지했다. 방주에는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없었다. 방주의 공간은 넓었지만 그것은 인간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고 도리어 여러 동물들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 방주의 규모에 비해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 그 홍수로 부터 구출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거대한 방주에 그 많은 동물들이 탔던 것에 비해 더 많은 인간들이 구출되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일반 윤리적 종교개념에서 본다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그 구원의 방주에 태우도록 노력했어야 했다. 만일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로운 신이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자세를 가졌어야 했으며, 구원의 방주에 타도록 미리 작정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 방주에 탈수 있게끔 적극적으로 기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으며 노아와 그의 가족도 그런식으로 기도하지 않았다.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 중 불과 여덟명의 생명만 홍수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대개 노아와 그 아들들로 말미암아 무너진 창조질서를 회복하여 새로운 세계에 살도록 하기 위해 홍수가 있었다는 일반 은총론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말할 수 만은 없다. 하나님의 관심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다시금 세상을 번창하게 하실까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유지되는 창조질서 가운데 보존되어야 할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께서 거하실 장막의 형성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고 단지 8명만 그 방주에 타도록 허용하신 그 의미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홍수를 통한 앞뒤 시대의 단절과 새로운 세계

노아시대의 대홍수는 당시의 모든 인간들과 앞선 시대에 이룩된 인간들의 모든 문명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었다. 단순히 사람들과 생명있는 것들만 멸망시켰던 것이 아니라 죄의 뿌리가 되고 인간의 유혹이 되었던 모든 문명들을 파멸시켰다. 인간들이 스스로의 삶을 위해 세운 모든 문명은 도리어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누리게 하는 현세 지향적 땅의 신학으로 변화되어 갔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어야 할 셋의 계보에 속한 인간들 마저 그들을 닮아 세속화 되어갔던 것이다.

홍수 이후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비문명화 된 새로운 시대를 경험하며 소위 원시시대에 돌입하게 된다. 그들의 새로운 삶은 기대에 부푼 일반적 관점에서의 희망적인 삶이 아니라 도리어 고통과 심한 노동을 요구하는 시대가 된다.

노아 홍수 이후에 출생한 인간들은 그 이전 시대의 문명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초기 몇 대 동안에는 그 이전 시대를 경험한 여덟명의 조상들을 통해 그 이전 시대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간접 경험을 했을 것이지만 후대의 인간들에게는 그것이 신화와 같은 이야기였을 따름이었다.

홍수 이전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에게 있어서 문명이란 단어는 살아있는 용어가 아니었다. 더구나 노아로부터 몇 세대가 지나 먼 지역으로 흩어져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을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시대의 사람들은 아담 시대에 허락되었던 하나님의 선물인 문명의 상당한 부분 마저 상실한 인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시대의 타락한 인간들에게 보편은총에 속하는 문명의 선물을 허용하셨다. 불의 사용, 철기의 사용, 악기를 다루는 방법 등이 곧 그것들이다. 홍수 이후 시대의 사람들은 그에 대한 사용 방법들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전수 받았을 따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미개한 상태로 돌입했다 해서 그들이 지능적으로 원시인이 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3. 대홍수 이전 시대의 땅의 신학과 하나님의 심판

(1)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하던 시대(마태복음 24:37-39; 누가복음 17:26,27)

신약성경은 노아홍수 이전의 시대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하는 시대로 일컫고 있다. 이는 죄의 목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타락한 당시의 인간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땅에서 만족스럽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윤리적으로 타락한 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윤리적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일반 윤리적 타락과 결부시키는 것은 창세기 6: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6: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으로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의 기록이 윤리적 타락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겠지만, 도리어 그 기록의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을 잊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일상적인 생활을 일컫고 있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하는 말의 표현을 자칫 방탕이나 성적문란을 연상하게 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비윤리성에 빠져있는 그런 사람들에게만 응징이 내려졌을 것이며 당시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삶이 비윤리적으로 방탕했다는 논리에 접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 이전의 시대는 무정부 상태의 사회시대는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시대의 용어를 빈다면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부흥하여 풍요를 누리던 안정된 시대였다. 그에 대한 증거로는, 당시에 있었던 강력한 네피림들이 세상을 통치했으며 노아방주를 건조하는데 불신자들의 난행으로 인한 불상사가 일어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면서 안정적인 지상의 삶을 구가하고 있었던 점 등을 들 수 있다.

(2) 노아홍수와 세례(베드로전서 3: 19)

베드로는 노아홍수의 의미를 교회론과 결부시키고 있다. 그는 홍수의 의미를 세례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는 경계(境界)를 의미한다. 노아홍수의 물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명확히 보여주며, 하나님의 편과 세상의 편을 분리하는 기능을 한다.

예수님께서는 양과 염소 비유, 그물에 잡힌 물고기를 분리하는 비유, 알곡과 가라지 비유 등을 통해 분리를 선언하고 계신다. 사도바울은 세례가 세상에 대한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공급받게 됨을 설명하고 있다. 즉 참 생명이란 세상에 대한 죽음을 통과한 생명인 것이다.

노아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물로 인해 죽었다. 그러나 노아와 그 가족은 많은 사람들을 심판했던 그 동일한 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이전시대의 삶의 방식으로 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사도바울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면서 홍해 바다를 건넌 사실과 동일하게 설명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널 때 세례를 받은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고전 10:1,2). 홍해바다의 물은 애굽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을 분리하는 역할을 했다. 홍해바다의 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을 얻게 되었지만 애굽의 군인들은 그 동일한 물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던 것이다.

노아홍수의 물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의 물, 그리고 우리시대의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세례를 통한 물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에게 세상으로 부터의 분리와 참생명의 공급이 이루어짐을 직접 계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이는 곧 교회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언약은, 앞으로 셈의 장막을 통해 하나님의 거처가 형성되며 그것은 곧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교회의 설립을 계시적으로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아들들사람의 딸들간의 통혼(6:1-7)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대홍수를 통해 당시의 인간들을 심판하신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진리와 비진리의 벽이 허물어지고 언약의 담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당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간의 통혼은 하나님을 버린 간음행위였다. 이러한 간음이 세속과의 화해의 모습으로 그 형태를 드러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과의 화해를 포기하고 세상과의 화해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간의 간음행위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바 간음이나 성적 문란 행위와는 차이가 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성적 문란 행위가 있던 시대와 동일하게 해석할 일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그 언약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 가운데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노아 홍수 이전시대 언약 가운데 살아야 할 다수의 사람들은 언약 바깥의 사람들의 가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창세기 62하나님의 아들이란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며, ‘사람의 딸들이란 언약 바깥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그들이 통혼했다는 것은 가치기준을 허물고 모든 것을 뒤섞었다는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했을 때, 저들의 눈에 보기에 대단한 인물들이 태어나서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성경은 그들을 네피림’(םי???)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타락한 자들이라는 의미이다. 세상과의 화해가 곧 타락이며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유능하고 위대한 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4. 노아방주와 여덟명의 생존자

(1)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멸망시킬 때 그 심판의 기준은 윤리적 기준이 아니었다. 당시에도 순진한 어린아이들이 있었으며 연세 많거나 질병에 걸려 범죄능력이 소멸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임신중인 부녀자들이 있어서 태중에 있는 순진한 생명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나님께서는 범죄능력이 상실된 그런 사람들 조차도 예외없이 모든 인간들을 홍수로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당신 스스로 정하신 였다. 에서 벗어난 모든 인간들은 심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개별 인간들의 윤리적 정서나 실제적 범죄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멸망시키는 존재임과 동시에 그 중에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 존재임을 홍수사건을 통해 명백히 보여주고 계신다. 그것은 곧 심판주요 구원주이신 하나님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노아가족의 생존 의미

우리는 노아 가족의 생존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가족 8명을 홍수심판을 피하게 하신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홍수를 통해 무자비하게 죽임으로써 심판하신 것은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시고자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적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인간들을 홍수에서 구출하신 데 반해 수많은 동물들을 구출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인간과 더불어 전체적인 우주적 회복에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노아 식구들의 생존은 하나님의 구속에 연관되는 구출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 가족을 홍수심판을 면하게 하여 살리신 것은 노아를 위해서라거나 그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3:15에서 그 여자의 후손을 통해 회복하게 될 영광을 언약하셨는데, 이제 노아와 그 택하신 자손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룩하실 계획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홍수심판에도 불구하고 생존하게된 인간들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의 영광에 귀착되는 것이다.

 

(3)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과연 축복을 받았는가?

노아홍수 이후의 사람들이 생명을 연장 받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노아와 그의 가족이 남들과 같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 자체가 큰 은혜이며 축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단순히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생명이 연장된 사실, 즉 남들 보다 좀더 오래 살았다는 것 자체가 정말 축복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홍수 이후 그들의 삶은 즐겁고 행복한 삶이 아니라 고독하고 힘든 삶이었다. 모든 문명의 이기들이 상실된 형편에서 세상적 즐거움이란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 한 분 만을 삶의 의미로 생각하며 사는 것을 축복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복을 누렸다.

그렇지만 노아의 음주사건으로 인해 세 아들 중 어떤 아들에게는 복을 약속하고 다른 어떤 아들에게는 저주를 약속했을 때 그들에게는 우리가 생각하는 바 일반적인 복의 개념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자녀들에 대한 각기 다른 노아의 축복과 저주 예언은 가정을 더욱 어려운 지경에 빠뜨렸을 것이 틀림없다. 홍수 이전 시대의 모든 사람들과 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이 파괴되고 이제 단 한 가정이 외롭게 남아있는 판국에 가장이 자녀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기원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형편과 심정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의 진정한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언약된 인간(‘그 여자의 후손’)을 통한 자신의 영광의 회복에 있다. 그것은 창조와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과 직접 연관되는 의미이다.

일부 학자들은 노아언약이 아브라함의 후손 혹은 이스라엘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보존과 창조질서 회복의 계시는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것이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관심은 여자의 후손인자’, 메시야로 묘사되는 구속자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에 있다. 그러므로 노아언약과 그의 가족 속에 나타난 중심인물은 보이는 노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메시야이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셈의 장막을 통해 임마누엘로 보내시게 될 메시야와 그로 말미암아 설립될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관심을 두고 계셨던 것이다. 그 교회가 세상을 심판할 때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5. 홍수 이후시대와 노아의 음주사건

(1) 고독한 삶의 전개

노아홍수 이후 생존한 인간들에게는 힘들고 고독한 삶들이 전개된다. 그들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후기인류문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에 태어난 인간들은 그 전 시대에 비해 훨씬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 틀림없다. 홍수 이전의 발전된 문명들은 모두 파괴되었으며 그동안 인간들이 쌓아올린 모든 과학적 시설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자리를 감추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의 노력에 의해 세워진 문명을 통한 삶의 의미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 시대와 견주어 생각해 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현대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교통, 통신, 전자, 컴퓨터. 의술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간들이 이룩한 과학문명으로부터 편리한 삶을 제공받고 있다. 노아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와 동일한 문명적 방향은 아니었겠지만 나름대로의 과학문명이 존재했었다. 그 모든 문명의 산물들이 한 순간에 완전히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어 버린 것이다.

홍수 후 노아의 가족들은 이른 바 1차 산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곡물을 심고 포도를 재배하며 목축을 함으로써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2, 3차 산업에 대한 개념은 있을 수 없었다.

 

(2) 노아의 음주사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 노아가 포도주를 과음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마도 노아는 자연스럽게 포도주를 마셨는데 그것이 지나쳤을 것이다. 하여튼 노아의 음주사건은 우리가 잘 따져 생각해 보아야 할 사건이다. 과연 우리는 그 노아의 음주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다수의 학자들은 노아의 음주를 그의 실수로 해석한다. 만일 그가 음주를 하지 않았더라면 함의 가계를 저주하는 일 따위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다. 노아의 음주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이 발설되기는 하지만, 음주로 인한 자녀들의 태도를 보고 그것 때문에 노아가 자의적으로 축복과 저주를 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즉 노아의 예언은 외형적인 음주사건과 직접 연관시킬 문제가 아니라 본질상 노아 자신과 연결지어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음주로 말미암아 발생된 그의 자녀들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언약을 계시하셨을 것이다. 이는 음주사건을 이용해 이미 예비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음주사건을 기화로 노아는 하나님의 언약을 발설하게 된다. 노아의 발설이 완벽한 효력을 갖추게 되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의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일반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노아가 과음을 하지 않은 평상 상태에서 언약적 저주와 축복을 했다면 도리어 호소력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과 섭리의 뜻을 단순히 그 외형에 의존하여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3) 노아의 저주와 축복

언약적 행위

노아의 저주와 축복은 오늘날 우리의 시대까지 효력있게 연결된다. 물론 그것은 인종적 개념으로 인한 효력이 아니라 교회론적 의미에서의 효력이다. 노아는 술이 깬 후 언약적 예언을 하게 되는데 셈의 가계를 축복하고 함의 가계를 저주한다. 그리고 야벳의 가계에 대해서는 다른 언약의 내용을 주게 된다.

노아가 셈의 가계를 축복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복락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룩하시고자 하는 뜻이 그의 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노아를 통해 야벳 족속이 받는 언약의 내용은 이 세상에서의 세상적 창대함이 셈의 자손이 아닌 다른 족속 즉 야벳족속에 의해 이룩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아는 함의 가계를 저주하는데 그가 함의 가계를 저주한 것이 함의 행위 자체 때문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 저주는 함이 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성경에는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의 저주를 말하고 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잘못을 범했다면 그것은 함이 책임져야 할 내용이다.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며 직접 잘못을 범하지도 않은 가나안에게 저주의 언약을 발설한다면 그것은 합리적이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노아에게 문제가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다.

한편 생각해보면 노아가 실수한 자기 아들을 용서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모진 고통을 함께 한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던가? 그 정도의 실수를 탓하기 위해서라면 호되게 꾸중을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노아는 아들에 대해 엄청난 저주를 쏟아낸다. 우리는 노아의 한 아들의 가계에 대한 저주가 자의적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노아의 언약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이었다.

노아가 야벳과 셈을 축복한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되어져야 한다. 야벳과 셈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는 잘못을 범치 않았던 것은 동일하지만 그 축복의 내용에는 엄청난 차등이 생긴다. 야벳이 번창하리라는 축복은 언약적 축복이 아니라 일반은총이며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축복은 구속사 속의 언약적 축복이다.

윤리적 해석에 대한 문제점

우리는 노아언약에 대해 윤리적인 해석을 해서는 안된다. 학자들은 노아가 저주와 축복을 한 것을 윤리적 이유로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노아의 음주사건 자체를 실수로 이해함으로써 윤리적 문제로 결부시킨다. 그리고 노아가 과음 후 벌거벗은 채 취해 누워있을 때 그의 세 아들들이 취한 행동들을 윤리적 잣대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형들에게 고한 것은 자녀로서 행할 수 없는 저주를 받을 만큼 비윤리적인 행위이며, 셈과 야벳이 그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덮어준 것은 자녀의 도리를 다한 매우 윤리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즉 함의 부끄럼 없는 관능성은 야벳과 셈의 겸양과 함께 도덕성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함의 비윤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함은 벌거벗은 아버지 노아의 몸을 보고 음란한 재미를 보았다는 억지 주장을 하기도 한다.

결국 노아가 세 아들들에게 각기 다른 저주와 축복을 한 것은 바로 그들의 행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윤리적인 면이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문제가 있으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는 이미 그 이전에 결정된 하나님의 뜻이었다.

특히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 함이 아니라 노아의 음주사건과 아무런 상관도 없고 잘못이 있지도 않은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았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노아언약을 윤리적 이유를 바탕으로 해석할 수 없음이 명백해진다.

 

 

6. 자연언약과 그에 대한 이해

(1) 땅에 대한 보존언약

하나님께서는 땅에 대한 보존언약을 하고 계신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니”(8:21). 이 말씀은, 인간의 부패로 인해 땅이 저주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그 이전에도 이미 있었던 일이다. 창세기 3장에는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땅을 저주하셨다. 그래서 땅이 엉겅퀴를 내고 가시를 내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저주가 인간을 통해 들어오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다시는 사람들의 범죄 때문에 물로써 땅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계신다. 이것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앞으로 다시는 홍수심판을 않겠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보존하게 될 그 땅이 하나님이 예비하시게 될 그 땅을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후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실 특별한 땅이 보존되는 그 땅에 포함되어 있음을 예시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 마지막날까지 땅을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창조회복을 위해 피조세계를 보존해 두시려는 의도에서였다. 하나님의 관심은 지구의 모든 땅 자체가 아니라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거하게 되고 그들 가운데 보내시게 될 메시야를 잉태하는 땅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2) 자연에 대한 보존언약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연에 대한 보존언약을 하신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8:22). 이 말은 물론 앞의 내용과 직접 연결된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의미는 자연에 대한 보존언약과 더불어 최종심판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 가운데는 노아언약을 환경보존과 관계있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는 자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자연을 보존 및 보호해야 할 의무자로 이해하려고 하는 특색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근대이후 인간들이 자연을 지나치게 훼손하여 산업발전을 추구하고자 한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며 그에 대한 교훈은 이미 노아언약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이해할 수 없다. 원래 지구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고 하셨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범죄하기 이전에 주신 축복이다. 범죄하기 이전의 인간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모든 피조세계를 지배했겠지만 타락한 인간들이 가시와 엉겅퀴가 난 세상을 다스릴 때는 이미 원래 하나님의 취지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의 그에 대한 개념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께서 자연을 보존하시려 하는 뜻은 하나님의 고유한 뜻에 의한 것이며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 가운데 땅을 정복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연 보존의 원래적 의미가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과 관련됨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7. 하나님께서 거하실 장막으로서의 셈의 혈통

(1) ‘셈의 하나님 여호와’ - ‘여호와 셈의 하나님’(24:27)

셈의 하나님의 여호와라는 언약적 표현을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택하신 백성의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전체인간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거부하신다. 그는 타락한 인간들 가운데서 자신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특별히 지목하신 백성이 있음을 노아의 자손들 가운데서 다시금 확증하고 계신다. 이는 창세기 3:15그 여자의 후손이 셈을 통해 오시게 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에게서 나타나며 모세시대에 그대로 계승된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29:45,46).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써 그 하나님의 백성되기를 거부했으며, 모든 인간들은 그 첫 번째 아담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형편 가운데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자기 백성을 형성하여 가심으로써 은혜를 베푸셨다.

(2)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 - ‘셈의 장막에 거하실 하나님’/ ‘태의 형성

하나님께서 셈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장막에 거하시겠다고 언약하신 것은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이다. 셈의 장막들 가운데 거하실 하나님을 미리 드러낸 노아의 언약적 교훈은 미래에 오시게 될 그리스도를 위한 태()의 형성을 의미한다.

׃וי??? ה??? םי??? ד?? ן??? רוּראָ ר?א?? (25)

׃וֹמ? ד?? ן??? י?י? ם? י??א ה??? ?וּר? ר?א?? (26)

׃וֹמ? ד?? ן??? י?י? ם? ־י??? ן???? ת??? םי??? ??? (27)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26)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 나타난 노아의 전체 논술은 26절의 ם? י??א ה??? ?וּר? ר?א??’(그리고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27절의 ם? ־י??? ן????’(그리고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말씀에 집약된다. 즉 노아의 이 언약적 논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26절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27절의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 거하리라는 말씀인 것이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문구는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는 하나님에 직접 연결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27절 중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 거하시리라는 문구를 살펴보고자 한다.

 

27ם? ־י??? ן???? ת??? םי??? ??? 의 대한 번역과 해석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은 셈의 장막들에 거하게 될 것이다”(私譯)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시기를 원하며, 그리고 하나님은 셈의 장막들 에 거하소서”(私譯)

 

번역: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한글개역성경)

하나님이 야벳을 크게 일으키셔서, 셈의 장막에서 살게 하시고”(표준새번역)

“May God enlarge Japheth, And let him dwell in the tents of Shem"(NASB)

“God shall enlarge Japheth, and he shall dwell in the tents of him”(KJV) “May God extend the territory of Japhet; may Japheth live in the tents of Shem”(NIV)

 

문장('He shall dwell')주어가 무엇인가?

우리는 위 구절에서 문장의 주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살펴야 한다. 야벳이 주어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주어인가? 다수의 학자들은 셈의 장막에 거할 자가 야벳이라고 생각한다. 칼빈의 주석에는 원본이 정말 야벳을 주어로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시리라고 되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히브리어의 특색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문맥의 의미상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석될 경우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 대상에 대해 명확한 정리가 필요하다. 그렇게 된다면 이 구절에서 보여주는 것은 야벳의 축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Walter Kaiser셈의 장막에 거하게 될주어가 하나님이어야 하는 이유를, 앞 절의 주어가 표현되지 않은 다음 절에 계속되리라는 가정 앞 행의 간접 목적격을 주어(야벳)로 사용하는 것은 문맥상 확실한 근거를 요구한다는 점 다음 몇 장의 문맥은 셈의 축복을 기념하는 처음 인물로 묘사하고 있음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He shall dwell in the tents of him) 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절 ם? ־י??? ן????이 야벳을 지칭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데 그 이유는 야벳은 이미 창대하게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야벳과 셈의 관계

이제 우리는 야벳과 셈의 관계를 관계적 측면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한 적이 있는가? 또한 그럴 가능성은 있는가? 그것이 과연 지배와 통치, 그리고 그 가운데서 얻어지는 정치, 경제, 문화적인 영향을 말하는가?

학자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에 대한 해석을 하면서, 그들(야벳의 후손)이 셈족의 영향을 받을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초대교회 교부들은 거의 일치하게 이 말을 영적인 의미에서 셈의 구원적인 축복에 야벳 족속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떤 학자들은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야벳의 자손들이 언젠가 셈 족속의 땅을 차지할 것이며 그 주민을 정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도 셈의 자손이 땅과 관련된 그런 류의 축복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이들은 그렇다고 답변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셈의 후손들이 그런 축복을 받으며 산다고 해도 과거 역사시대 가운데서는 어떠했는가에 대한 면밀한 살핌이 있어야 한다. 성경은 각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도리어 학자들 가운데는 야벳을 창대케 하사에 있어서 히브리어 תפי와 어원적으로 관련된 התפ부드러운 말로 꼬이다’, ‘이런 저런 말로 구슬리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Calvinתפי의 의미를 확대하다라는 뜻으로 보고 이 번역을 지지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벳을 평탄하게 다시 데려 오시리라또는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시리라는 말이라고 해석한다.

Geerhardus Vos, 야벳의 후손이 셈의 후손의 영토를 실제로 정치적인 정복을 하게 되고 그 물리적 정복이 야벳에게 종교적 축복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으로 해석한다. 그에 대한 일차적인 정치적 정복이 영적 의미와 함께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셈의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Matthew Henry도 이와 유사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이 구절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야벳을 권고하사 그 같이 타이름을 받아 그가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리라고 해석하며, 복음상으로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서로 하나가 된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대다수 학자들은 תפי확대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정치적 경제적 지배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문장 속에서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문맥과 전체적 의미를 고려할 때 그런 해석은 옳지 않다.

 

장막들거하심의 의미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신다고 할 때 거하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직접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는 구속사적 측면에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게 될 임마누엘과 연결되는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들에 거하신다고 했을 때 장막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말 성경에는 장막이 단수로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장막들이라는 복수로 되어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 처럼 대다수 성경의 번역과 학자들의 견해는 야벳이 여러 셈의 장막들에 살게 되리라는 말로 해석한다. 과연 그런 해석에 만족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야벳의 자손들이 셈의 자손들의 평면적인 여러 장막들 안에 살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존재할 셈의 자손들의 여러 장막들에 거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구속사 가운데 존재하는 언약적 장막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 아브라함의 장막에 거하셨으며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민족과 그들 가운데 있는 성막(tabernacle)에 거하셨다. 그리고 다윗 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하셨으며 궁극적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오순절 성령의 오심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으로의 기능을 감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 한다.

 

8. ‘셈의 장막아브라함의 집그리고 교회의 연관성

(1) [여자의 후손 - 셈의 장막 - 아브라함의 집 - 다윗 왕국 - 임마누엘 - 교회]

Matthew Henry는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비단 부분적이기는 하나 그에 대한 적절한 언급을 하고 있다. 창세기 9:24-27 주석에서 그는 이것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셈의 후손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계속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유대인들이 유래되었으며 이들은 대단히 오랫동안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신앙고백을 한 유일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셈의 장막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새언약에 대한 언약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개념이다. 이를 세분하자면, 여자의 후손이 오게 될 공간적 개념으로 셈의 장막이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며 이 언약이 선택된 약속의 땅과 백성으로 집약되는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더욱 구체화 된다.

모세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 율법과 그 율법 안에 거하는 백성들 가운데 존재하는 장막을 거처로 삼으셨다. 다윗왕국 시대에는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를 통해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을 그 거처로 삼으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그 의미를 훼손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이방인의 손에 넘기셨다가 다시 회복하시기를 되풀이하게 된다. 결국 약속된 메시야가 오셔서 성전과의 일체성을 선언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거처의 의미가 확증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다윗언약에서 성전을 통해 완성되어 그 실체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기영광을 회복하신다. 그가 자신의 언약을 실현하시고자 친히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이다. 그가 친히 모퉁이 돌이 된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엮음으로써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집으로서의 교회는 노아언약에서 이미 보여지고 있는 개념이다. 죄악된 세상 가운데 그의 거처가 형성될 것이 약속으로 보여지고 그것이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 되는 것이다.

복음서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고 시험한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답하신다. 이는 심령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자가 이미 너희 민족 가운데 사람의 몸을 입고 임마누엘로 와있다고 답하시며 자신을 가리키신 것이다. 셈의 장막에서 언약으로 제시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셈의 장막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세워지는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에는 재창조적 개념의 통일성이 있다. 셈의 장막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세우신 교회는 오늘날 이방인들 가운데 택함을 입은 우리를 포함한다. 이는 하나님의 관심이 택하신 백성들로 구성된 보편교회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셈의 장막과 교회의 양자 사이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공간적 개념이다. 하나님께서는 셈의 장막에 거하실 것을 스스로 언약하셨고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그렇게 하심으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셨다.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로서의 셈의 장막은 아브라함의 시대에 와서 구체화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거하실 언약의 땅과 그 땅에 살게 될 백성을 약속하심으로 노아의 언약을 구체화 하셨던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의 소유이다. 그리고 그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초는 그의 말씀과 그의 몸된 교회에 있다. 즉 교회는 예배할 때 하나님을 교회로 불러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9. 결론

노아언약의 중심은 셈의 장막그 장막에 거하시게 될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물로 심판하신 후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스스로 거하시게 될 셈의 장막들이었다. 그 장막을 통해 창세기 3:15절에서 말하는 바 그 여자의 후손이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여 모든 인간을 자기 휘하에 두고 있는 사탄을 심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아 홍수와 그것을 통한 인간의 심판에 주어진 언약 가운데 이 점을 조금이라도 간과하게 되면 주변의 작은 약속들이 더 크게 부각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따름이다. 노아시대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떠났던 것은 하나님의 거처를 제거하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통혼한 것은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기능을 확립해 가야할 언약의 백성들이 도리어 사람의 딸들의 세상을 자기 거처로 삼음으로써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만족을 구가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택하신 자녀 가운데 형성될 장막에 대해 미리 말씀을 통해 계시하셨다. 노아 언약을 홍수 이후의 인간의 번영을 약속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노아언약을 단순히 자연보존이나 환경보존 논리로 이해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종속적 개념임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백인과 흑인 등 제국주의적 개념으로 지배 통치논리를 주장하는 것도 잘못이다. 노아 홍수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거하실 셈의 장막들과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노아홍수로 인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분명히 이해해야 할 점은 [그 여자의 후손 - 인자 - 임마누엘 - 교회의 주인][아담시대의 언약 - 노아언약 - 아브라함 언약 - 모세언약 - 다윗언약 - 새언약]과 중첩되어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실 것을 언약으로 선포하신 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설립될 교회와 연결된다. 우리시대에 하나님께서는 교회, 즉 택하신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언약을 통해 교회의 설립을 미리 그림자로 예표하여 보여주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그 나라를 진실로 소망해야 할 것이다.

 

 

http://siloam-church.org/sub_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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