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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감사와 골로새교회

김명순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4. 24.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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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감사와 골로새교회
김명순  (성약교회 목사)

 


우리가 소아시아에 있는 골로새라는 지명과 거기 있는 교회에 관해 아는 것은 신약 성경, 특히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들이 있어서이다. 주로 골로새서와 빌레몬서가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


바울 사도의 형편과 골로새 교회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골 2:1)


지금 우리들이 이 구절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골로새 교회 당사자가 아니니까, 아마 이 편지를 받은 골로새 교회나 라오디게아에 있는 성도들은 이때 바울의 심정을 상당히 이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구절을 두고 후대의 많은 해석자들은 골로새 교회는 바울 사도가 직접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가 아닌 것으로 여긴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 골 2:1에서 말하려 하는 것은 이 편지를 쓰던 그때의 형편일 뿐이다. 다만 사도와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육신적인 혹은 물리적인 관계만을 표현한 것이다. 이미 1장 3-29절에서 그 아들 안에서 구속하시고 몸인 교회를 이루게 하신 관계, 즉 영적인 관계를 심도 있게 말씀하였기 때문이다(1:13-14, 23, 28). 특히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이라 한 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는 것이지 아무도 바울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빌레몬서의 그 처음이나 마지막 부분에 거명된 인물들 중에 이미 바울을 보았거나 또 친숙히 아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 로마의 바울은 자신이 얻은 셋집에 상당 기간 구금당해 있으면서, 이미 가이사에게 항소했기에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서 3-4년 전에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어난 소동 중에 로마 군대의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 소요사태의 원인으로 유대인들에 의해 고소를 당했고, 이어 예루살렘에서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전임 총독 벨릭스에 의해 불법적으로 두 해나 구금 상태에 있었던 사도에게 베스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한 것은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새 총독에게 유대인들은 다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와 재판하기를 원한다 했고,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신임 총독은 바울도 원한다면 예루살렘에서 송사를 진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의 잔꾀로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중간에 없애려 한 것이다.

 

이때 바울이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거기서 심문을 받겠노라. 내가 가이사께 호소하노라”고 한 까닭에 지금 로마에 있게 된 것이다(행 25:10-11). 이렇게 로마에서 두 해를 머물렀는데, 그 기간 동안 바울 사도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가르쳤는데, 아무도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행 28:30-31), 

 

로마에 있을 때 에바브라의 예방(禮訪)은 사도로 하여금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을 향해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 아마 이것이 에바브라가 로마까지 여행한 목적이 아니었을까 한다.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의 고정된 사역자였다면 그가 이 편지를 가지고 돌아갔어야 한다. 그런데 이 편지를 들고 간 이는 ‘두기고’였다. 그리고 오네시모도 다른 편지를 품고 두기고와 함께 골로새를 향했다(골 4:7,9). 바울이 활동하던 그 시대, 곧 신약의 교회가 서고 30여년이 되어 가던 그 시대에 각처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누가 돌보고 어떻게 이끌었을지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 어쩌면 골로새 교회는 사도의 편지와 함께 간 ‘두기고’가 얼마간 돌아보았을 것이다(4:8). 두기고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받는 일꾼이었다(엡 6:21; 딤후 4:12; 딛 3:12).


바울 사도의 기도와 골로새 교회

로마에 구금되어 있는 바울은 함께 한 이들과 같이 골로새 교회를 비롯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교회와 신실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 기도 중에 먼저 그들에게 끼쳐 주신 많은 은혜들에 대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를 아뢰었다. 복음 진리가 골로새 교회 안에서와 온 천하 곳곳에서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음을 감사하였는데, 구체적으로 골로새 교회가 맺은 열매인, 그들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소망을 인하여 감사하였다.

또 바울 선생은 함께 한 이들과 골로서 교회를 위한 간구했다. 에바브라에게서 골로새 교회의 사정을 들은 날부터 기도할 때, 골로새의 신실한 형제들을 빠뜨리지 않았는데, 특히 골 1:9 하반절 이하의 내용으로 간구하였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 1:9-12 * 표준신약전서)


사도의 골로새 교회를 위한 간구는 오늘 내가 형제를 위해 드리는 간구여야 하며, 또한 형제가 나를 위해 하는 간구이기를 소원한다. 무릇 신자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다. 이것은 복음 진리로 거듭난 자에게 주신 특권이다. 그런데 신자는 그의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야 한다. 그 까닭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주께 합당하게 행할 수 있고, 이로써 모든 선한 일, 즉 인생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그를 땅에 두시며 보존하시며 이끄신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또한 귀기본(歸基本)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게 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알량한 지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확신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또 이 확신은 위로부터 오는 영광의 힘을 따라 이르고, 그 힘은 무엇이든지 이루게 하는 능력이 된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신자는 기쁨으로 자기 생활 가운데 임하는 여러 환난을 견디며, 시험과 유혹을 이기고, 오래 참는다. 이 참음은 내가 삶 가운데 임하는 주리를 트는 것 같은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 내는 게 아니고, ‘그분의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 것’으로 참되 기쁨으로 잘 참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광의 힘과 모든 능력으로 오래 참고 견딘 자는 아버지께 감사한다. 죄인이며 무가치한 자가 주가 빛 가운데서 허락하신 성도의 기업의 분깃을 얻었으며, 그 일을 하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이다. 사도는 골로새의 성도들이 거기에까지 이르기를 간구하였다. 오늘 우리들도 사도의 이 간구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아 행하여, 맺은 열매로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힘입어 오래 참음으로써 아버지께 감사할 수 있기를 구하며 또 소원한다.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깨달은 자는 자신이 거기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자이다. 그러니 확신 가운데서 그 같은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생활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 64, 116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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