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클레시아 3.0> 그 마흔세번째 이야기
하나님의 보장가운데 우리 인생의 길을 가며 평안을 얻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 세 가지 비유를 통해 다음의 사실을 알게 된다.
① ‘잃어버린 양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에게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다는 것과 ...
②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에서는 그 자녀가 본연의 위치에로 회복될 때에 비로소 자기의 가치뿐만 아니라 전체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과
③ ‘잃어버린 아들 비유’에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경영 가운데에 소속되어 있을 때, 즉 하나님의 경영을 우리가 마음껏 누리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복된 자리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러한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철저하게 우리의 삶을 경영해 나가시는 것이고 그리고 이러한 경영을 체험하는 것이 곧 구원의 경험이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단지 생존권의 안정이라든지 아니면 정신적인 평안을 누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듯한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나님의 의의 길로 인도 받고 있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것이 곧 구원의 체험이다.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경영을 무시해버리고 다른 것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경영하려고 애쓰는 여타의 모든 행위가 곧 불신앙에 속한다.
하나님께서 나 자신의 삶에 대해서 철저하고 완벽하게 경영해 놓으신 길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 나름대로 삶을 경영해 나가겠다는 생각부터가 불신앙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생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삶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또 우리 구원에 대해서 완벽하게 경륜을 세워놓으시고 경영해 나가신다. 그런데 그 가운데 들어 있지 못하고 뛰쳐나와 자기 나름대로 삶을 경영해 나가는 상태에서 ‘교회를 다니므로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우매하고 유치한 생각이다.
하나님을 바르게 안다면 결코 그러한 무례한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처지가 마치 길 잃은 양과 같이 위태한 위치이다. 이 길 잃은 양이 나중에 목자를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어 다행히 다시 양 떼로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그렇다고 은혜를 더 받았느냐 하면 그러한 처지가 은혜를 더 받은 것은 아니다. 그가 길을 잃음으로써 처했던 위태한 상황을 살펴보면 그러한 처지가 결코 온전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목자를 떠나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의 양의 심정이 얼마나 상심하고 마음이 아프고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가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 길을 잃고서도 기분이 좋아서 희희낙락 할 수는 없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그럴 수 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풀을 뜯어먹는 일이든지 아니면 무언가 자기의 흥미를 유발할 만한 일이 있어서 거기에 정신이 쏠려 목자도 잃어버리고 양 떼도 잃어버렸음에도 자기의 재미에 스스로 빠져있었다. 그러나 막상 자기의 처지가 있어야 할 그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는 그러한 즐거움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오히려 죽음과 같은 쓴맛을 가져다 준 독소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편 목자와 함께 있고 양 떼와 더불어 있을 때에는 비록 험산 준령을 넘어간다 해도 그러한 처참한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 비록 힘이 들고 쉬고 싶을지라도 죽음을 맛보는 듯한 고통은 아니다. 오히려 그 길이 자기의 생명을 유효하게 드러내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에서 보람 있는 길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 역시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경영이 하나님의 경영 안에 있어야 비로소 그 가치를 드러내고 의미가 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경영이 매끄럽지 못하고 각박하여서 자꾸 억지를 피우게 된다. 어렵고 힘이 들기 때문에 어떻게든지 해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려는 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경영 가운데 속해 있는가 아니면 그 경영과 상관이 없는가를 알아야 한다. 이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큰 경영 가운데 정상한 자리에 서 있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그러한 위치에 서 있지 아니하면 자기의 존재 가치뿐만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나머지 사람 전체에 대해서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위협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나 하나가 정상한 자리에 서 있을 때 다른 사람들도 정상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각성하고 내 자신의 삶에 대해서 철저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현실적으로 하나님의 큰 저주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자기가 길 잃어버린 양과 같은 위치에 있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처지에 있고, 탕자같은 상황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아픔 없이 사는 상태이다. 그런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그처럼 비참한 처지를 감지할 수 없고 그 길에서 회복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운 저주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런 아픔을 느끼더라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 보겠다 해서 벗어날 능력도 없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에 대해서 철저하게 신앙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경륜을 알아 가는 것이 우선이다.
인간 관계 하나 가지고 싸우고 다투고 울고 넘어지는 것보다도, 사회 속에서 인정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보다도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경영 가운데 속해 있는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 하나님의 경륜이 어떻게 역사를 이끌고 나가시는가를 아는 것이 우리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송영찬, CNB 706 교회와 신앙, 서울: 도서출판 깔뱅, 2007, pp.23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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