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주차. 생명을 얻기 위하여
본문/ 21:15-26
“~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1.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이사랴에서 약 2주를 보낸 후 바울과 일행은 약 64마일(약 100km) 거리의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갑니다. 이때 가이사랴에는 나손이라는 주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 집에 바울을 모시기 위해 여행을 동행합니다. 여러 사본에는 누가가 이 나손을 통해 여러 숨겨진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취재하고 수집했다고 합니다. 특히 람세이는 누가가 애니아와 도르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손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나손의 집에 머문 것에는 다른 배경도 작용합니다. 알다시피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유대주의와 율법주의를 버리지 못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만큼 교회 안에 유대파가 득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누가와 나손을 비롯한 신자들은 헬라파에 속합니다. 헬라파도 여전히 이성 중심의 헬라식 사고와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지만 인간인지라 서로 생각이 다르고 믿음의 수준도 다르고 인생을 사는 방법 즉, 처세술도 다릅니다. 간혹 유대파와 헬라파는 서로 다른 의견으로 충돌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유대파는 유대인 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모세 율법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것입니다. 대다수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각과 행동은 과거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사례인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입으로는 주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고 머리로는 크리스찬이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여전히 오래된 ‘유불선주의’에 함몰되어 있지 않습니까? 특히 동양사회의 가족주의는 유교적 가르침과 정신으로서 우리 신앙의 공동체를 훼손하는 주범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교회가 되고 한 형제자매가 되었음에도 정작 가족의 일이 생기면 누구도 예외 없이 혈육의 가족을 먼저 찾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믿음과 신앙고백을 하고 하나가 된 성도가 진짜 가족이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고 누누이, 천만 번 가르쳐도 실제 하는 행동은 이 가르침을 무색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 우리네 실정입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서 바울은 헬라파 사람인 나손의 집에 일단 머물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여기서 우리는 사도행전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바울이 굳이 고초를 예상하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하는 진짜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제껏 사도 바울이 왜 그렇게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는 지가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단지 오순절이라는 절기행사를 위해일까요? 아니면 그냥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로마로 가야 하는데 그 전에 예수님이 활동했던 심장부인 수도 서울, 예루살렘을 한번 보고 가자는 것이었습니까? 둘 다 맞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머물 때 로마교회에 보낸 로마서에다 이것을 이미 기록해 두었습니다. 롬15:24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그렇다면 성도를 섬기는 구체적인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26-27절에 언급한 구제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굳이 예루살렘에 가고자 한 것은 이방인들이 기쁜 마음으로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 구제헌금을 모아 바울에게 전달하라고 맡긴 것입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받은 복음의 은혜에 대해 이렇게라도 빚을 갚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나님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셨습니다. 가면 붙잡힐 것이 뻔한데도 하나님은 기어이 바울을 이끌고 가십니다. 구제헌금 자루를 손에 든 바울은 할 수 없이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2. 이방인에 대한 편견
그런데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은 정도를 넘어선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돼지와 같은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선민의식이 낳은 우월감이요, 편향된 민족주의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남자들은 하루에 세 가지 감사 기도를 드린다고 하는데 첫째, 남자로 태어난 것과 둘째,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셋째,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이방인은 재산목록의 하나로 노예취급 받는 유대 여자보다 못한 존재로 대우받습니다. 유대인들이 북부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방인과 혼합되었다고 얼마나 개처럼 취급했습니까?
그러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의 자존심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교인들은 구제금을 환영하고 기꺼이 영광을 돌리며 받았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서의 화합이요 하나님나라의 출발이요 기독교 정신입니다. 예수 안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계급도 없습니다.
나아가 이 일을 통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고백하는 같은 성도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껏 유대인들은 민족주의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오직 자기들만의 하나님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드디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이정표입니다. 복음이 어느 특정한 민족의 소유도 아니요,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증된 이 일로 인해 드디어 기독교의 세계화가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3. 새로운 난관
아무튼 구제헌금과 함께 바울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야고보와 장로들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매우 따뜻하게 환영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교회는 이미 설립 20주년을 넘어선 중견 교회요, 믿는 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 대형교회로 성장한 것입니다. 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 목사님이셨고 여러 장로님들이 함께 교회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지도자들 앞에서 지금까지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의 역사를 증언하고 그간의 사역을 보고합니다. 모두가 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할렐루야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앞에 뜻밖의 난관이 또 나타납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사이에 떠도는 나쁜 소문을 전합니다. 21절에 보면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 같은 것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또 여러 유대 관습도 무시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근거없는 헛소문입니다. 바울이 모세를 무시한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또 할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행 16:3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함께 선교여행을 떠날 때에 그에게 할례를 명하였습니다. 바울은 절기를 존중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부랴부랴 아가야에서 그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소문이 난 것일까요?
심리학에서 소문은 왜곡되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보통 한 사람에 대한 인식은 첫인상에 좌우된다고 합니다. 매우 인자한 분이라고 남들은 다 평하는데 혼자 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동기를 살펴보니, 그 인자하신 분이 그날따라 몹시 언짢은 일을 겪고 기분이 상해 있었는데 그때 그분을 만나 좋지 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문이란 당사자에 대한 정서적인 오해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해 나쁜 소문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사도 바울은 출발할 때 핍박자였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악랄하게 박해를 가한 원수입니다. 이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온갖 악 소문이 예루살렘교회에 팽배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든 수월하게 풀리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바로 이 점을 염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그것이 22~24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결론은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유대인의 ‘결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결례는 구약의 나실인의 서약에 근거합니다. 결례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한 달 짜리가 있고 3개월, 1년 혹은 평생결례도 있습니다. 다만 결례 기간에는 세 가지를 금지합니다. 하나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둘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으며, 셋은 서원이 끝날 때에 예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장로들의 결례 제안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26절에 보면 바울은 흔쾌히 수락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결례를 행하고 마칠 때에 제사까지 드립니다. 자, 이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까? 얼핏 보기에는 바울이 자신의 믿음과 가치관을 포기하고 살기 등등한 유대인들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꼬리를 내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율배반적인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복음을 외치더니 위급한 상황이 도래하자 슬그머니 복음을 내려놓고 율법을 따르는 것이라면 20년 전에 베드로를 꾸짖은 것은 완전히 위선적인 행동이 됩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것 때문에 이런 결단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바울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울의 속속들이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의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무엇 때문에 이런 결례를 수용했습니까? 과연 무엇을 얻으려고 결례의 제안을 수용하고 인내했던 것일까요? 그 해답이 고전9;19~23에 있습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하미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결국 사도 바울이 나실인처럼 결례를 행한 것은 한 사람이라도 생명을 얻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궁극적인 최종 목적지는 서바나입니다. 이곳을 가기 위해 로마에 들러야 하고, 로마에 가기 위해 먼저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한 것입니다. 굳이 이 과정이 필요한 것은 이 모든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모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인정과 협조가 다시 한 번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인정하고 파송한 사람이라면 어디서든지 먹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바울에 대해 몇몇 지도자들을 제외하곤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을 불식시키지 못한다면 바울의 다음 사역의 수행이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바울은 지금 매우 거추장스러운 일, 이것은 하나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 일을 직접 치룬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눈높이 교육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아이에게 맞는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인이 이렇게 시를 읊었습니다.
“번개에 놀란 아이의 마음을
자상한 설명으로 가라앉히듯,
진리는 서서히 광채를 발해야 하리니,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이의 눈이 멀 것이다”
4. 결어
오늘 본문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첫째, 지금 바울은 그런 차원에서 율법적인 행동으로 일단 저들의 오해를 불식시킨 다음 화합을 도모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복음이 퇴색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방식은 결코 불신자들에게 하는 방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자신을 낮추어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의 요청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또 하나는 흔히 신앙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거룩한 목적을 수행한다는 명목으로 사소한 부분에 대해 경홀히 여기는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로마에 가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유대인 형제들의 불만과 요청을 거부했다면 바울의 로마행은 좌절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사소한 것까지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주일날 예배 시간에 늦었다고 교통신호를 무시하고 차를 몰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이것은 예배를 빠져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늦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된 행동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늦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늦었다면 그 원인을 살피고 회개해야 할 것은 회개하고 다음부터 늦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늦은 것만으로도 이미 죄를 진 것인데 거기에 교통신화까지 어기면 죄를 더하는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한 가지 죄라도 줄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습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고 복음대로 살지 못하면 한 생명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분명히 일상생활에서, 매일의 삶속에서, 매일 부딪치는 사람들과의 싸움에서 바르게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광의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0:31-33에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진리로 인해 사람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바울은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상을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섬기는 자는 대접받는 자가 아니라 대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사랑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이 있습니다. 일명 ‘황금률’로 알려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출처] 27주차. 생명을 얻기 위하여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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