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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언약에 대한 바른 이해는 개혁신학의 근간이 된다.

이차식목사(김천)

by 김경호 진실 2015. 7. 22.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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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언약에 대한 바른 이해는 개혁신학의 근간이 된다.

김천 덕일교회 이차식목사

 

 

들어가는 말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회와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들은 칼빈선생의 성경 해석을 항상 가장 중히 여기며 바른 신학과 바른 교회, 그리고 경건한 삶의 기반으로 한다. 그 이유는 칼빈선생의 해석이야말로 다른 사람의 해석보다 훨씬 탁월하며 가장 성경적이라는 사실이 교회를 통하여 검증이 되고 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의 신조들은 일부 결점과 약점들을 제외하고는 칼빈선생의 가르침에서 기인하였다고 하여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언약에 관한 내용은 최근 한 세기 동안 이슈가 되어 온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개혁교회 신조내용의 근간이 되는 것을 누구나 아는 바이다.

 

선택에 대한 그릇된 해석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는 것처럼 언약에 대한 그릇된 해석은 여러 면에서 무서운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보수를 지향하는 목회자들 중 일부는 언약과 관련하여 칼빈선생의 언약에 대한 해석을 주목하지 않고 성경이 강조하는 내용을 임의로 해석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은 성경과 칼빈선생의 가르침에 대하여 크게 오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가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함으로서 성스러운 언약이 무의미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돌트신조의 내용에 위배된 것처럼 착각을 한다. 또한 선택으로부터 언약을 구별하면 구원에 대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게 된다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한국의 일부 목회자 중에는 신학을 하지 않은 캐나다의 모형제의 블로그에서 글을 인용하여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다. 기이한 현상이다. 그 블로그에는 선택에 대한 오해가 가져오는 불안감과 부작용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굳이 선택과 언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올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필자도 선택과 언약이 서로 관련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성경이 선택과 언약을 동일한 것으로 말하는가? 언약을 창세전 선택자와만 맺었는가? 이에 대하여 성경적 교훈은 무엇이며 칼빈선생은 어떻게 해석하는가이다. 또한 그렇게 알고 나아갈 경우에, 성경해석과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 창세전의 선택과 은혜언약을 구별하면, 혹자는 변형된 개혁주의가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갖기도 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어떤 목회자는 그 블로그의 내용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튜레틴도 작정을 설명하면서 믿음과 회개와 같은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는 말을 피하기 위해 묶어 놓다, 연결해 놓다 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풀 수 있는 문제를 굳이 선택과 언약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이런 현상에 대한 심각한 문제에 대한 답변은 절대 그렇지가 않다.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분들 중에는 성경에 대한 칼빈선생의 해석을 주의 깊게 살피어 보지 못함으로서 오히려 자신이 재세례파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그래서 필자는 언약과 관련된 칼빈선생의 주요 요점들을 부족하나마 여러 방식으로 이미 피력하였지만, 다시금 인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가 언약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기 위해서 계시된 말씀을 기반으로 칼빈선생의 해석에 좀 더 관심을 기우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유아세례의 근거가 무엇인가?

 

1) 일방적인 언약이 유아세례의 기반이 된다.

어린아이가 언약에 포함될 수 없다면 세례가 그들에게 행해져선 안 된다. 일방적 언약은 우리가 언약을 받아들였는가가 중요하지 않고 언약의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졌는가가 중요하다. 칼빈선생은 유아세례를 베푸는 근거를 설명할 때, 이들이 창세전 선택자이기 때문에 베푼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유아가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라든가, 훗날에 믿을 것이기 때문에 중생을 가정하여 유아세례를 베푼다고 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그렇게 교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아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기독교강요, 4.16.9).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자기 자녀들에게도 확대된다는 약속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 자녀들을 교회에 내어놓고 그 긍휼하심의 상징으로 인침을 받도록 하며 그리하여 주님의 언약의 자녀들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들 편에서도 더 큰 확신을 갖도록 할 의무가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녀들도 세례를 받음으로써 유익을 얻게 된다. 곧 교회의 몸에 접붙임을 받음으로써... 그들이 그를 아버지로 깨달을 수 있는 나이가 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엄숙한 입양의 상징을 통해서 그들을 그의 자녀로 받아주셨기 때문이다(4.16.9).

 

어린 아이들은 본성적으로 잃어버린 상태에 있으며, 이들도 아담의 후예로서 정죄아래 있다. 또한 영적 성격이 없을 수도 있으며 지적능력과 믿을 능력이 없으며 단단한 음식을 견딜 수 없다. 이들은 어떤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어린 유아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그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이는 단순히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인정하시고 양자됨의 증표를 드러내신 것이다. 이를테면 본성적 거룩이 아닌 언약적 거룩이 초자연적으로 임하게 하셔서 유아들을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이신 것이다. 세례는 세례 받는 사람의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나 혹은 있지 않은 어떤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가리키는 표이다.

 

성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는 자들은 그 이전에는 언약에 대하여 외인들이었으므로, 먼저 믿음과 회개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세례의 규정을 받을 수가 없으며, 반드시 믿음과 회개가 있어야만 언약의 회중에 참여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난 어린아이들은 날 때부터 직접 하나님에게로부터 언약을 상속받을 자들로 인정받기 때문에 세례를 받게 되는 것이다(고전7:14; 3:6; 기독교강요 4.16.24). 하나님께서 엄숙한 입양의 상징을 통해서 그들을 그의 자녀로 받아주셨으며, 직접 하나님께서 언약을 상속받을 자들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들의 유아들을 향한 하나님의 배려에 감사해야 한다. 또한 자기자녀를 언약의 상징으로 인침 받게 하는 일을 만홀히 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응하실 것이라는 경고를 큰 두려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17:14).

 

2) 재세례파는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적 축복이 전혀 약속된 바가 없다고 주장한다.

육체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때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접붙임을 받는 영적인 자손의 자리를 취한 경우도 있었다(4:28, 4:12). 우리도 아브라함과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지만,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라 칭함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만일 재세례파가 명백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적 축복이 전혀 약속된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4.16.12).

 

재세례파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믿지 않은 유아들에 대한 세례를 그들은 거부한다. 그렇다면 유아들도 언약의 회원인데, 유아들의 세례에 대한 근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단인 재세례파의 세르베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은 자는 모두 사망 안에 머물러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인데 어린 유아들은 믿을 능력이 없으니 정죄 가운데 있다” (4.16.31).

 

이와 같이 재세례파는 성인에게 적용해야 할 주님의 말씀을 모든 유아에게까지 동일하게 적용하려 한다.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재세례파는 믿는 자에게만 영적인 약속이 주어졌다고 오해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에 의해서 성별된 것이다. 이방인인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이 유효하며, 전도와 설교를 통하여,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별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신자는 세상 사람과 구별되지만, 언약회원이 되는 것은 우리를 그 분과 묶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거룩한 언약에 의해서 성별된 사실을 경시하며, 자칭 보수를 외치는 교회 가운데서 유아세례의 근거를 잘 모르는 목회자와 교회가 있지 않겠는가?

 

 

3) 유대인의 완악함과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그들을 여전히 거룩하다고 칭한다는 것이다(11:16).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을 향하여 언약의 자손이이라고 한다(3:25). 유대인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나 하나님의 언약은 페하여 지는 것이 아니다(3:3, 9:6).

 

그러므로 누군가 주님의 일방적인 약속을 인치는 세례를 멸시한다면 그것은 주의 언약을 침해하는 처사다. 그러나 세례 자체가 구원에 필수적인 조건은 아니다(4.16.26). 세례가 언약의 인으로서 필수적이지만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잃어버린 자로 취급되어선 안 된다. 세례를 받지 못하였다할지라도 그리스도 자신 소유하는 큰 믿음을 부여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4.16.26)

 

이상에서 살펴볼 때 세례는 일방적으로 주어진 언약약속과 규정 때문에 베푸는 것이지, 유아세례의 근거가 선택을 근거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부인한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육체적인 자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적 축복이 전혀 약속된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세례파는 변형된 개혁주의를 지나쳐서 이단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일방적인 언약에 대한 이해의 결여로 언약을 교회에서 거세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자를 향해서 칼빈선생은 스스로 속는 자’. ‘광신자’, ‘성스러운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자라고 하였다.

 

2. 이스마엘과 에서는 언약의 당사자인가?

 

은혜언약을 다룰 때, 일방적인 언약의 당사자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는 수많은 신구약 해석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세례의 기반이 되기에 매우 중요하다. 창세기 17:7절에서 성경은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자연적인 혈육이 언약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칼빈선생 역시 마찬가지다. 이스마엘은 처음에 그의 동생 이삭과 동등한 지위를 누렸다. 이스마엘 역시 이삭의 경우와 똑같이 할례의 증표로서 동등하게 영적인 언약이 확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제외되고, 그 후에 에서가 제외되며,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의 거의 전부가 제외되는 것이다. 이스마엘이나 에서와 같은 사람들이 자기들 자신의 결점과 죄책 때문에 양자로 입양된 상태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을 칼빈선생은 언급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조건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들은 불신앙으로 그 조건을 범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라고 묻고는 이어서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1:2-3, 9:13)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를테면 두 사람 다 거룩한 아버지에게서 난자들로서 언약의 계승자들이었다(17:19, 칼빈의 기독교강요 3.21.6).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맺으시고 어떤 백성을 자기에게로 부르실 때에, 그들 모두에게 차별이 없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 모두를 효력 있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일부에게 특별한 양식의 선택이 적용된다(9:13). 이를테면 이스마엘과 이삭이, 에서와 야곱이 동일한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삭과 야곱은 확고부동하여 유효하며, 이스마엘과 에서는 언약에서 제외 되었는가? 칼빈은 그 이유를 쉽게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언약을 맺으면서 즉시 그들 모두에게 중생의 영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마지막까지 언약가운데서 인내할 수 있도록 하지 않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3.21.7).

 

여기서 우리는 칼빈이 일반선택과 제한선택을 구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13:33의 칼빈 주해를 참조). 이와 같이 은혜언약과 창세전 선택은 언제나 구별되고 있다. 은혜언약(일반선택) 안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약속의 유효함 가운데 있는 자도 있으며(고전7:14), 전도와 설교를 듣고 언약회원이 되는 자도 있다(13:1-23). 이들 중에서 일부는 물론 창세전 피택자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 안에 있는 자 중에 일부가 거룩하게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은 잘 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약 회원 중에서 혹 배반하는 자들이 생겨나서 꺾여도, 하나님의 진리가 페하여 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남은 자들을 보존하셨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후회하심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11:29, 기독교 강요, 3.21.7).

 

3.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은혜를 박탈시킨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도록 명하신 것은 조금 모호하게 보이지 않는가?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17:19) 하나님은 언약이 단지 한사람에게 국한될 것이 아니고 그의 모든 종족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어 지속적인 계승으로 그 언약이 그의 후손들에게 내려가게 하셨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 자신의 은혜를 박탈시킨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도록 명하신 것은 조금 모호하게 보인다. 칼빈선생은 그의 주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비록 여호와께서 이삭으로부터 구원의 언약이 흘러나오도록 의도하고 계시지만 그렇다고 이스마엘을 전적으로 배제시키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전 가족을 양자로 삼으셨다. 이스마엘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신을 단절시키고 그의 동생의 사회로부터 자신을 끊어버리기까지는 (양자가) 유지되게 하신 것이다(17:19의 칼빈주해). 이는 이스마엘과 같이 자연적으로 양자된 자들이 결국에 가서 상속을 받게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17:7에 대한 칼빈주해).

 

우리는 바울 사도가 유대인의 교만과 거짓 자랑을 다루는 가운데 한 말을 기억한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9:6). 이는 혈통에 의해서 모두가 약속의 복을 받았으나, 선택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베풀어 진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도는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 언약 때문에 거룩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언약의 바깥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3.22.4). 그 이유는 첫째, 그들이 적자에서 서자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에서가 버림을 받게 된 요인은 하나님께서 유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에서의 전적인 책임이다(12:16). 둘째 요인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이 모든 사람위에 군림하고 있어서 그 분만이 양자 입양을 확인하기 때문이기도 하다(3.22.4).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17:20) 여호와께서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두 아들사이에서 더욱 더 분명하게 분별을 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한 아들에게는 부와 존엄성과 기타 현재 생활에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약속하시는 가운데서 그가 육신을 따라서 난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특별한 언약을 맺고 계시니 그것은 이 세상과 파란 많은 현재의 생활을 초월한 언약이다. 그렇게 하신 것은 이스마엘을 영생에 대한 소망에서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이삭의 종족에서만 찾을 수가 있으며, 그 종족에게만 구원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로 하여금 터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 이 지상생활에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든지 풍부하게 아낌없이 약속해주고 계시지만, 그에게 주신 모든 선물은 이삭에게 실현될 언약과 비교해보면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재물, 권세, 기타 덧없이 사라질 일시적인 선물들을 성령의 아들들에게는 전혀 약속되지 않으며 오직 영원한 복을 약속하신다.

4. 이스마엘과 에서도 동일한 약속을 받았으며 이들이 믿지 아니할지라도 언약이 그들에게 있었다.

 

바울이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진 것은 사실이나 아브라함의 기업이 그의 모든 후손에게 구별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은 그의 혈통에게 속한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제공되었다. 이삭과 야곱뿐만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에서의 경우도 동일하게 할례의 표증으로 보증되었다. 이들이 믿지 아니하였다할지라도 언약들이 그들에게 있었다(3:3). 바울이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9:6)” 라고 주장하는 바는 주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할지라도 극소수만이 그 언약을 믿는 신앙을 굳게 지켰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에스겔16장이나 사도행전3:25에서 유대인도 언약의 자손이여, 십자가에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조차도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불리는 것은 구원이 약속이 그들에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에 의해 언약 안으로 선택되었고 할례의 표증으로 확증되었다. 그들에게는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하지 아니하면 미치지 못한다(4:1,2). 그들 중에는 할례의 표증까지 받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배은망덕하게 양자됨을 거부하며 약속의 성취 면에서 차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이 많은 유대인들에게서 성취되지 아니한 것을 아무도 이상히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참된 선택에는 포함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일반적으로 선택(general election)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기뻐하시는 자들을 그의 은밀한 계획에 의하여 선택하지 못 할 이유는 없다. 이에 대한 성경은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9:7)"라고 한다. 이 말씀은 창세기 17:2021:12에서 인용한 말씀이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이스마엘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셨으나 약속된 축복이 임할 자가 따로 있으리라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대답해 주시고 있다. 특별한 특혜를 받은 일정수의 사람들이 은밀하게 선택되어 있으며, 이 사람들에게는 양자됨이 유효한 것이다(9:7주해).

 

선택과 양자되는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영원한 작정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참여 하신다. 성부는 그리스도에게 택자를 주시기로 선포하셨고 당신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택자 안에서 일하기로 법령으로 정하셨다. 언약은 삼위 하나님과 우리와 우리의 자녀가 그 대상자이다. 언약과 선택은 관련되어 있지만 동등하지 않다. 언약의 약속과 요구 둘 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마음에 부과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언약을 강조한다고 해서 아르미니우스주의로 문을 열어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선택이나 작정을 경시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이 문맥 속에서 어떻게 말하는 가에 따라서 때로는 선택을, 때로는 언약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정리하면 언약백성 모두에게 성도의 견인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언약백성 중에서 오직 창세전 택자에게는 견인에 실패하지 않는다. 이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기초하고 있기에 변경될 수 없다. 신앙의 견인은 선택자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찍히는바 되는 것은 택한 백성에게는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택한 백성에게도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11:22)"는 경고가 필요한 것은 육신의 교만이 꺾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5. 성경은 은혜언약과 창조 전 선택을 동일하게 취급하는가?

 

너와 네... 사이에 세워서(17:7) 언약당사자에 대한 이 구절을 칼빈이 해석하면서 선택과 언약이 동일하다는 것을 반대한다. 선택과 언약이 동일하다면 칼빈이 언약에 대하여 진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굳이 선택을 구별하여 언급할 이유가 없다. "선택이 여기서 지적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속고 있는 것이다." "믿는 자들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다. 언약의 당사자는 믿는 자만이 아니다.

 

로마서 11:22의 칼빈선생의 주해를 보라. 여기서도 명백하게 선택자와 언약을 구별하고 있다. 3중 접붙임을 설명할 때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과정을 3가지의 실례를 들어서 구체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다. 또한 2중 꺾임에 대하여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칼빈선생은 사도행전 13:33절의 주해에서 제한선택과 일반선택(은혜언약)을 구별한다. 일반선택자(은혜언약) 안에 제한선택(특별선택)이 포함된다. 은혜언약(일반선택) 가운데 있는 택자에게는 성도의 견인이 확고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을 그리스도 안에서 택자와 맺었다고 하거나 믿는 자와만 맺었다고 한다면 택자와 믿는 자가 은혜언약 안에 포함되므로 그 자체가 크게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충분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이스라엘과 같이 민족 집단으로 약속이 주어지며, 부모에게 주어진 약속을 따라 언약 안에서 거룩한 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는 세례를 일종의 언약의 표로서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삭이 에서와 야곱에게 할례를 베풀 때, 이들 중에서 누가 택자이며 누가 유기자인가를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가운데서 할례를 주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은 스스로 속는 것이다. 세례는 단순히 언약의 표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언약은 항구적으로 우리가 믿고 신뢰하여 준수해야 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언약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셨으며 일방적인 것이다.

 

6. 유아세례에 대한 언약과 선택에 대한 구분이 화란의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 신학인가?

 

1) 성경의 언약 이해가 결여되면 재세례파 세레베투스와 동일한 주장을 한다.

혹자는 이러한 유아세례에 대한 언약과 선택에 대한 구분이 화란의 특별한 상황에서 나온 신학이라고 하는 분도 있다. 그렇지 않다. 이러한 구분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에 없는 내용을 개혁교회가 인위적으로 창안하여 신봉해 왔다는 말인가? 가당치도 않는 말이다. 언약과 창세전의 선택을 동일시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는 것이 창세전 선택이라든가. 믿음뿐이라고 하면, 유아세례의 당위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유아는 일단 지적 능력이 없으며 믿을 능력도 없다. 그런데도 믿음 안에 있는 자가 당사자라는 말인가? 그것은 성인들에게 해당하는 말을 유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한 종교개혁당시 이단 재세례파 세레베투스의 주장이다.

 

만일에 누군가 신학의 가장 근간이 되고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인 언약이해에 있어서 성경의 교훈을 멸시하고, 칼빈선생의 해석도 못 믿겠노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보다 더 지혜롭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자이며 왜곡된 광신자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왜냐하면 참 믿음을 가진 자만이 언약의 당사자라고 하는 자는 성스러운 하나님의 언약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성경의 언약 이해가 결여되면 바울의 새로운 시각(NPP)이나 페더럴비전으로 오해한다.

성경의 언약에 대한 교훈을 놓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당연히 바울의 새로운 시각(NPP)이나 페더럴비전(FV)으로 오해할 것이다. 사실 페더럴비전의 어떤 강조점은 캐나다 개혁교회에서도 공감한다. 성례를 단지 언약의 표나 의식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성례가 성령께서 효력 있는 목표로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며, 언약의 삶이 추상적인 것에 그치지 않다는 것을 삶속에서 보여 준다는 면에서 어느 정도 친밀감과 동정심을 갖는 것이다. 또한 캐나다 개혁교회 안에서는 URCFRC에서처럼 열띤 논란이 있지도 않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페더럴비전에 대한 논쟁의 글들이 번역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몇 몇 목회자분들이 캐나다의 모 형제의 블로그의 글을 인용해서 언약을 이야기하면 마치 바울의 새관점이나 페더럴비전인 것처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가 되고 안타까운 일이다.

 

페더럴비전은 언약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대한 것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은 서로 긴밀하게 묶여 있으며 때로는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고 어쩌면 불필요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10:10, 고재수 박사). 그들은 칭의의 믿음을 신자의 신실함으로 대치하는 경향이 있다. 어린 아이들에 대한 성만찬을 허락하는 것이나, 신율주의 경향이 강하다. 또한 개혁교회의 신조의 표현을 따르기 보다는 약간 지나친 경향을 가진다. 이를테면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표현 대신에 순종하는 믿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신학적인 내용을 함유하기 때문에 교회가 지양해야 한다.

 

가능하면 우리는 언제나 성경에 있는 어휘와 검증된 신앙고백서의 명확한 용어만을 사용하고, 성경에서 교훈하는 언약을 실제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약을 바로 알면 우리 안에서 구원을 찾지 않고 우리 밖에서 곧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 안에서만 찾는 것이다. 그러한 성도는 값없이 주어지는 구속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반드시 열매가 맺어지게 되어 있다.

 

7. 선택과 작정을 반드시 이야기해야 복음이 설명되거나 이해되는 것인?

 

선택이나 참 믿음만이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조건이라고 한다면, 언약은 생활 속에서 실재가 아닌 추상적이며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언약을 유지하는 면에 있어서는 조건이 있으나, 언약의 당사자가 되는 것은 조건이 없다. 언약의 회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로만 되기 때문이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하나님은 은혜언약 가운데 당신을 우리와 묶으셔서 언약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신다. 단지 믿음이라는 조건은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약속이 주어 진 후에 동시에 혹은 뒤이어 오는 것이다. 선택과 언약을 동일시하거나 영원한 선택이 언약을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앞서게 하고 지배하도록 하면 은혜언약의 특징을 잃어버리게 되며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과 순종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언약을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상관이 없이 여호와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예측하는 약속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오히려 신앙을 요구하는 약속으로 보아야 한다(헨데렌의 언약과 선택, P.70). 약속이 처음부터 성취되었거나 실현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약속과 그 약속을 믿는 것의 생명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물론 성령께서 유효한 부르심으로 신앙을 불러일으키신다. 또한 약속이 택자에게만 세워졌으며 존재한다고 한다면 약속을 신앙에 의존하는 문제로 만드는 것이며 복음의 순서를 뒤집게 된다(불데린크).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의 책임에서 어떤 것도 면제해 주지 않는다. 언약은 언제나 약속과 함께 책임도 뒤따르게 된다.

 

벌코프는 선택보다 언약을 중요시 했다. 바르트에게는 선택이 먼저 온다. 벌코프는 선택이 마지막에 오는 것이었다.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과 선택, 곧 구속 경륜은 하나님의 처음 행위이지만 우리의 신앙을 감사하고 고백할 때는 나중 행위이다. 이를테면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착해서도 아니며, 선행을 많이 행해서도 아니며, 영원한 때 전부터 기뻐하신 뜻을 따라,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시고 섭리해 오신 오직 당신의 은총입니다라는 송영으로 선택이 언급된 것이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의 선택은 온 교회가 누려야 할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과 작정을 반드시 이야기해야 복음이 설명되거나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복음에 대하여 메시지를 전할 때, 선택과 작정을 항상 이야기 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경을 살펴보면 선택과 작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복음을 못 전하거나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니다.

 

8. 결국 언약의 수혜자가 창세전의 택자라면, 언약을 말하는 것은 무익한 일인가?

 

혹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지 모른다. 그 택자가 결국 수혜자라고 할 것 같으면 결국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는 일이 순전히 헛된 것이고 전혀 무익한 일이지 않은가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그러나 칼빈은 이런 식의 사고 자체가 언약을 모독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결국 택자만이 구원을 얻기 때문에 언약과 선택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성스러운 언약을 모독할 생각이 없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언약을 택자와 맺었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의 일이 믿는 자와만 언약을 지배하도록 한다면, 그는 언약을 모독하는 것이다. 칼빈은 언약과 선택에 대한 어떠한 견해를 취해야 하는지는 관련된 성경말씀들을 다 살펴서 어떠한 견해를 취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기까지는 어느 쪽으로든 편견을 갖지 말라고 한다(3.21.7). 칼빈선생의 이러한 표현을 보더라도 우리는 언약과 선택이 반드시 구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할 때마다, 선택과 작정과 같은 비밀한 경륜을 말하지 않으면 마치 엄밀한 개혁주의가 아닌 것처럼 착각하면 곤란하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맺으시고 어떤 백성을 자기에게로 부르실 때에 그들 모두에게 차별 없이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 모두를 효력 있게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중 일부에게 특별한 선택이 적용되게 하신다(9:13, 기독교강요, 3.12.7). 여기에서도 Calvin은 언약과 선택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언약백성 모두가 구원에 유효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육체를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자들을 이삭의 모범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영적 자녀들과 조심스럽게 구별하고 있다(4:28).

 

9. 갈라디아서는 언약의 당사자를 말씀하고 있는가?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지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니라”(3:29). 여기서 사도바울은 언약의 당사자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약 당사자는 믿음을 가진 자뿐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지 않다. 당연히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3:26). 칭의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되어 진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 구분이 되기 때문이다. 세례조차도 신앙이 없다면 아무런 효력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내적 열매가 없이 외적인 것만을 신뢰한다면 헛된 것이며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다만, 저들이 악해서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신실함과(3:3) 성례의 참된 의미를 깨뜨릴 수 없는 것이다. 성례는 악인이나 선인에게 다 같이 성령의 은혜를 약속하는 것이다. 다만 믿는 사람은 자기에게 제공된 약속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악인은 그것을 배척하고 동일하게 제공된 약속을 효력이 없게 만들 뿐이다(3:27).

 

갈라디아 교회에는 당시 유대인들 중에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특권을 자랑하는 오만한 자들이 있었다.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종족으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가장 우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같이, 모두 공통적임을 말하고 있다. 믿음은 약속과 관련하여 결부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29).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것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언약의 당사자가 믿음을 가진 자뿐이라는 말씀은 없다. 또한 택자를 위한 약속의 말씀이 따로 있다는 언급이 없다. '자손'이라는 말은 육을 따라난 아브라함의 자손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정해진 사람도 의미하는 것이다(3:16).

 

만약 유대인들이 이것을 부인한다면 자신들의 우매함을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의해서 의를 얻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선택과 언약을 구별하는 것은 마치 아르미니우스의 구원론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이가 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3:12)는 말씀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의 의미는 믿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가 여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믿는 사람들은 선한 행실을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율법은 선하고 거룩한 생활을 이룩하는 영원한 규칙이다.

 

여기서 바울이 다루는 문제는 그런 의미가 아니며,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그것을 공로로서 의를 얻는다고 오해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율법에 의하여 체결하신 언약은 조건부이기 때문에 요청되는 의를 완전히 성취할 사람이 없기에 모든 사람은 자기 안이 아닌, 자기 밖에서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 언약의 주요 가르침이다. 만약, 구원이 율법에 있으며, 율법이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면 율법은 약속과 반대되며, 바울은 율법에 의하여 의를 얻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힘이 율법에 없다고 한다(3:21).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갈라디아서는 모든 아담의 후예가 행위의 의를 빼앗겨 벌거숭이가 되었기에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향하여 숨어 피할 곳을 찾는 길밖에 구원의 길은 없다(3:21,22)는 사실을 가르칠 뿐이지 언약의 당사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옛 언약 아래 있던 이스라엘교회와 기독교교회를 비교하면서 어떤 면에서 유사하며 서로 상이한 점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다. 옛 언약 아래 있던 선조들도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상속의 희망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저들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영적인 복 가운데 동일한 양자되며 우리와 마찬가지로 약속되었다. 저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진정한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와 함께 유일한 중보자를 신뢰하고 있으며 저들도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며 동일한 성령으로 다스림을 받았다. 이러한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옛 선조들과 차이가 없다. 이 모든 언약의 중요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이러한 본질적인 측면에서 언약은 다양성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구원의 방식도 하나이다. 생명은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창조주의 고유한 권한이다.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자가 자신의 공로나 노력의 결과물로서 생명을 산출할 수 있다는 교훈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또한 올바른 석의 과정을 거쳐서 유사한 내용을 도출 할 수 있는 근거 구절도 없다.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구원 방식은 언제나 하나이지만, 단지 언약의 시기와 집행 방식에 있어서 다양성이 있을 뿐이다. 구약시대에서는 말씀을 통하여 혹은 의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대한 그림자가 더해질 뿐이며 점차 유아기적 교회로써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곧 은사를 받고 있었는데 몇 사람의 소수만이 그랬고 민족전체로서 교회는 갓난아이처럼(4:19)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젖으로 먹었었다(고전3:1). 물론 개인적으로 특정인물을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신앙이 얼마나 비범했으며 개인적으로 선지자들은 얼마나 지혜가 넘쳤는가. 우리는 감히 그들과 비교할 수 있으며 자랑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 비하면 우리가 갓 난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염두 해 두신다. 이는 구속사적 관점으로 보는 한 맞다. 이미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당신의 백성들을 그리고 계셨다. 그러나 창세기 17:7,9와 관련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자들과 동일시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 3장에 호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갈라디아서 3장의 결론에 비추어서 보면 가능하다고 할지 모르나, 창세기 17:7,9 당시의 용어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택자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칼빈이 일반선택과 제한선택으로 나눌 때, 창세기 17:7,9는 은혜언약과 관련되며 "이삭과 세우리라"는 말씀은 제한선택과 관련이 있다.

 

결 론

 

혹자는 유아세례문제와 관련하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입장이 다르고 화란 쪽의 입장이 다르다고 하는 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계시된 말씀에 따라 동일한 하나님과 동일한 구세주의 이름으로 한 믿음과 하나의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 서로 다른 입장이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기를 우리가 언약을 만드신 분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언약의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진 사람들은 구약에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이며, 신약시대에는 신자와 그의 자손들이다.

 

단지 그것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작정 가운데 중생의 영이 부어져서 택자가 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택자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택자라는 사실을 모르는데 무엇을 근거로 그가 택자라는 것을 전제로 세례를 줄 수 있단 말인가? 택자라는 사실을 모르면 택자라는 것을 가정해서 주면 되는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성경이 가정적 선택이나 가정적인 중생에 대해서 계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돌트신조에서 그가 택자인지 아닌지를 인간이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려고 해선 안 된다고 하지 않은가? 또한 성령님의 은혜로 택함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성군 다윗이나 베드로와 같은 경건한 사람도 택함에 대한 확신이 수시로 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전혀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확신이 곧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유아세례의 근거를 택함으로 말씀하지 않는다. 칼빈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제한 선택이 아닌 일반 선택자에게 주어진 약속을 따라서 유아세례를 베풀면 되는 것이다.

 

혹자는 모든 정경은 신조를 통하여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발상은 매우 위험천만한 사고이다. 신조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면 로마 카토릭의 신조관인 것이다. 재세례파는 성령께서 각 사람의 마음에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의 문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신조가 사람을 구속하는 것으로 속단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계시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신조가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로마카톨릭은 신조에 대하여 어떤 의구심도 갖지 말고 받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틀린 것이다. 성경만이 무오하기 때문이다. 신조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서 성경이 가지는 구속력만큼의 구속력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조를 통하여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교적인 발상이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신조는 이단을 분별하고 영적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나, 신조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장로교회의 신조에 오류가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신경 그자체가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며 불링턴 총회가 연구하여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장로교회의 신조에 약점과 결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조는 충분히 학습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안내서라고 보면 된다. 반면에 정경은 오직 신구약 66권만으로, 무오한 신적 권위가 있는 것이다. 정경이란 용어가 라틴어의 막대기 잣대라는 의미에서 온 것처럼 성경이 신조의 내용의 진위를 가리는 잣대가 된다. 그러므로 언약에 대한 논의는 신조나 어떤 신학적인 인위적 주제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항상 성경이 무엇을 교훈하는지를 주목하여 조심스럽게 살펴야 하며, 때로는 교회 치리회를 통하여 결점이 있는 내용들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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