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언약
Jason Van Vliet (캐나다 개혁신학교 교의학 교수)
이차식
목차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
1.1 하나님의 형상이란?
1.2 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가?
1.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1.4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죄로의 타락
2. 언약은 그분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
2.1 언약이란 무엇인가?
2.2 언약은 어떻게 작동이 되는가?
2.3 옛 언약과 새로운 언약
2.4 낙원에서 언약이 있었는가?
3. 선택 곧 양자를 위한 하나님의 작정
3.1 선택은 성경에 있다
3.2 올바른 접근으로 시작하기
3.3 약간의 세부사항에 초점을 두기
3.4 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가?
3.5 영원한 정죄
3.6 언약과 선택
1.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됨
만약 당신이 독수리처럼 할 수 있다면 10층 높이의 발코니에서부터 땅 위에 움직이는 개미를 발견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북극곰처럼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20Km나 더 떨어진 곳에서도 바다표범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큰 뒷부리 도요새처럼 체력을 가졌다면 알라스카에서 뉴질랜드까지 논스톱으로 (일주일 동안) 11,000Km를 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어떤 부분에서 비상한 능력을 가진 동물들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동물들의 다양한 재능들을 가진 모든 피조물들에 관해서 배울수록 인간에 관한 특이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당연히 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질의에 답을 할 때 사람들은 종종 인간의 지적 창조적 능력을 주로 언급할 것이다. 우리는 동물들의 시력이나 체력을 갖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 인간은 달 표면에 발을 내 딛는 법을 깨달았다. 게다가 인간 베토벤이 그 유명한 교향곡 9번을 작곡한 것처럼 어떤 동물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다른 이들은 가장 잘 재잘거리는 앵무새보다 훨씬 더 초월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언어를 가지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는 기준이 단지 정신적, 언어적 능력들이라면 정상적인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말과 사고가 우둔한 동료인간들에 대해서는 어찌 말할 것인가? 그들은 우리보다 못한 인간들인가? 위의 질의는 우리에게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이 특별한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창세기 첫 번째 장은 이 초미의 질의에 근본적인 답을 제시해 준다. 6번째 날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시려고 하실 때에 처음 두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창 1:26)라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 이 두 구절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3번씩이나 성령께서 강조한다. 그러한 강조는 명백한 의도가 있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사역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자아내게 한다. 아담과 이브가 창조될 때 훨씬 더 특별한 뭔가가 발생한 것이다. 왜냐하면 새, 고기, 가축, 그리고 곤충들과는 달리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창세기 1장의 계시와 진화이론 사이의 또 다른 차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진화이론은 동물들과 인류 사이에 근본적으로 발전된 유동체가 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류는 유인원이나 침팬지와 같은 동물들이 자신들의 조상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은 직립보행과 깊은 사색과 좀 더 나은 교통을 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구분 될 만한 핵심이나 근본적인 것이 없다고 한다. 그 차이는 정도의 문제이며 질적인 것보다 양적인 차이라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여호와께서는 근본적으로 비슷하지 않다는 사실을 계시하신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 동물 중에는 단 한 마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은 없다. 그러한 경계는 오늘날까지 남아있고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명백하고 필요한 질의를 하게 한다. 즉 이 하나님의 형상이 정확히 무엇이냐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단순한 영광인가? 아니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능력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위임한 어떤 일인가? 아니면 이런 3가지 가능성의 어떤 조합인가? 다음 문서에서 이러한 질의에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1.1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란?
세기가 지나면서 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했다. 이 글의 서언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지성과 의지의 특별한 능력과 관계된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는 설명 중의 하나이다. 인간의 지적능력은 매우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발견하고 디자인한 것들을 살펴보면 효율적인 차량, 트럭들, 계속적으로 빠른 컴퓨터들, 정확한 GPS 장치들, 예술의 눈부신 작품들과 음악 작곡들, 효과적인 의약들과 수술기법 등, 기술할 목록은 수도 없이 많다. 분명한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정신적 감각이 다른 피조물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사람은 직장을 선택하고 취미를 택하고 어떤 품목을 택한다. 이러한 목록들은 셀 수조차 없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행하는 반면 인간은 그들의 선택할 것들을 평가해서 잘 아는 것을 택한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자들이 인간 지성과 선택을 하나님의 형상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지적해 온 것은 이해할만 하다.
이와 관련이 있으면서 다소 다른 견해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기 위해서 인간의 능력과 하나님의 형상과 관계된다는 사고이다. 만약 인간이 말을 못하거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며 교통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어떤 제한된 형태의 관계를 존속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그 관계가 잘되려면 하나님과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 필요하다(창세기 1장을 보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고(요 4:24) 사람은 영혼을 가진 영적존재이기에 특별한 접촉점이 있다.
그 다음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한 것이 3위 하나님이라고 강조한 다른 신학자들이 있다. 6장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 26절의 주목할 만한 면을 본다. 말씀하시는 한분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내 형상대로 만들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 대신에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한다. 3위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기에 어떤 이는 인간 안에도 하나 안에 3측면의 어떤 종류가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교부 어거스틴은 인간 영혼은 스스로를 기억하고 스스로를 이해하며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3측면의 능력을 가진 한 인간은 3위 일체의 반영 혹은 참된 3위 하나님의 모양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많은 신학자들 특히 로마교회에서는 형상과 모양을 구분을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형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지성과 선택을 언급한다고 한다. 반면에 모양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준 별도의 선물에 해당하며 그것은 원초적 의와 거룩이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로마교회 신학자들은 그 형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모양이란 인류가 죄 없이 창조되었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면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위와 같이 신학자들은 최소한 4가지의 다른 선택사항을 제시하므로 확고하게 이 질의에 답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서 이 문제에 관하여 하나님이 계시하신 바를 주의 깊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첫째 일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인간의 창조는 창세기 1장 26-27절뿐만 아니라 창세기 5장 1-3절에도 나타난다. 이 두 문맥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된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1-3).
위 두 문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형상 곧 자기 모양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고 이는 그의 형상 가운데 남자 여자를 공히 포함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반면에 창세기 1장 26-27절의 독특한 면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창조물을 다스리도록 명령하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장에서 좀 더 세밀하게 이 부분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5장1-3절 또한 특이한 것이 있는데 이는 셋, 아담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연결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아담과 셋 사이의 관계가 모양과 형상이라는 용어로 묘사한다(창 5:3).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 사이의 관계에서 그러했듯이 확실히 동일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묘사한다(창 5:1; 1:26). 이러므로 우리는 성부-아들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연결 지어야 한다. 이러한 연결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밝혀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흥미로운 방식으로 끝난다(눅 3:23-28). 족보가 한 세대에서 이전 세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녹에 이르러서 에녹은 셋의 아들이며 셋은 아담의 아들이다. 거기서 우리는 그 계보가 멈추기를 기대한다. 아담은 첫 인간이다. 그는 땅의 흙으로 지어졌다(창 2:7). 그는 조상이 없으며 부모가 없다. 누가복음3장의 계보는 한 단계 더 나아간다. 38절에서 “셋은 아담의 아들이요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창세기 5장의 계보와 누가복음 3장의 계보는 하나님의 형상을 정의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나머지 모든 피조물과는 다르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 자신의 자녀로서 창조되었다.
일단 이렇게 하나님 형상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인정되었다. 그래서 “모양”이라는 용어가 왜 또한 사용되었는지가 명백해진다. 세상에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우리는 부전자전 혹은 아버지 닮은 딸이라는 표현을 쓴다. 자녀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심지어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명백하게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육체를 지녔기에 둘 사이에 육체적인 닮음은 없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는 유사점들이 매우 많았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그들 또한 그랬다. 하나님의 거룩, 공의,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든 하나님의 속성과 모양이 아담과 이브 안에 반영되었다. 확실컨대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고 아담과 이브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들은 어떤 면에서 그들의 아버지의 많은 속성들을 반영했다. 이는 다른 피조물에서 볼 수 없는 것들이다. 태초에는 참으로 부전자전이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주의 날 3은 이것을 요약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하게 그분의 형상대로 곧 참된 의와 거룩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정의는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존엄성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도록 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정신적 능력이 제한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말을 못한다. 다른 이들은 기본적인 수학 방정식을 푸는 것을 배울 수 없다. 그들은 혼자 컴퓨터를 하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붉은 것이나 청색 셔츠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럴지라도 이러한 특별한 형제자매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이는 좀 더 예민한 초점으로 나아가게 한다. 만일 하나님의 형상이 생각이나 선택하는 능력과 원초적으로 일치한다면 그러한 능력들이 제한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덜 가진 것이 되고 만다. 반면에 만일 하나님의 형상이 애초에 아버지와 아들로서 정의된다면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상의 부모들이 “이는 우리 자녀들이라”고 하는 것처럼, 로즈 장학생(옥스포드 대학교 장학생))이든 정신적 장애가 있든지 상관없이 하늘 아버지께서 모두를 당신의 자녀들이라고 주장하신다.
1.2 하나님의 형상: 왜?
다섯 번째 계명은 여호와께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부모를 존경할 것을 가르친다. 이는 또한 여호와와 우리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그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그래서 그의 자녀로 창조되었기에 우리 삶의 주된 목적은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성경의 다양한 문맥들이 이를 확인해 준다. 잠언 1장 7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 경우에 “경외함”은 존경을 의미한다. 달리표현하면 어떤 사람들이 모든 종류의 지성과 이해력을 가지는 것을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여호와께 영예와 존경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참된 지식의 출발선 상에 아직 있지 않은 것이다(잠 9:10; 욥 28:28).
이 주제는 전도서에서 훨씬 뚜렷하다. 전도서의 끝부분에서 전도자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고 명료한 진술을 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 이니라”(전 12:13). 달리 표현하면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위해 큰 계획들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성취할 수도 있다. 부요함과 명성과 사후에 유산을 크게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삶 속에서 만일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지 못하거나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때 모든 수고는 공허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자들을 위한 삶의 완전한 핵심과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아버지 하나님께 영예를 돌려드리는 것이 삶의 최고의 목적이다.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렇다.
이 최고의 목적은 자신들의 삶에 있어서 의미와 방향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또한 도움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확실한 일이나 직업이 없으면 자신들의 삶의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부에서 의미를 찾는다. 어떤 이들은 많은 친구가 없으면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의 교리는 우리에게 다른 뭔가를 교훈해 준다. 물론 성취감을 주는 일자리, 고정적 수입, 충실한 친구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만약 어떤 사람이 직장도 돈도 친구도 없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존경하고 그의 계명들을 매사에 순종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면 그의 삶은 명확한 목표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러한 삶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다. 전도자가 말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 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 이니라”(전 12:13).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게 이 주된 목적 외에 두 번째 것이 또 있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26절에서 이것을 밝히셨다.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들과” 즉 인간이 하나님을 존경할 수 있는 주요 핵심 가운데 하나는 그의 피조물을 잘 돌보는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창조위임은 일부 우려를 자아냈다. 이것이 동물학대나 창조의 일부분에 대한 오용의 문을 열어 두지는 않는 것인지, 방치나 영양결핍, 냉혹한 처사나 오염들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죄로 인해 타락한 후에 권력 있는 사람들이 권세에 의해 종종 타락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역사는 온유함으로 시민들을 대하지 않은 통치자의 사례가 많다는 것을 교훈한다. 마찬가지로 역사는 인류가 다른 피조물들을 적절히 돌보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주신 위임은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멋대로 할 수 있는 면허증이 아니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창세기 1장 26절은 중요한 두 교리를 나란히 계시한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에 대한 교훈이 있다(창 1:26a). 그리고 나서 즉시 창조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 있다(창 1:26b).
이 두 교리는 동일하지는 않지만 분리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과 이브는 그분의 자녀였으며, 또한 그분의 완전한 자녀이었다.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시며 주들 중의 주이신 창조주이시다(딤전 6:15). 그러므로 그의 자녀들은 왕자와 공주들이요, 동시에 이 자녀들은 그들의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로운 관리를 반영하여야 할 의무를 지는 것이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 부전자전이 되어야 한다. 지난 장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선과 지혜로운 목적들을 이루기 위해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신다. 창세기 1장 26절의 위임명령에 순종함으로 인간은 동일한 것을 이루어야 한다. 창조물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자원이나 동물의 남용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그의 모든 백성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지으신 그 세계를 잘 돌보아야 할 중한 의무가 있다.
1.3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
창세기 1장 2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공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면에서 그들은 동등하다. 아담과 이브는 창조물을 돌보아야 할 책임이 부여되었다.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그들로 바다의 고기를 다스리도록 하라” 비록 이 형상은 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형상을 회복하시므로 그 회복은 남자, 여자 모두에게 적용이 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26-28절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너희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으로 세례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옷을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가릴 것 없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니라.”
비록 창세기 1장 26-27절의 가르침은 아주 간단하지만 교회 역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여성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는지에 대해서 질의를 해왔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1장 7절에 근거해서 질의를 한 것이다. 바울 사도가 예배 중에 적절한 예의에 관해서 기술할 때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 이니라”고 하였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오직 남자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참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읽고 또한 성경의 다른 관련된 구절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여성들도 분명하게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전서 11장은 책임자에 대해서 말씀한다. 예를 들면 3절에서 사도는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여기서 마지막 문구는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 곧 아들의 머리는 그분의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성자께서도 성부께 복종하며 그의 뜻을 행하신다(요 14:31). 동시에 성부와 성자는 영광과 위엄에 있어서 동등하다. 이런 면에서 성자와 성부는 한 분이시다(요 10:3).
비슷한 일이 남녀 관계 사이에서도 적용된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복구되었다. 이점에서 그들은 동등하지만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와 전에 아담을 창조하신 것은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신적질서는 확실한 실제적 결과들을 가진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2장에서 이러한 결과들 중에 하나를 기술하면서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3). 이 이유 때문에 여자는 교회에서 권위를 갖는 중직으로 섬기지 못한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은 묘사하기를 고린도 교회에서 어떤 여자들은 남자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고 특히 머리 스타일면에서 그랬다(고전 11:14-15). 우리 사회 안에서도 남자처럼 보이길 원하는 여자가 있고 여자처럼 보이길 원하는 남자가 있다. 이런 중성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특히 공적 예배에서는 설 자리가 없어야 한다. 남녀 사이의 육체적 외모와 그 밖의 것들의 특징을 지우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성적 특징을 확인하고 축하해야 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드셨다. 육체뿐만 아니라 이슈들과 관계증진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서도 그렇다. 두 가지 성이 있을 때 인생은 더욱 더 풍요롭다. 교회가 그들 사이의 차이점을 지우려고 시도한다면 교회 스스로를 단지 가난하게 할 뿐이다.
1.4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죄로의 타락
다음 장에서 우리는 죄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보다 폭 넓게 다룰 것이다. 반면에 여기서는 우리의 처음 조상이 성부 하나님께 반역하여 동산에서 추방당한 후의 하나님의 형상을 간단히 다루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타락 후에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식으로든지 계속 유지 되었는가? 아니면 원죄에 의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날아가 버렸는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 질의에 대한 간략한 답은 죄로 심각하게 타락하였을 지라도 타락 후에도 여전히 그 형상은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빙 구절은 창세기 9장에서 발견된다. 대 홍수 후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9장에 묘사되었다.
성령께서 명확하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나 관영하여 하나님은 대 홍수를 보내셨다(창 6:5,6). 그 홍수 후에, 슬프게도 죄악은 여전히 계속되었으며 노아의 마음과(창 8:21) 그의 행실에서 드러났다(창 9:21). 동시에 홍수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은 죄악 되었으며 하나님은 인간 속에 있는 그의 형상을 언급하신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만일 하나님의 형상이 죄의 타락으로 인하여 완전히 뿌리까지 뽑혔다면 이 신적 경고는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공허한 위협이 된다.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인하여 철저하게 영향을 받은 것은 또한 분명하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창조를 받은 자들이 무례한 반역자들처럼 행동을 하게 되었다. 의로움과 거룩함 가운데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반영하도록 창조된 자들이 이제 거짓과 욕심과 시기 가운데 갑자기 살인을 하여 오히려 사단에 가까운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창 4:1-16). 하늘 아버지를 존경하기보다는 폭력과 모든 형태의 악한 경향으로 변질된 것이다(창 6:5, 11-12). 명백히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모든 영역에서 전적으로 부패하였다.
그러나 파괴된 중에서 남은 부분이 있었다. 오늘날도 다른 영역 안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의 창조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당시에 그들이 비이성적인 동물들처럼 행동을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여전히 인간으로서 취급을 하셨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그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자들이기에 서로 존중하고 보호할 계획이셨다. 게다가 죄로 파괴된 그 형상을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또한 복구하셨다. 이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장 24절과 골로새서 3장 10절에서 말씀하신 바이다.
2. 언약: 그분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
새 왕의 대관식은 언제나 축하와 상징으로 가득 찬 날이다. 예를 들면 1953년 6월 2일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서 그녀는 왕관 뿐 아니라 보주와 또 다른 홀과 4번째 오른손가락에 끼워진 대관식 반지를 지녔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특별한 반지는 잉글랜드의 웨딩반지라 불렸다. 그것은 사파이어와 루비로 된 아름답고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이 반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리고 왜 잉글랜드의 웨딩반지라 불리는가? 부분적인 답은 언약인데 이 장에서 다루려는 핵심단어이다. 우리가 아는 바, 여왕은 그녀의 나라와 시민들에게 공적관계와 엄숙한 책임을 지고 있다. 반면에 성경에 따르면 이런 관계를 언약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요아스 왕과 제사장 여호야다 시대에 충성스런 관료들과 그의 백성들은 한 언약 안에서 함께 묶여졌다(왕하 11:17). 이와 같이 남편과 아내가 결혼을 할 때 그들이 사는 동안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둘이 한 언약으로 연합되었다. 이는 말라기 선지자가 아내를 “당신의 결혼언약”의 짝으로서 언급하는 이유이다(말 2:4). 그래서 두 사람의 혼인의 결합, 왕과 그들의 민족 간의 관계를 언약으로 묘사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관식 반지를 영국의 웨딩반지라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작할 때부터 이것은 언약에 관해 중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선 언약관계는 종교적으로 엄숙한 일이다. 결혼은 가벼운 합의가 아니듯이 그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도 그렇다. 그것은 특수하고 진지하고 법적 구속력이 있으며 장기적이고 평생 동안 유지된다. 그것은 또한 정말로 기분 좋은 복된 관계이다. 그리고 두 번째 중요한 것이 있다. 확실컨대 결혼생활에서 두 사람 그리고 왕족과 그들의 백성들 사이의 관계에서 어려운 순간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언약을 부요함과 기쁨과 깊고 중요한 관계로 함양하며 보
호할 것을 특별히 계획하셨다.
마지막으로 각 언약은 어떤 규정들과 의식들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성경의 언약들은 개인적 관계들을 필히 수반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사실 그러한 관계들이야말로 언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예를 들면 공적으로 결혼하려 할 때 사람들은 혼인증명서에 사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혼은 신랑신부가 사랑하고 함께 사는 것이 전부이지 종이쪽지에 사인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거창한 의식과 함께 하는 대관식은 그 경우를 감안하면 적절한 행사이다. 그러나 장기간 통치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상호 신실함과 존경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 마음에 이것을 기억하면 우리와 하나님의 구체적 언약에 좀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은 실제적인 협약이 아니라 오히려 보배롭고 가장 특이한 형태의 결혼관계이다(겔 16:8).
2.1 언약 : 그것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언약이란 단어를 처음 발견한 것은 창세기 9장 9절이다. 이 처음에 나타난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면 도움이 된다. 요약하면 주께서 홍수로 심판하셔서 당시의 사악한 사회를 청결하게 하신다(창 6-7장).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와 함께 방주로 들여보내진 동물들을 제외하고 모든 생명체와 인간과 동물들이 죽었다(창 7:23). 반면에 몇 달 후에 강한 바람을 일으키셔서 천천히 홍수를 감하셨다(창 8:1-5). 방주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침내 밖으로 나와서 마른 육지에 발을 내딛고 여호와께 희생제사로 감사를 드렸다(창 8:20). 주님은 또한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임한 지시를 내리셔서 처음 주께서 홍수를 일으킨 죄악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하셨다. 그들은 많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야 했으며 서로의 삶에 존경을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살인 의도들을 멀리해야 했다(창 9:1, 7).
말할 필요도 없이 노아와 그의 부인, 그의 세 아들들과 자부들은 탁 트이고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했기에 적지 않은 긴장을 했음이 틀림없다. 실수하면 어쩌지? 옛 죄악 된 삶으로 타락하면 어쩌지? 이번에 다른 홍수 같은 것이 임하면 어쩌지? 이러한 걱정들이 그들의 뇌리가운데 소용돌이 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생명체들과 언약을 맺으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 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창 9:8-12).
여기에 주목할 만한 사항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은 자신을 주권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내 자신이 설립한다.” 사실 하나님의 주권은 너무 강하시므로 내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약은 두 당사자 사이에 만들어진다(이 경우 하나님과 노아의 가족). 원래 두 당사자가 있기에 우리의 언약이라고 불리어져야 마땅하지만 여기서 주님은 언약의 소유권을 주장하셔서 “나의 언약”이라고 부르신다.
둘째, 하나님의 언약은 즉시 노아의 자손들을 포함한다. 여기에 자손들이라는 용어는 그의 아들들만 - 셈, 함, 야벳 - 언급하지 않고 그의 가족에서 앞으로 태어날 손자, 손녀도 언급한다. 달리 표현하면 이 언약은 세대를 거듭해서 지속되어지는 관계를 설립한 것이다.
셋째, 이 언약은 홍수로 땅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사실을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보증해 주시는 특별한 약속을 포함한다. 이는 노아와 그의 자녀들이 필히 들어야 하는 순간으로서, 여호와께서 그 은혜와 자비 가운데 그의 가족에게 제공하시겠다는 약속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었다. 이제 그들은 중한 걱정 대신에 용기를 가지고 이전의 홍수 지역으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마음에 발생하는 이 약속에 대한 의심이 생기면 언약의 넷째 요소가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 즉 이 언약에 부여된 보이는 표적인 무지개이다. 물론 때때로 아직도 심한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역적 홍수라 할지라도 그들이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또 다른 홍수를 보내지 않을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께서 언약을 맺으실 때 그분은 약속을 배반치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이 약속한 바대로 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언약을 “영원한” 것으로 묘사한다(창 9:16). 하나님의 언약에 있어서 확실한 보증이란 것은 단순히 평생 보증이 아니라 영원한 보증이다. 그래서 요컨대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는 다섯 가지 주요한 측면이 있다.
1) 하나님의 주권
2) 후손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는 관계성
3) 특이하고 은혜로운 약속
4) 참된 약속을 입증하는 보이는 표적
5) 영원한 보장
후에 창세기 15-17장에서 특히 주님은 또 다른 언약을 맺으시되 이번에는 아브람과 함께 맺으신다. 아브람은 그와 아내 사라에게 아이가 없으므로 염려가 되었다(창 15:3-4). 이 문맥에서 주님은 확약과 함께 임하셔서 그와 언약을 맺는다. 현저하게도 위에서 언급한 다섯 요소들이 되살아난다.
첫째, 아브람은 언약을 요구한 적이 없다. 그는 언약이란 용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를 동경했지만 언약을 동경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와 언약을 맺는 것은 전적인 주님의 주권이었다(창 15:18). 조금 후에 창세기 19장에서 아브람에게 언약을 확정하실 때 아브람을 이제 아브라함이라 개명하시고 언약이 자신에게 속해있다는 것을 지적하시고 그 언약을 “나의 언약”이라 부르신다(창 17:2, 4, 7, 9).
둘째, 아브라함과 사라가 비록 자신들의 자녀를 아직까지 갖지도 않은 상태지만 주님은 세대들을 통하여 언약을 계속해서 적용하신다. 여호와께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셋째, 이 언약은 두 개의 주요한 약속들을 함유한다. 때가 되면 아브라함은 많은 후손들을 갖게 될 것이며(창 15:5; 17:6) 주께서 그들 자신의 소유로서 아브라함의 가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넷째, 이 표적(할례)은 언약과 관련된 것이다(창 17:10-14).
다섯째, 이 언약은 영원한 것으로 묘사된다(창 17:7, 13).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지만 노아언약과 아브라함언약의 구조상 유사점들은 현저하다. 주님은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역사 가운데 한결같은 일관성을 기대할 수 있다.
성경에 주님은 어떤 사람과 가족(삼하 7장 - 다윗과 그의 아들들) 혹은 전 국가(출 24장 - 이스라엘)와 함께 언약을 맺거나 확약하는 경우들이 있다. 위의 두 예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기본적 정의를 설립하는 충분한 계시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언약은 묶는 것이며 그가 주요하고 은혜로운 약속들을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영원한 관계를 세우시며 그러한 약속들을 확약하기 위한 보이는 표적을 주신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언약을 설립하시며 보호하시는 은혜로운 배려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종종 은혜언약이라고 불려진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장 가까운 비교는 결혼언약이며(말 2:14) 결혼반지와 같은 가시적 표적이 동반된 남편과 아내사이의 평생의 관계이다.
2.2 언약 : 어떻게 작동이 되는가?
언약은 한편 당사자에 의해 설립되었다할지라도(즉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명백히 하나님과 그의 백성인 두 당사자들이 있다. 언약에서 각 당사자는 그들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이는 창세기 17장에서 특별히 명백하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4절) 라고 하시고 그리고 그가 즉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 대해(5-6절)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땅에 대해(8절) 약속을 하신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이라고 하시며 그에게 계속 할례를 시행하도록 엄숙한 의무를 주시고 대대로 반드시 행할 것을 말씀한다(10-14절)
이런 유사한 형태가 신명기 28장에서 발견된다. 이 장에서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과 언약을 갱신한다(신 1:1-8). 여호와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많은 복을 약속하시는데 자녀들, 곡식들, 가축들, 방위와 훨씬 많은 것들을 약속하신다. 반면에 여호와의 약속들과 함께 여호와만을 순종하고 섬길 의무 또한 함께 주어진다(신 28:1, 13-14). 게다가 만일 그들이 주님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때는 불순종하는 백성들을 가장 무서운 저주로 멸하실 것을 경고한다(신 28:15-68).
이것이 언약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와 같이 두 당사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당사자에 부합하는 두 역할들이 있다. 한편으로 여호와는 당신의 은혜로운 약속들을 제정하셨다. 그를 알므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그분을 항상 신뢰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역할은 여호와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근엄한 의무를 우리에게 제시하셨다. 우리가 언약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분의 복을 입기 보다는 저주 아래 내버려진다.
반면에 이것은 우리를 언약의 위기 가운데로 처하게 한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은 죄악된 성향을 지녔고 지성과 마음이 부패하다. 그래서 유전된 죄악의 실제와 불순종 때문에 저주를 당연히 받아야 한다. 요약하면 시급한 질의는 이렇다. 이를테면 어떻게 그러한 죄악된 백성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언약관계 속에서 살 수 있느냐 이다. 확실컨대 이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머리위에 많은 저주가 쌓여감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감사하게도 이 초미의 질의에 대한 답이 있다. 그 답은 하나님의 언약을 두 당사자와 두 역할 뿐만 아니라 한 중재자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언약의 중재자는 모세였다. 여호와와 그의 백성이 시내 산에 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심각한 죄를 범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만들었으며(출 32:1-4) 여호와의 명백한 계명을 불순종했다(출 20:4, 22-23). 여호와께서 크게 진노하사 온 백성을 진멸하시고 모세와 새롭게 출발하시려고 하셨다(출 32:9-10). 이것을 들은 모세는 너무 화가 나서 십계명 돌 판을 산산조각 낸다. 십계명은 언약의 말씀들로 알려진 것이다(출 34:28). 거의 그 언약이 소멸 직전의 위험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모세가 나아가서 여호와 앞에 나타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언약에 호소한다(출 32:13). 이 중재는 효과적이었다. 여호와께서는 수그러드셨고 그 백성은 살아났으며 언약은 여전히 서 있게 되었다.
모세로 시작된 것(중재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이시다(히 9:15; 12:24).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성부와 죄악된 그의 백성 사이에 서신다. 십자가에 흘린 피를 기반으로 그 피는 새 언약의 피다(눅 22:20).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위해 중재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그의 구속사역의 그 언약은 단지 계속되어질 뿐만 아니라 풍성한 복으로 채워진 관계이다(엡 1:3-14). 결국 여호와께는 백성이 영적으로 잘되는 관계가 되도록 언약을 고안했다. 우리는 속아서는 안 된다. 즉 그리스도 없는 언약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저주를 초래한다. 우리가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사실은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중보자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롬 7:25).
2.3 옛 언약과 새로운 언약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다(창 17:7).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는 새 언약의 도래를 예고한다(렘 31:31). 이 언약을 “새로운”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는 처음 것을 낡아지는 것(쓸모없는 것)으로 만드셨다. 즉 쓸모없는 것과 쇠하는 것은 곧 사라질 것이다(히 8:13). 그러면 어떻게 언약이 영원할 수 있으며 동시에 쓸모없이 되는가?
그 질의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중하게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 변천을 하도록 여호와를 촉구케 하였는가? 예레미야 31장에서 여호와께서 선언하신바와 같이 새 언약은 필수적이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나의 언약을 파기하였기 때문이라”(32절). 달리 표현하면 문제가 언약자체에 있지 않다. 그 언약은 좋은 협정이었다. 사실 그것은 아주 은혜로운 관계였다. 문제는 여호와께서 언약을 맺으신 그 백성에게 있다. 가장 착한 어린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 참으시며 동정과 사랑을 베푸시나 그 백성은 거듭 거듭 반역하여 우상으로 빠져들었다. 실제로 하나님의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은 심각하게 음란하였으며 그들의 하늘의 남편과 맺은 혼인 언약을 반복해서 파기했다.
게다가 구약에서 죄를 위한 제사는 실제로 죄를 제거하기에 효과적이지 못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들을 없이 하지 못했다”(히 10:4). 그러므로 모든 동물 제사들은 단지 죄를 해마다 생각하게 하는 것이 되어버렸을 뿐이다(히 10:3). 요약하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완고한 죄악과 영적으로 음란한 백성은 하나의 죄 조차도 참으로 제거할 수 없는 희생제사라는 기반위에서 거룩한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로 묶여서 살았던 것이다.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맞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적절한 시기에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변천하신 이유이다. 옛 언약은 수정해야 할 문제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죄악된 백성에게는 단지 그림자요 일시적 용서보다는 보다 확고하고 영원한 용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골 2:17; 히 10:1, 16-18).
옛것에서 새것으로 옮긴다는 것은 그림자에서 실체로, 약속에서 성취로의 변천을 또한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관계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합의로의 변천이 아니다. 옛 언약에서의 기본 골격은 새 언약에서도 계속된다. 옛것과 새것은 동일한 은혜에 속한다. 단지 “좀 더 좋은 언약”이 되었다(히 7:22; 8:6). 언약의 다섯 가지 특징을 이미 언급했는데 새 언약에서 다시 복구되었다. 새 언약은 하나님에 의해 설립되었으며(렘 31:31, “내가 새 언약을 만들 것이다”) 세대를 거듭해서 계속되며(행 2:39 - 그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한 것이다) 훨씬 더 은혜로운 약속들로 채워지며(히 8:6 - 좋은 약속들 위에 세워졌다) 보이는 표적으로 확증되었으며(골 2:11-12 - 할례가 세례로 대체된다) 그리고 영원히 보장되었다(히 6:13-20 - 하나님께는 거짓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면에서 창세기 17장 7절의 영원한 언약이 예레미야 31장 31절의 새 언약이기도 하다. 새 언약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며 실질적으로 더 나을 뿐이다. 새것은 옛 것을 충만하게 하기 때문에 옛 언약의 영원성은 단지 새것에 병합되고 확정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세대주의자들은 옛 언약과 새 언약 간의 좀 더 근본적 다름을 가르치는 자들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몇 부류의 세대주의자들이 있지만 가장 많은 사람이 속한 부류는 옛 언약은 세대를 거듭해서 계속되는 반면에 새 언약은 오직 택자와만 맺어졌다고 가르친다. 이를 테면 믿는 부모와 그들의 자녀들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입증된다. 창세기 17장 7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내가 나와 너와 너의 대대 후손사이에 나의 언약을 세울 것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용어들은 사도행전 2장 39절과 거의 동일하다. 거기서 하나님은 용서와 성령의 약속들을 하시면서 “너와 너의 자녀들”이라고 한다. 그 유사성은 너무 커서 단지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없고 특별히 동일한 성령 하나님이 두 문구에 영감을 하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린도전서 7장 14절에서 바울 사도는 분명하게 진술하기를 믿는 부모의 자녀들은 거룩하여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속한다고 말한다. 거기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이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나는 그들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성취하러 왔노라”(마 5:17). 이 모든 문구들을 종합해 보면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은 모두 세대를 거듭해서 계속된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2.4 낙원에서 언약이 있었는가?
호세아서에 흥미로운 구절이 있다. “아담처럼 그들이 언약을 파기했다. 그들은 거기서 내게 신실하지 못했다”(호 6:8). 이 구절은 마치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 가운데 있었던 것처럼(출 24:8), 아담이 그랬으며 두 당사자들이 그들 각기 언약들을 파기했다는 사실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우리가 창세기 1-3장의 아담과 이브에게로 관심을 돌리면 언약에 관한 어떤 것도 읽을 수 없다. 확실히 창세기 1-3장에서는 언약이란 용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들은 다른 장들 안에서 언약에 대한 자료들을 찾으려 한다.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금하는 것에 대한 명령을 언약의 의무로 확인하려한다(창 2:17). 그들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언약의 약속으로서 넌지시 들먹인다(창 2:17). 어떤 이는 두 특별한 나무들은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나무 언약의 표적들이었다고 제시하기까지 한다(창 2:9). 낙원에서의 언약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있는데 행위언약이라 불리고(7. 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생명의 언약으로 언급된다(문답 12). 역사 안에서 다른 이름들이 이 언약에 더해졌는데 창조언약, 자비의 언약, 사랑의 언약과 같은 것이다.
이 토론은 서로가 오류가 있다고 비난할 것 없이 약간의 경미한 의견의 차이라 할 수 있는 전형적 예이다. “행위언약”이란 용어는 잘 알려진바 일지라도 오해될 소지가 있다. 동산에서 아담이 공로를 세워야만 하였으며 혹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내야만 하였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타락 전일지라도 아담이 받았던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은 낙원의 안이든지 밖이든지 어디서라도 우리에게 빚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시에 행위언약이나 은혜언약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죄로의 타락과 함께 변화된 근본적 어떤 사실을 강조하는데 도움을 준다. 아담과 이브가 금기된 나무로부터 먹은 후에는 평상시처럼 언약 안에서 정말로 행하지 않았다. 이 장에서 일찍이 설명한바 처럼 죄악된 백성과 거룩한 하나님이 언약관계 안에서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중보자를 곧 백성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믿지 않으면 안 될 예수 그리스도를 제공하시기만 하면 된다(행 4:12). 그래서 은혜언약이라고 부른다. 죄가 세상에 들어 온 후에 낙원에서 자비의 언약과 은혜언약 사이를 구분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타락 전 후의 상황의 다름에 강조점을 둔 동일한 이유에서였다. 어떤 특별한 용어나 다른 용어가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이러한 용어들을 가지고 사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이해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언약에 대한 다양한 용어들의 찬반토론을 하지 말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우리가 아는 바를 상기하되 명백하고 확신을 가지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의 관계는 인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을 때 창세기 1장 26-27절에서 명백하게 설립되었다.
앞에서 우리는 창세기 1장 26-27절을 창세기 5장 1-3절과 함께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성부 아버지 - 자녀들의 관계로 말씀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제 성부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의 관계는 정말로 언약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부 - 자녀들의 관계는 일시적이거나 잠깐 동안의 협의가 아니다.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이다. 한 번 자녀는 항상 자녀이다. 언약과 하나님의 형상은 모두 이에 대하여 확실히 지속되는 영구성이 있다. 둘째, 성부와 자녀들이 묶여진 속에서 성부는 약속들을 하시며 자녀들은 그분에게 영예를 위한 의무를 지닌다. 셋째, 언약이 세대를 통해 계속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도 그와 같다(창 5:1-3).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언약처럼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언약은 할례(창 7:11)와 피를 뿌림(출 24:6-8)의 특별한 의식과 같은 표적이 있지만 하나님의 형상에는 비교할 만한 상징이 없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잘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으로 하나님과 아담과 이브사이에 성부 - 자녀들의 관계를 설립했다. 모든 아버지와 자녀들의 관계들처럼 이 끈은 영구적이었고 아직 죄가 없었기 때문에 완전한 행복으로 가득 찬 끈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었기 때문에 아담과 이브는 자기들의 성부의 계명들에 순종할 의무를 가졌다. 거듭 말하지만 아직 죄가 없었기에 이 의무는 그들에게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기쁨이었다. 이 의무를 채우는 것은 공로를 이루거나 뭔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성부께 정말로 영예를 돌려드리는 것이고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의 목적이다.
안타깝게도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성부 아버지께 불순종했다. 그 형상은 부패되었다. 이를테면 그 관계는 깨졌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이 파기한 것을 복원하기 위해서 주도권을 취하셨다. 하나님은 이 복원사역을 시작하기 위해서 영원한 은혜언약의 끈을 사용하셨다.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분과의 긴밀한 교제 속으로 인도받았다. 언약을 통하여 사죄와 영생의 복들이 그들에게 전해졌다. 언약을 통하여 죄악된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입양되는 복을 받았다(롬 9:4). 그리고 언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권세로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파기한 것을 하나님께서 복원하신다. 기적적으로 완고한 죄인들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녀 곧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라 불림을 받게 되었다(롬 8:16-17).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사이의 혼인언약 안에서(엡 5:32)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났으며(요 3:5)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상속자들이 되었고 상속자들은 어느 정한 날에 상속자로서 새로운 창조를 받을 것인데 절대로 틀림없이 우리 자신의 공로는 아니다(계 21:5, 7).
3. 선택: 양자를 위한 하나님의 작정
로라는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지만 윌슨이라는 그리스도인 가족 옆집에서 살았다. 윌슨씨 부부는 동갑내기 소녀가 있었는데 로라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제인이었다. 로라와 제인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인형에게 옷을 입히고 요새를 구축하는 전쟁놀이를 하였다. 로라가 제인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그녀에게 낯 설은 일이 있었는데 즉 윌슨가족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함께 하나님께 찬송을 한 것이다. 그 일이 로라에게 친숙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게 되었고 특히 그녀가 노래를 배우면서부터 혼자서 찬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소녀들은 함께 성장하면서 로라는 제인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갖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분은 무엇과 같은가? 예수님은 누구신가? 왜 저의 죄가 용서 받기를 종종 기도하는가? 제인은 답을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으며, 친구의 질문이 너무 어려울 때는 제인의 어머니가 도와 주셨다. 로라는 하계 성경 학교 때마다 제인의 교회에 왔다. 그녀는 오는 일을 즐겼고 그녀의 마음속에 더 많은 질의들이 생겼다. 어느 일요일에는 제인의 가족들과 함께 교회에 가곤 하였다. 그녀는 목사님이 설교한 것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주요 강조점을 이해할 수가 있었으며 그것이 그녀에게 힘이 되었다. 적어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그녀를 포함해서 죄인들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가 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녀의 사이에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라의 부모들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관한 관심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격려하지도 않았다. 로라의 아버지는 “종교란 각 개인의 선택사항이며 사람들은 자기의 종교를 가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로라 너에게도 마찬가지야”라고 하셨다. 몇 해가 지나서 16살이 되었을 때, 로라는 정말로 결심을 하였다. 제인이 다니는 교회에 등록을 하겠노라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의 약속대로 로라의 아버지는 “오케이라고 대답을 하시고 종교에 대해서는 네가 결정할 만큼 나이가 되었다. 윌슨 가족은 좋은 가족이다. 그러나 너의 엄마와 나에게 너를 따라가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셨다. 내심 로라는 그의 아버지가 말하는 소위 ‘종교’에 관심이 없는 것을 표방한 부모님 때문에 마음이 슬펐지만 제인의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뻤다.
제인의 교회에 가입한다는 것은 제인의 목사님으로부터 좀 더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관심 있는 커플들만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씩 로라도 목사님과 함께 앉아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온갖 것들에 대해서 배웠다. 어느 저녁시간에는 전에 전혀 들어 보지 못한 것들을 소개 받았다. 그것은 선택 혹은 때때로 예정이라고도 불려졌다. 그것은 쉬운 수업은 아니었지만 큰 그림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목사님은 이르시기를 창세전에 그리고 인간이 지음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기 원하시는 자들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소유된 자녀로서 입양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이미 선택하셨다고 하셨다.
늘 로라에게 궁금한 것은 선택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그녀는 목사님에게 묻기를 “만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나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그런 식으로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왜 믿기지 않을까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한 것은 나입니다. 나는 그 사실을 잘 기억합니다. 나는 어떻게 기도하며 어떤 용어를 사용할 것이지 확실하게는 모를 지라도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는 어쨌든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계속되는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어느 날 그것을 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나는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고 제인은 내가 개혁신앙의 새로운 반에 가입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결정하기를 원하였을 동안에도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다고 말씀합니까?” 훌륭한 질문이다. 그리고 로라는 또한 다른 질문이 있었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시기도 전에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셨다면 우리를 거의 로버트로 만든 것이 아닌가요? 구원과 정죄를 위한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설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하도록 설계하신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가 로버트처럼 변화하는 것을 원하셨습니까?” 그것 또한 훌륭한 질문이다.
특히 로라 개인의 영적 여행을 고려하면 그녀가 생각한 질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선택에 대한 교리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예정에 관한 가르침이 불가피하게 게으르고 부주의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게 될 것이라고 염려할지도 모른다. 결국 선택된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이 보증되었다면 죄악된 욕망을 따라 오늘날 살면 왜 안 되는가? 선택이 유혹을 저항하고 거룩을 추구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다른 흔한 질문은 아마 좀 더 강력한 것인데, 선택교리의 난점은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다. 만약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영원한 구원으로 이미 택하셨고 반면에 다른 이들은 영원한 정죄를 받도록 법령이 정하여졌다면, 그 시점에 배역한 자는 소위 비택자이기에 어떤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한다. 최소한 이러한 생각들은 사람들이 갖는 인상이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결정을 하기도 전에, 사람이 복음을 들을 기회를 갖기도 전에, 사람이 정말로 첫 숨을 쉬기도 전에 , 배역한 자의 운명이 하나님의 법령에 의해서 이미 정하여 졌다는 것이다. 어찌됐든지 그것은 공평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장에서 알고자 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이 교리에 관하여 말씀하신 바에 우리가 좀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러한 질의들, 염려들, 그리고 반대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3.1 선택은 성경에 있다
사람들이 선택의 교리에 관한 질의를 가지는 것에 대하여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의문들이 성경에 기초한 이 가르침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시작해야 하는 곳은 성경이다. 다음의 잘 알려진 세 구절은 선택을 믿는 것이 성격적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 첫째는 로마서 8장 29-30절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최종 영광으로 미리 예정하신 자들을 사전에 혹은 시간이전에 아셨다. 그 분은 그러한 영광으로 이끌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또한 계획하셨는데, 예를 들어 그들을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는 것이다.
둘째 구절은 에베소서 1장 4-5절이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이 창세전에 일어났음을 가르친다. 그것은 또한 선택의 근거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며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교훈한다.
이 동일한 진리는 셋째 문장인 디모데후서 1장 9-10절에서 더 분명해진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거룩한 삶을 위해서 부르셨는데 우리가 행한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의 목적과 은혜 때문이다. 이 은혜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특히 마지막 문구의 요지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구원계획이 나중에 생긴 것이 아니며, 죄로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견고한 신적 법령이었으며 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위의 문장들을 고려해 보건데 위 세 문구들은 영원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 스스로 멸망가운데 빠진 죄인들 중 얼마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권적 선택을 하셨으며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복을 주셨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러한 계시된 진리는 하나님의 완전성과 그 분의 이름에도 어울린다. 그 분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며 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만사에 분명하고 포괄적인 계획을 가지고 운영하신다는 사실을 기대할 수 있으며 그것을 우리는 흔히 섭리라고 부른다. 반면에 우리는 또한 그 분이 구원을 위한 중심 사역을 위해서 분명한 계획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특별히 기대한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선택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에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구원 계획을 가지셨다는 사실을 듣고 놀라지 않으며 그래서 최후 영광의 결실을 위한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일관성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그 분은 당신이 정한 법령을 행하신다. 그래서 선택이 성경에 계시되었다면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성호와 완전성에 어울리며 우리가 선택을 믿음으로 확신하는 근거이다. 여전히 우리는 이 교리와 관련하여 생겨나는 질의들과 이의에 대하여 세심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3.2 올바른 접근으로 시작하기: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
이 부분의 부제는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취한 것이다. 거기서 사도는 편지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것을 주의할지니 각 성도는 듣기는 속히 하고 화내기를 더디 하라“고 한다. 우선 이 본문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 관하여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교훈한다. 동시에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과 특정 방식으로 신학을 하는 것에도 적용된다. 때로 우리는 선택과 같은 어떤 교훈에 관하여 듣고 온갖 질의와 의제에 관한 소리에 빠르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먼저 경청을 하는가? 선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며,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계시되었는지,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가? 사실대로 말하면 우리는 종종 말하기는 속히 하고 듣기는 더디 하는 죄악의 존재이며 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조항의 목적은 먼저 주께로 관심을 돌려서 경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의 시작에서 살펴보면 여호와께서 선택교리에 대한 어떠한 말씀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분의 창조사역에 대한 많은 상세한 것들이 기술되었지만 예정과 관련된 것은 단 한 말씀도 없다. 논리적으로나 순서상이나 창세기 1장은 여호와께서 예정에 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시기처럼 보인다. 결국 하나님은 이 법령을 “창세전에”(엡 1:4) 만드셨다. 그러므로 이론상으로 여호와께서는 창세기 1장 1절 이전에 몇 구절들이나 심지어 한 장이 있을 수 있으며 거기에는 그 분의 영원한 법령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간략히 설명하고 선택과 영벌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창세기에 0장은 없다. 하나님의 계시의 출발점은 틀림없이 창조이지 선택이 아니다. 창세기 1-2장에서 창조에 관한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는 죄로의 타락에 관해서 가르치시고 창세기 3-5장에서는 죄의 즉각적인 결과를 말씀한다. 이러한 장들에서 조차도 선택에 관한 내용은 없다. 이러한 동일한 형태는 창세기 6-17장까지도 계속된다. 우리는 홍수와 노아와 그의 가족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과 또한 아브라함에 대해서 그리고 그와 그의 대대 후손사이에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창 15, 17장) 알게 된다. 사실 선택안의 하나님의 수단에 대한 암시를 듣는 것은 창세기 18장 19절에서야 나타난다. 거기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창세기 18장 19절은 정확히 선택에 관한 암시를 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중요한 세부사항들이 실제로 계시된 것은 신명기에 비로소 나타난다. 신명기 7장 7, 8절에서 우리는 모세에게서 다음의 말을 듣는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다른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한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이러한 구절들은 그의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선택의 근거가 그들 자신이 얼마나 수효가 많은가 혹은 그들이 얼마나 선한가라는 그 백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선택하심은 그 분 자신의 신실한 사랑에 있다. 반면에 이 계시 또한 이집트에서 종 된 그들의 현세적 고통에서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제한되었다. 엄밀히 말해서 여호와는 영원한 구원을 향한 우리의 선택에 관해서 아직은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 분은 그의 언약 백성이 되도록 어떤 그룹의 백성을 선택하는 것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최종구원까지 하나님의 영원한 법령으로의 계시는 신약에 이르기까지 강하게 표면화되지는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심판의 마지막 날에 해를 입지 않게 될 하나님의 선택을 말씀한다(막 13:20, 27). 사도 바울이 이 교리를 가장 정교하게 다루는 사람이며 그가 로마서 8-11장과 에베소서 1장과 같은 주요 단락들을 쓴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여호와는 이 교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 교리에 대한 계시를 고의적으로 지연하신다. 우리는 창조, 죄로의 타락, 구속 사역의 시작, 그리고 바로 그 후에 선택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듣게 된다. 가장 지혜로우신 교사인 우리의 하나님 주님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아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배워야하는 순서에 대해서도 아신다. 신적 계시에 있어서 명확한 발전이 있다. 발생 순서대로 말하면 선택은 창조나 죄로의 타락보다 앞선다. 그러나 교육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창조부터 시작하여야 하고 그리고 타락, 그런 후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일부로서 선택을 포함해야한다. 또한 여호와께서 선택을 가르치기 이전에 그 분의 언약에 관하여(창 6, 15, 17장)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이 우리의 언약 이해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언약의 맥락 안에서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만일 당신이 이 특별한 주제에 좀 더 관심이 있다면 이 장의 마지막에 더 상세하게 기술 된 선택과 언약을 살펴보라).
벨직 신앙고백서는 이 순서를 따르는데 주의한다. 창조와 섭리 교리는 12-14항에서 고백한다. 우리의 죄로 타락에 대한 진리는 14-15항에서 다룬다. 그리고 나서 16-17항에서 타락된 사람의 구원과 관련하여 선택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마찬가지로 돌트신조 또한 죄로의 타락을 고백 한 후에 선택에 관하여 말할 뿐이다. 돌트신조의 각 다섯 장들에서 우리의 죄악의 어떤 면들과 함께 시작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돌트신조 1.1; 2.1; 3/4.1-5; 5.1-2, 4-5). 이 고백적이고 현명한 접근법을 따름으로서 이 책(벤플릿의 책)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창조와 섭리의 교리들(7-9장), 죄(10장), 그리고 언약(11장), 이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기술한 장보다 우선한다.
왜 이러한 순서가 중요한가? 요약하면,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사상과 신학의 출발점을 선택으로 취한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도입부에서 언급한 몇 가지의 문제점들과 반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생각을 가지고 즉시 시작한다면 그것은 공평하지도 않으며 왜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사람은 안 되는가? 라는 항의를 멀지 않아서 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순서를 따라야 한다. 우선 우리는 창조의 교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만물을 얼마나 지혜롭고 완벽하게 지으셨는지를 경외감으로 대하여야 한다. 다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죄가 얼마나 모욕적이었는지를 인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사람을 하나도 빠짐없이 영원한 형벌의 고통으로 정죄에 처할지라도 공평한 지에 대하여 고백해야한다(돌트신조 1.1). 만일 하나님께서 영원한 구원으로 한 사람만을 선택하셔도 그분이 전에 하셔야 할 의무보다는 훨씬 더 이룬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한 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을 선택하셨고(마 8:11), 우리는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찬송할 많은 것을 소유하였으며 그 분이 불공평하다고 하는 것을 항변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교의를 배우는 순서는 참으로 변화를 만들며 그것은 적어도 불안한 영혼을 진정국면에 들게 한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는 것의 다른 부분은 사도 바울이 예정과 양자됨을 연결시키는 방식에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는 에베소서 1장 4-5절에서 찾게 된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종종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생각할 때, 거대하고 결백한 많은 무리로서 그 앞에 서 있는 대중적인 인류를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으로 예견하셨다고 상상한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하기를 전능하신 이가 여기서 한 명 저기서 한 명을 임의로 뽑으셔서 몇 사람을 천국의 길로 보내고 다른 이들은 지옥의 길로 연결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생각은 에베소서 1장에서 계시된 그림이 아니다. 죄 없는 무리 대신에, 우리는 고아들로서 생각을 해야 한다. 고아들만이 친절하고 상냥하고 가련한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본성적으로 그들은 증오감과 비통함과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부도덕한 생활 방식을 살기에 급급하다(엡 2:1-3; 주의 날 2 문답 5). 그들은 영적 고아이다. 그들의 부모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배역하여 하나님의 권속에서 도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로운 경이로움이 있다. 이미 영원 안에서 하늘 아버지께서 이렇게 배역하고 도망치는 죄인들 중 얼마를 양자 삼기로 작정하시고 그분의 소유된 자녀로 만드셨다. 유념할 것은 선택은 양자 삼는 하나님의 결심이지 위탁아이로서 몇 죄인들을 취한 것이 아니다. 위탁아들은 깨끗한 침대, 따뜻한 음식들, 사랑 어린 돌봄을 받지만, 양자된 아이들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으며 영원한 상속을 받는다. 명백하게 성부의 선택이 양자의 용어로서 이해되어질 때, 그것은 신적 따뜻함과 사랑과 관대함으로 충만해진다. 양자됨은 위탁아이들과는 크게 다르며 잘못된 가혹한 그림이나, 엄하게 한 방향이나 다른 쪽으로 이끄는 차디찬 통치자와도 다르다.
3.3 약간의 세부사항에 초점을 두기
의심의 여지없이 선택교리는 도전적인 가르침이다. 돌트신조 1장은 한 문단으로 전체 교리를 요약하여 제공해 줌으로 도움을 준다. 그것은 긴 문장이며 다음과 같다.
“선택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작정이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각자의 과오와 원래의 완전한 상태에서 죄로 타락한 전 인류로부터 그 분의 뜻 가운데 주권적인 선하신 기쁨에 따라 단지 은혜로만 특별히 정해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데,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선하거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동일한 비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7항).
이 요약을 상세하게 살펴보면 우선 선택은 불변하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일찍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것은 여호와의 이름과 완전성과 관련이 있다. 여호와는 즉흥적이고 무계획적으로 행하시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시다. 반대로 그 분은 신중하고 지혜롭게 계획을 하시고 그리고 나서 주권적이며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 계획을 집행하신다. 시편 33장 11절에서는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라고 찬양한다.
둘째, 선택은 창세전에 발생하였다. 이 사실은 에베소서 1장 4절과 베드로전서 1장 20절에 나타나는데, 우리 마음속에 어떤 질의를 형성하는 잠재력을 지닌다. “왜 하나님은 아직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선택하셨는가?” 우리는 이 질의에 온전히 대답할 수 없다. 결국 여호와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사 55:9). 한편으로 이 진리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명백하게 계시한다. 하나님은 시간을 지으셨고 그것을 다스린다. 우리는 시간 안에 거하고 그것에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그 분께 현명한 것이 우리에게는 당황스러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진리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틀림없이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의 협력적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일 뿐이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거기에 없었다. 우리의 부모와 조상들도 없었다. 처음 조상인 아담과 이브조차도 거기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나 우리의 조상들 중에서 누구라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경미한 기여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명백한 것은 존재하지 않은 자들은 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선택은 인류에게 있지 않으며 특히 주목할 것은 돌트신조는 인류에 대하여 기술하기를 “자신의 과오로 인하여 원래의 완전한 상태에서 죄와 파멸로 타락한 전 인류로부터”라고 한다. 여기서 당신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시하시는 그 순서를 어떻게 이 고백서가 조심스럽게 따르는지를 다시금 보게 된다. 로마서 8장 28-30절은 예정과 관련한 전형적인 문구이다. 이러한 구절들은 죄로 타락한 결과로 있었던 고통, 탄식, 연약함에 관한 모든 문맥을 직접적으로 따른다(롬 8:18-27). 그래서 성경을 요약한 돌트신조에서 타락한 인류로부터 하나님의 선택처럼 선택을 묘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연대순으로 말할 때는 선택은 창세전에 발생하였을지라도 성경적으로 말할 때는 선택은 타락 후에 계시된다.
넷째, 돌트신조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뜻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기쁨에 따라 오직 은혜로 선택하신 것을 명시한다. 이러한 강조가 중요한 이유는 사람이 선택한 것은 종종 선택된 대상속의 무엇인가에 의해서 매료되기 때문이다. 차를 살 때 어떤 이는 왜 도요타 대신에 혼다를 선택하는가? 구매자의 눈에 모양새나 스타일이나 혼다의 가격에 있어서 뭔가에 매료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택에 있어서 사실인 것이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도 사실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전적으로 그 분 자신 안에 있으며 전혀 인간의 선택에 있지 않다. 돌트신조는 첨언하는 문맥 끝부분에서 “선택된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거나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동일한 비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이것이 사실임을 증거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생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은혜대로 하심이라” 그리고 “이 은혜는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다섯째, 그의 선택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졌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의 선택은 제멋대로 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중심이다. 그러한 것은 큰 차이를 만든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그의 성육신,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이 세계 역사의 중심축이다. 확신컨대 이러한 중심축은 우연에 의해서 설치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확고한 목적과 미리 아심으로 된 것이다(행 2:23). 확실히 이 축은 헛되이 설치된 것이 아니며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을 하고자 함이다(마 1:21). 그래서 성자는 구주가 되도록 미리 정해졌기 때문에 성부는 또한 구원 받을 자기 백성을 미리 정하셨다. 결국 그가 구원할 백성이 없다면 구주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영원으로부터 성부는 그의 아들에게 택한 자들을 주셨으며 적당한 때에, 성자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요 17:2, 6-7).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사람들의 일정수를 선택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선택은 모호하거나 일반적이거나 대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한 백성을 구원할 것을 단순히 작정하지 않았으며 정반대로 그 백성 안에 있는 특별한 사람들을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한 접근법이 하나님의 완전성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전지성은 큰 그림이나 특별히 상세하게 모두를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만일 하나님께서 한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는데, 그가 구원하기를 원하는 특별한 사람들을 모른다면, 그때는 그 분이 모든 것을 모르게 될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실 뿐더러(히 4:13), 당신이 구원하시려고 선택한 백성의 정확한 수를 아신다. 이러한 선택에 대한 추가 사항들은 이 교의와 관련하여 생길 수 있는 질의들에 대하여 우리가 답을 하도록 도와준다. 선택은 그의 사랑하시고 영원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그 자신을 포기해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성부 하나님의 은혜로운 작정인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은 공평을 잃어버리셨다고 아직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러한 은혜로운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의 빚을 졌는데 누가 영적으로 게으름 가운데 계속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를(수 24:15) 섬기기로 결심한 어떤 날이 있다면 우리가 존재하여 우선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명백하지 않은가?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유일한 원인은 우리 속에 소원을 두고 역사하시는 그분이 사전에 작정하신 것이다(빌 2:13).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1장 4-5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죄악의 반역자를 양자로 만드신 것이다. 요약하건데 우리가 선택에 대한 교리를 알면 알수록 이에 대한 분명한 반대는 더욱 사그라진다.
3.4 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가?
제이콥 아르미니우스는 1559년부터 1609년까지 살았던 화란의 신학자였다.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을 임의로 전횡하고 다른 사람들을 엄하게 정죄하는 차고 변덕스러운 독재자처럼 거의 들리도록 만드는 그런 식의 선택 교리를 펼쳤던 몇 신학자들에 대하여 염려하였다. 그래서 예정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설명하는 다른 방식을 제안하였다. 그는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시간 속을 미리 내다 보시고 언젠가 지구가 창조되어 생존할 사람들 곧 그를 믿을 사람들을 창세전에 주목하셨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 예지를 사용하여 창세전에, 그를 믿을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였다. 이러한 가르침을 흔히 예지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선택(예지예정)이라고 한다(돌트신조 1.9).
이 가르침에서 주요 실수는 하나님의 선택의 기반과 근거를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서보다 인간 본성 안에서 하나님의 택함에 두는 것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5절),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7절), “그의 선하신 기쁘심을 따라”(9절), “모든 것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11절)라고 강조한다. 핵심은 명백하다. 즉 하나님의 선택의 근거는 그 분 안에서 찾아지며 우리 안에 있지 않다. 성경에 모순된 것 외에도 알미니안들의 선택 관점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약화시킨다(돌트신조 1.12-13). 물론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 모두는 정신적으로 변덕스럽다. 우리는 마음이 변화하고 방향을 잃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이 조금이라도 우리 자신에 의해 좌우된다면 우리는 절대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기뻐하심과 은혜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 분만을 믿음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우리가 아직 정말로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확신할 수 있다(히 11:1).
3.5 영원한 정죄
영원한 정죄는 하나님의 영원한 법령의 다른 측면이다. 복음서에서처럼 성경은 영벌보다는 선택에 관하여 훨씬 더 언급한다. 반면에 주님은 어떤 이들에게 긍휼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을 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는 완악하게 작정하셨다는 것도 우리에게 정말로 말씀한다. 바울 사도께서 쓴바와 같이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완악하게 하고자 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롬 9:18). 사도는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어떻게 완악하게 하시는지 바로를 실례로 드는 것을 주목할 만하다(롬 9:17). 출애굽기에서 우리는 수차례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자신들을 완악하게 하였다는 것을 듣는다(출 8:1, 32; 9:34). 거기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을 배운다(출 7:3; 9:12; 10:20; 14:8).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신비 앞에 서게 되며,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행위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허용된 자격을 넘어 호기심으로 파고들려 하지 말아야 한다(벨직신앙고백서 13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가 언급되어야 하는데, 우선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바로와 다른 이들은 그 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배역한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을 탓할 수 없다. 둘째, 하나님은 때때로 어둡고 고집스런 모습과는 달리 자신의 긍휼을 밝히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하여 그들의 죄 가운데 백성을 완악하게 하도록 택하신다.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 9:22-24).
달리 말하면 우리는 진흙에 불과한데 주권자가 회전시키는 물레위에 다양한 진흙 항아리를 빚는 방식과 관련하여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힐문할 수 없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 9:20-21).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예”이다. 확실히 토기장이는 자신의 계획과 소망을 따라서 그 손의 진흙을 빚을 권한을 가졌다. 영벌이라는 주제에서 다른 얘기로 옮기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제외된 것에 대하여 종종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관하여 한마디 해야겠다. 요약하면 그들은 영벌에 처해 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먼저 당신이 그러한 두려움이 있다면 혹은 이것에 대하여 걱정하는 누군가를 당신이 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므로 안심해야 한다. 돌트신조는 이 주제에 전 조항을 할애하는데 1장, 16장이다. 명백히도 이 신앙고백의 저자들은 이러한 걱정이 얼마나 자주 생길 것인가를 알았다. 이 고백의 대답은 목회적이다. 때로는 주님을 믿는 자들이지만 그들의 신앙이 너무 약하여 혹시 타락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래서 심각한 죄에 빠지는 그리스도인이거나 그들이 원하여 계속 죄를 짓는 것처럼 시험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은 자들이 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선택을 의심하고 영벌을 두려워할지 모른다.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자신을 부도덕하고 불경건한 삶으로 온전히 내어주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연히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들과 그들의 신앙과 시험을 이기는 능력이 여전히 너무 약하여 좌절하는 사람들 또한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러한 싸움에 직면할 때, 그들은 타락할 것이라는 사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 하신다”(사 42:3; 마 12:20; 돌트신조 1.16).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은 이것이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니라”(고후 1:18). 그의 영광을 찬송하고 그의 백성에게 위로를!
3.6 언약과 선택
우리가 일찍이 다룬 선택과 관련한 마지막 한 질문이 있다. 그러나 추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이 질문이 중심이 된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하여 어떠한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만일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실제적이고 개인적이다. 우리는 모든 세례 받은 개인, 하나님의 언약의 표를 받은 자, 하나님의 선택된 자로서 생각을 해야 하는가? 언약과 선택은 유사점들이 있다. 여기에 간략히 언급할 수 있는 셋이 있다.
언약을 설립한 하나님은(창 17:7) 어떤 죄인들을 자기 자신의 양자 삼기로 영원한 법령을 만드신 동일한 하나님이시다(엡 1:4).
하나님은 선택 안에서(롬 9:15) 그가 보여주신 것과 마찬가지로 언약 안에서 과분한 자비를 보여주신다(신 7:7-9).
그리스도는 언약의 중보자이시며(눅 22:20; 딤전 2:5), 선택의 법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졌다(엡 1:4-5).
최소한 세 가지 주요 차이점들이 있다.
선택은 죄인들의 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법령을 나타내며(롬 8:28; 엡 1:5), 언약은 죄인들과 하나님의 관계와 관련된다(레 26:12).
하나님의 선택은 창세전에(엡 1:4) 발생되었으며, 반면에 언약은 시간 안에서 곧 역사 안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과 맺었다(창 17장).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법령은 변할 수 없으나(시 33:11), 언약은 깨어져서는 안 되지만(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죄의 본성에 의해 깨어진다(신 31:16).
그러면 이러한 두 교리가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마지막 날에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당신의 계획을 시간과 역사 안으로 가져와서 사용하시는 특별한 도구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식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은 영광 가운데, 틀림없이 새 하늘과 새 땅인 그 곳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마지막 목표를 향하여 일하실 때 언약 관계를 사용하신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9장 6절에서 “이스라엘에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말씀한 바와 같이 은혜언약 안에 모든 사람이 다 택자는 아니다. 게다가 야곱과 에서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하며 둘 다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야곱은 내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노라”(롬 9:13)고 말씀하신다. 동시에 우리가 성경에서 언약의 어떤 회원들이 택자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서서히 영적 의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들을 붙들며 회개와 모든 죄의 줄을 끊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에 영원한 소망을 발견하자. 그분은 선한 목자시며 환란 받는 자의 위로가 되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신다(사 42:3; 마 12:20; 돌트신조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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