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레시아 3.0> 그 서른여섯번째 이야기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였다. 그러기 위해 먼저 “너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παριστημι:헌신, 헌상)”고 권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자기 자신이 먼저 전적으로 드려져 있어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제물로 드려야 하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가 참으로 아버지와 아들로서 관계가 분명하고 내가 아버지의 아들로서 온전한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이 분명할 때 비로소 마땅히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헌상)하는 것이 옳다는 인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인식을 근거로 하여 자기 자신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런 확인도 없이 무조건 하나님께 자기를 바친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자기를 사용해 달라고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아무런 응답도 없고 살아갈 길도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여 헌신해야 할 이유가 확실하다면 그 다음 단계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는 바울의 권고를 따르게 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은 우리 삶의 가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 것에 대한 말이기도 하다. 우리 삶의 가치관이 아직도 세상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하게 결단해야 한다. 세상에 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방도를 따르는 것도 아니라면 더 이상 고려할 가치가 없다. 부자 청년과 같이 자기의 갈 길로 빨리 가버리는 것이 서로 속이 편하다.
그러나 전적으로 자기의 가치관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었다면 그 다음 단계로 그에게는 마음이 새롭게 되는 변화가 발생하게 된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변화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해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케 하시나니”(빌 2:13)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소원을 두시고 적극적으로 행하게 하는 에너지를 주심으로써 나타나는 변화이다.
어떤 이론이나 종교적인 감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행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도록 하는 성신님의 역동적인 사역이 그 안에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운동이 자연스럽게 그 안에서부터 발동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자 하는 열망이 생기고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살아가게 된다.
마태복음 12장 49-50절을 보면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는 그 제자의 조건에 대하여 첫째,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아니하고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신다. 물론 여기에서 사랑이라든지 미움이라는 개념은 절대적인 사랑이나 미움의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으로써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나 자녀를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누가 더 상대적인 사랑의 위치에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절대성을 두고 상대적으로 부모나 자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거기에 비해서 부모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모든 삶의 근거를 두고 그 사실을 근거로 하여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아가 부모나 자녀도 사랑해야 한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신다.
그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만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다른 사람이 대신 져주거나 아무나 지는 십자가가 아니다. 오직 자기만 져야 할 십자가라는 점에서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자기 십자가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고난이라고 단정을 한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고난과 핍박이 왜 오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자신이 서야 할 마땅한 위치와 자신이 해야 할 당연한 역할을 잘 알아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자신만이 가지는 고유한 위치와 역할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고 하신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자기 십자가’는 영원 전에 하나님과 약속하신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 새로운 삶의 질서로 교회를 건설하시게 하셨다. 따라서 제자들에게 있어서 ‘자기 십자가’는 그 교회를 세우는 일과 관련된다.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이것이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강조한 내용이다(엡 1:3-17). 아울러 바울은 교회들에게 자신에게서 받은 복음을 보전할 것을 수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후 교회들은 바울 사도로부터 받은 복음을 오염시키지 않고 잘 보존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들이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이다.
이런 것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소원하고 좇아가고자 하는 변화가 있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써 자기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하여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통해 이 땅에 건설하시고자 했던 그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모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사람이 곧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다.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의인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겸하여 받는다(막 10:30)고 말하며 그것이 그 사람의 십자가이다.<송영찬, CNB 706 교회와 신앙, 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7, pp.205-209>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HMLI/165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독특한 특성 중 하나로 하나님의 인격 곧 신격(神格)을 드러낸다는 점이다송영찬목사 (0) | 2015.07.23 |
---|---|
잃어버린...비유/송영찬목사 (0) | 2015.07.23 |
새롭게 시작하는 지역 교회가 가야 할 길 (0) | 2015.07.16 |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하는 우주 창조의 결정적 원인>송영찬목사 (0) | 2015.07.16 |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0) | 2015.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