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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주차.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다

최더함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7. 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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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주차.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다


 

 

본문: 21;1-14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리라.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3-4). ~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8-14).


 

 

1. 두로의 제자들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눈물의 작별을 한 바울 일행은 곧장 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 오릅니다. 고스와 로도와 바다라로 왔다가 이곳에서 다시 베니게로 가는 배를 갈아타고 구브로 섬을 거치지 않고 곧장 직선 길을 택하여 두로 항구에 도착합니다. 램세이(Ramsay)는 이 바닷길이 약 5일이 걸리는 뱃길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바울 일행은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냅니다. 오순절 전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던 앞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행보입니다. 그것은 지름길을 통해 항해했기에 그만큼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주의 제자들을 만납니다. 이것으로 보아 누군가에 의해 두로에 복음이 전해졌고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비록 바울의 직접 제자는 아닐지라도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기에 이들은 바울 일행을 기쁘게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도 바울에게 와서는 자신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건대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일주일이나 체류했으므로 아마 매일 바울에게 찾아와서 위험한 길이니 가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바울에 대해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이 하나님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 보통 사람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죽음의 선교여행을 하고 이곳에 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바울이 위험한 길에 들어서는 것을 만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좀 더 시간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더 많은 주의 일을 감당해 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두로에도 두란노학교를 세워서 많은 주의 제자들을 직접 양육해 준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더더욱 성령의 감동을 받았으니 제자들의 만류는 매우 끈질기고 강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칩니다. 이미 앞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의 예루살렘 길이 어떤 각오로 가는 것인지 밝힌 바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에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다’(20:24)는 선포는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결국 일주일 만에 바울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5절을 보니 제자들이 그들의 처자까지 동원하여 바울을 성문 밖까지 전송합니다. 얼마나 아쉽고 안타까운 또 하나의 이별의 장면이 전개됩니다. 영화로 치면 ‘say goodbye’라는 음악이 흐르고 부둥켜안은 채 눈물바다를 이루는 장면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일행은 이들의 진심어린 배웅에 대해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배에 오릅니다. 같은 이별이래도 세상과는 격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냥 울고불고 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항상 마지막에는 기도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 인생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감해야 합니다. 하루의 삶도 이와 같아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2. 가이사랴에서


 

 

중간에 잠시 돌레마이를 들렀다가 그곳의 형제들에게도 안부를 묻고 하루를 머물렀다가 이튿날 돌레마이를 출발하여 육지로 들어서서 드디어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가이사랴에는 전도자 빌립과 예언하는 그의 딸 넷이 살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 사는 빌립과 바울의 관계가 어떤 것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알기 위해 우리는 다시 20년 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81-6절의 이야기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 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이때 바울은 회심하기 전의 사울이었고 그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주동자였습니다. 특히 스데반 집사의 순교 시에 사울은 그의 죽음을 마땅히 여기고 교회를 잔멸하려고 남녀의 무리를 옥에 가두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이 일은 예루살렘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공식적인 박해의 신호탄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타지로 디아스포라했습니다. 바로 이 때 빌립도 끼여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은 한 마디로 악연입니다. 한 사람은 핍박자요 한 사람은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20년 만에 두 사람은 이제 같은 주의 형제로서 같은 선교사로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 계획과 뜻대로 될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생을 뒤돌아보면 하나도 내 의지나 계획대로 된 것이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나 모르게 진행되고 이루어져 왔는가를 보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하심과 섭리하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인생사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이런 만남을 바울이 알았겠습니까? 빌립이 예상했겠습니까?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이 아름다운 재회는 과연 누구의 기획일까요? 원수가 동지가 되는 이 기막힌 반전은 하나님이 아니면 창작할 수 없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늘 아름다운 결말로 이어지도록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결국은 해피엔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매력이십니다. 그러니 슬퍼하거나 좌절하거나 우울해 하지 마세요. 힘들어도 크게 한 번 웃어 봅시다. 어개를 펴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늘을 바라보는 자는 땅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바라보는 자의 얼굴만 기억하십니다. 땅으로 고개를 떨구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자의 얼굴을 모른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힘과 에너지가 철철 넘치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잠깐, 9절의 삽입된 장면을 살펴보고 지나가겠습니다. 빌립에게는 네 딸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처녀인데 모두 예언하는 선지자들입니다. 이 정도면 빌립의 집안은 경외의 대상일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한편으로는 인생길을 살펴주는 든든한 도우미로 고마운 집안으로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교회사가인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빌립과 네 딸들은 훗날 가이사랴를 떠나 아시아의 히에로폴리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빌립의 집에 어느 날 아가보라고 하는 선지자가 찾아옵니다. 이 선지자는 이미 1127절에서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그대로 적중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도 거의 20년 만에 다시 성경의 역사에 등장하더니 오늘 바울에게 온 것입니다. 유명한 선지자가 갑자기 빌립의 집에 나타났으니 바울도 속으로 저으기 놀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보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바울의 띠를 달라고 하더니 자기의 소족을 둘둘 말아 감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11절 하반부입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잠깐 여기서 우리는 아가보 선지자의 행위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행태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구약 선지자들은 말로만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종종 예언을 가시화하고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행위예언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왕국이 분열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실로 사람 아히야 선지자는 자기 새 의복을 찢었습니다(왕상11:29). 이사야 선지자는 앗수르에게 포로가 될 애굽인들을 설명하기 위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녔습니다(20:2).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의 모형을 만들어 자신이 그 모형을 포위 공격하는 행위를 연출함으로써 실제 예루살렘성이 바벨론에게 포위될 것임을 예고했습니다(4:1-3). 이렇게 행동은 말 못지않게 예언의 일부를 이룹니다.


 

 

보통 사람도 아니고 유명한 선지자의 입에서 다시 성령의 말씀을 전해 들으니 일행들의 마음이 일순 흔들렸습니다. 우리라도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발걸음을 막으시려고 선지자까지 동원하셨다고 당연히 그렇게 해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는 일제히 바울에게 다가와 예루살렘 행을 중단하자고 충언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회가 꼭 이것뿐이 아닙니다. 사태가 좀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운 결정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어떻게 말을 합니까? 너희가 어찌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이미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를 했는데 왜 자꾸 맥 빠지는 소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바울의 고집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결국 바울은 모든 사람의 권함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바울은 지금 많은 제자와 선지자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혼자 기어이 예루살렘에 가겠다고 우기는 꼴이 됩니다.


 

 

3. 바울은 고집쟁이인가?


 

 

, 여기서 우리는 큰 난관에 봉착합니다. 과연 바울의 이 태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왜 바울은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가? 그렇다면 바울은 여전히 성령보다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는 사람인가? 이 문제를 풀지 않고선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논해선 안 됩니다. 다시 말해 바울과 주위 사람들 중 누구의 말이 맞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두로의 제자들과 선지자 아가보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에게 충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가야 한다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것도 성령님이 예고하시고 바울을 직접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둘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현미경을 들고 좀 더 성경의 기록을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임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아가보 선지자도 분명히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 겁니다. “위험하니 가지 마라


 

 

이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님의 말씀을 자기 식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깨달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 버린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들을 통해 한 번도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예고한 바가 없습니다. 단지 위험한 길임을 알렸을 뿐입니다. 성령님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이 여정을 알려주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바울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울을 아낀다는 명목으로 바울의 발걸음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고집을 꺾지 않고 예루살렘 행을 결정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동기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만류했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고집을 부렸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바울은 분명히 고집쟁이입니다. 그러나 정말 바울이 성도들의 마음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바울도 가슴이 짖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아픔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자 하는 한 목회자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에게 최우선적인 가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9:15-16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바울이 로마에 가기 위하여는 그 앞길에 수많은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이미 하나님은 예고하셨고 바울도 이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바울도 슬쩍 사람들의 의견을 계기로 한 발 물러서 여정을 늦출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논의하거나 투표하거나 하지 않앗습니다. 하나님의 듯을 수행하는 일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개입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일에 육적인 일이 개입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많은 오해를 받을 지라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최우선적인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구약의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미 깨달은 바 있습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목숨보다 귀한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기 위해 여정에 오르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정말 대단한 것은 이미 이삭은 장성한 청년임에도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한 번도 반항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아브라함 또한 아들을 제단 위에 결박하여 누이고 기어이 칼을 뽑아 팔을 높이 치들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이삭을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순종을 보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장성한 이삭 또한 순종한 것입니다. 이삭은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연로한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칠 수 있었음에도 아무 말 없이 아버지의 결정에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험천만한 일을 수행하기 앞서 아브라함은 그 누구와도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내 사라와 일절 논의하지 않고 몰래 떠났습니다. 아내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육신적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가족들과 왜 의논합니까? 그것은 불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0.1%라도 마음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어떤 일이든지 자기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자기 문제는 줄이고 남의 문제를 키웁니다. 자신의 불순종은 가리고 불순종하는 이유를 갖다 붙입니다.


 

 

4. 결론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세상살이를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표를 달고 살아야 하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의 열매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보다 자기 생각을 앞세우는 것은 순종이 아니고 순종이 아니면 그 믿음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타락했기에 지금도 불순종할 수 있는 합리화를 시도합니다. 주일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어니까 속으로 이렇게 합리화하는 겁니다. 어제 늦게 잤으니까 좀 늦게 일어나도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순종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매일 매일을 핍박과 환난을 거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길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정면으로 뚫고 지나갔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조금의 합리화가 있었더라면 얼마든지 예루살렘 행을 연기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삶의 철학과 가치관이 담겨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푯대를 바라보며 쉼 없이 달렸습니다. 마지막 어느 한 순간을 바라보며 그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는 가운데 그 순간을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긴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 싸움은 조금의 방심과 틈이 생겨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바울은 그런 싸움을 평생초록 수행한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싸움을 피하기 위해 매일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다음에 다음에하면서 핑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그 승리의 날을 기다리며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열심히 달려야 합니다. 달리면서 마귀에게 경계가 둟리지 않도록 보초를 잘 서야 합니다. 맥아더 장군의 어록 중에 작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병사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전쟁에서 보초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가르쳐 줍니다. 철조망 하나가 뚫리면 다 무너집니다. 보초 한 사람의 경계 하나 하나가 모여 큰 방어막이 형성되듯이 우리 신앙의 철책선도 그렇기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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