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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차. 공동체를 위한 희생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3. 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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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차. 공동체를 위한 희생


 

 

본문: 16:35-40

날이 새매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그 말대로 바울에게 말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 대,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세 가지 의문

 

 

오늘 이야기에는 세 가지 의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왜 상관들이 바로 그 다음날에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고자 했느냐 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왜 바울은 매를 맞기 전에 자기가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고 세 번째로는, 끝까지 신분을 숨기지 않고 뒤늦게 밝혔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의문


 

 

사실, 어제만 해도 상관들은 군중들의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죄도 묻지 않고 바울과 실라를 무조건 매질하고 가혹하게 다루었습니다. 마치 당장이라도 사형을 시킬 것처럼 마음을 먹고 지하 감옥에 차꼬를 채워 구금시켰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루 밤 사이에 마음을 바꾼 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입니다.

 

 


먼저 칼빈의 해석입니다. 이들은 전날에 빌립보 시민들이 소란을 일으키며 거의 폭동 수준에 이르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일단 바울과 실라를 매질하고 옥에 가두었는데, 뒤늦게 소란의 원인을 조사해 보니 바울과 실라가 무죄하고 오히려 선동자들을 처벌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 날이 새자마자 바로 석방을 명했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상관들이 지나치게 성급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런 실수의 원인에 대해 칼빈은 보통 권세가들이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다룰 때 자기들의 잘못은 개의치 않거나 잘못을 알아도 대충 무마하고 넘어가려는 습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만인이 공평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법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또 하나의 관점은 35절의 날이 새매라는 표현에 대한 해석입니다. 여기서 은 영어로 ‘daylight'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을 헬라어로 말하자면 포스 테스 에메라스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날이 새다데 게노메네스로 기록되었는데 이 말은 그냥 새벽(dawn, auge)이나 아침(morning, proi)이 아니라 특정 할 수 없는 어떤 날을 뜻합니다. 그래서 일부 헬라어 전문가들은 날이 새매라는 말은 그저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나 아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일정한 결과에 이른 상태, 즉 새로운 국면 혹은 상황이 도래한 것을 뜻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국면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냥 새 날이 밝았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들 중 하나가 일단락되고 다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것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다시 말해 상관들이 마음을 바꾼 것은 전혀 다른 새로운 상황이 도래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문법적인 해석의 방법으로 우리는 이런 관점에도 주목해야 하지만 한편으로 개혁주의적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확대적인 해석이 되어 전혀 다른 의미를 생산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아무튼 성경은 상관들이 갑자기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 정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지 않은 부분은 추론하고 유추하는 능력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추론적인 해석에 대해 이미 누가는 누가복음을 기술하는 방식의 하나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1:3)


 

 

우리는 어떤 일을 조사하고 연구할 때 누가가 가르쳐 준 4가지 원칙과 원리들을 잘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1) 먼저 모든 일을 전체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부분적인 관점과 전제는 항상 오류를 낳습니다. 나무의 줄기를 바라보지 않고 가지만 바라보면 편견으로 기울어집니다. 다른 말로 통전적 관점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2) 다음으로 근원부터 따져야 합니다. 시작을 모르면 방향성과 목표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시작이 곧 근원입니다. 근원을 모르면 허공중에 떠도는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기독교는 근원을 분명히 밝히는 종교입니다. 그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이라는 근원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성경의 족보 신학은 바로 이 근원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3) 그리고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드러난 것은 드러난 대로 자세히 조사해야 합니다. 있는 것은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 해야 합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하고 긴 것은 길다고 해야 합니다. 대충 하는 것이 항상 문제의 원인이 됩니다. 자세히 살피는 것은 철저히 조사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칙과 이론에 의거하여 성경을 철저히 조사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4) 마지막으로 자세히 언급되지 않은 것은 미루어 살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추론적 혹은 유추적 해석이라 말합니다. 주일 날 교회에 다녀온 것을 보면 당연히 예배를 드린 것으로 유추합니다. 화장실에 다녀 온 사람을 보면 당연히 그 사람이 용변을 본 것으로 유추합니다. 그러나 유추를 넘어 인간의 상상력이 포함된 지나치게 알레고리한 해석을 경계해야 합니다. 알레고리는 필요한 것이지만 오용하면 신령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상관들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꾼 이유에 대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지난밤에 큰 지진이 났습니다. 지진이 났는데 감옥만 흔들렸을까요? 아마 온 빌립보 도시가 다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정말 잠 못 이룬 사람들이 누굴까요? 바로 이 상관들이었을 것입니다. 전날 그들은 자기들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을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이게 양심입니다. 양심 때문에 죄를 지으면 괴로운 것입니다. 이때 이상한 일이 나타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두려움이 덮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값을 치루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속으로 어제 죄도 묻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었던 두 사람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미신적인 사람들은 이런 경우 조짐이 좋지 않다고 느낍니다. 뭔가 찝찝한 것입니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두 사람을 풀어주기로 했습니다. 상관들은 부하들을 불러 두 사람을 석방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35절에 기록된 이 사람들을 놓으라하는 표현은 정중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 헬라 말은 매우 경멸적인 어조입니다. 마지못해 풀어준다는 뉘앙스가 담긴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저것들을 죽여도 되지만 불쌍해서 내가 봐 준다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울과 실라를 잘못 판단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은혜를 베푸는 척 하면 두 사람이 고맙습니다하고 순순히 감옥을 나갈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상관들은 큰 곤란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그들의 장난 같은 제안을 정면으로 거절한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찾아온 부하들에게 자신이 로마시민권을 가진 신분을 밝힙니다. 자신들이 재판 절차도 거치지 않고 감옥에 수감한 자들이 로마시민이라는 소식을 들은 상관들은 갑자기 상이 노래졌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로마법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시민은 포르시어스법에 의해 신분을 보호받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의 생사에 권한 권한을 함부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특히 재판도 거치지 않고 로마시민을 억류하거나 감금하는 행위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습니다. 그러니 이 소식을 들은 상관들이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그래서 동이 트자마자 마음을 바꾸고 얼른 바울과 실라를 풀어주라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왜 바울이 매를 맞기 전에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이기에 충분히 위기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매를 맞고 감옥에 수감될 때까지 자신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칼빈과 브루스는 바울이 매를 맞기 전에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던 것은 그 소란의 흥분 중에 무엇을 주장해도 인정받지 못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시민은 일종의 마패 같은 로마시민권자의 증명서를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바울이 이 증서를 보이기만 했어도 충분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해석은 다소 아쉬운 점이 남습니다.


 

 

제가 소개하고 싶은 해설 중 하나는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의 해석입니다. 만약 그때 바울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거꾸로 되묻습니다. 그렇데 되었다면 유대인들이 가장 분노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부르셨을 때 바울은 이방을 위한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이방은 이방인 뿐 아니라 이방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이 디아스포라들이 모여 예배드리던 회당을 제일 먼저 찾아갑니다. 사도 바울에게 1차적 전도 대상이 바로 이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바울이 개인적인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자기가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힌다면 지금까지 해 왔던 복음전도는 끝나고 말 것입니다. 회당에 모여 있던 디아스포라들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겠습니까? 바울이 그래도 자기들과 같은 유대인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바울은 자기들과 다른 로마시민이라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앞으로 펼쳐질 전도 사역에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같은 편이 되어 주겠습니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때 바울이 그들 편에서 모든 고초를 당하지 않고 로마시민임을 밝혔다면 개인적인 위기는 극복되었을지는 몰라도 더 이상 바울의 복음전도사역은 지속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과 처지보다 하나님의 목적을 더 우선시했기에 바울은 억울하지만 모든 고초를 아무 불평 없이 겪은 것입니다.


 

 

세 번째 의문


 

 

그렇다면 왜 바울은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고 지금 감옥에서 나가라고 할 때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계속해서 빌립보에서 사역할 사람이 아닙니다. 잠깐 복음을 전하고 떠나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은 떠나지만 남은 성도들의 입장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배려이고 사려 깊은 행동이고 인격입니다. 나만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비록 우여곡절 끝에 자신은 풀려나고 떠나지만 남은 성도들이 더 이상 억울한 고초를 당치 않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단단히 관리들에게 못 박아 두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함부로 그리스도인들을 겁박하거나 핍박하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으로 찾아온 관리들에게 정색을 하고 강력한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것이 37절의 기록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당시 로마시민은 자신의 신분을 밝힐 때 마패 같은 나무조각을 보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라틴어입니다. ‘키우이스 로마누스 숨이라고 외쳤습니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입니다. 이 말이 이방인에게는 정말 무서운 말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주장한 것은 이것입니다. ‘감히 너희가 나를 풀어준다고? 가두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풀어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내가 권한이 없어서 너희들에게 매질을 당한 줄 아느냐? 당장 와서 사과하라!“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냄으로서 그 덕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라 남겨질 교회와 성도들의 안녕을 바란 것입니다. 나아가 이 모든 일이 로마관리들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증언하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상관들에게 주지시킴으로써 남은 성도들을 다시는 함부로 대우하지 말 것을 경고한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와 성도들과 복음전도를 위해기거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고초를 감수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런 수고와 희생을 통해 나타난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빌립보교회의 탄생인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40절을 보니 감옥에서 나온 바울과 실라가 루디아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이 집이 빌립보교회가 탄생한 곳입니다. 그러면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누구입니까? 먼저는 장소를 제공해 준 루디아와 그 식속들입니다. 루디아는 돈 많은 이방여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설립할 때에 이와 같이 물질을 사용하십니다. 또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여자를 천하게 보고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조건 등을 따지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음으로는 바울로부터 세례를 받고 주님을 영접한 간수와 그 가족들입니다. 간수는 로마의 장교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권세자도 함께 한 형제가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은 감옥 안에서 갇혀 있던 죄수들도 상당수 주님을 영접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에 놀라 감옥 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도망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바울과 실라가 보통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자들임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간수와 그 가족들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울 사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중 상당수가 빌립보교회의 일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가 포함되었을까요? 이 모든 사건의 원인제공자였던 점치던 귀신들린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혹시 교회의 일원이 되지는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정말 할렐루야하고 모든 성도들이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빌립보교회의 창립 멤버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성경은 형제라 합니다. 결코 함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함게 하기에는 너무 이질적인 이들이 모여 교회를 이룹니다. 그리고 서로 형제라 부르며 위로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같은 종류끼리 같은 레벨끼리 같은 이념끼리 뭉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렇게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구성원들이 그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만나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사도 바울은 훗날 교회론을 정리합니다. 그는 교회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로마인이나 상전이나 종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가까워진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서로를 막고 있던 막힌 담을 그리스도께서 허물고 세우신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 앞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비록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다르고 성질이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 달라 함께 하기가 힘들고 버거워도 참고 인내하시며, 그 사람도 똑같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음 받은 나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고백하시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함께 에베소서 110절을 큰 소리로 낭독하면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http://cafe.naver.com/ariel300/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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