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서 연합과 사랑의 정신을 추구한 칼빈]
"참된 연합과 사랑의 정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터 위에서 가능하다."
칼빈의 교회의 표지 이해에 따르면, 말씀 선포와 성례가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 짓는 확고한 잣대가 되지만, 말씀 선포와 성례라는 표지가 존재할 때, 표지가 있는 교회에 대해 칼빈은 많은 관용을 베풀어야 됨을 강조합니다. 이와 같은 기준에 의해, 말씀 선포와 성례가 부패된 로마 카톨릭에 대하여 단호히 거짓 교회라 부르며, 그들에게서 분리를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교회의 표지를 넘어서 교회에 완전주의를 적용해 도덕적 잣대나 연약함을 근거로 교회로부터 분리하거나 교회를 부정하던 도나투스파나 재세례파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몹시 강하게 경계하였습니다. 즉, 칼빈은 교회의 연합을 몹시 존중한 것입니다. 칼빈은 참된 표지 안에서 교회는 연합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빈에게 진리와 사랑은 타협할 수 없는 두 가지 교회의 추구할 바였던 것입니다.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을 우리는 극히 존중해야 하며 교회의 특색을 나타내는 영원한 표지로 삼을 정도로 이 일을 공경해야 된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다. 즉 이 일이 건전하고 순결하게 유지되는 곳에서는 도덕적 과실이나 병폐가 있더라도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둘째, 교회 내에 사소한 과오가 있더라도 그 때문에 그 합법성을 부정할 정도로 교회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용서해야 될 과오가 있다는 것을 밝혔다. 즉 중요한 교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모든 신자들이 인정해야 하는 신조들을 말살하지 않는 과오 그리고 성례에 대해서 주의 합법적 제도를 폐지하거나 전복시키지 않는 과오는 용서해야 된다.
그러나 종교 생활의 요새에 허위가 침입해서 필수적인 교리의 핵심과 성례의 효험이 파괴될 때에, 확실히 교회는 죽게 된다. 목을 찔리거나 심장에 치명상을 입은 사람이 죽는 것과 같다. 교회의 기초는 사도와 예언자들의 교훈이며 모퉁이의 머릿돌은 그리스도시라고 가르치는 바울의 말에도(엡 2:20)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교회의 기초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교훈이며 그들은 또 구원은 그리스도에게만 맡기라고 신자들에게 명령하는데, 이 교훈을 제거한 후에 교회가 어떻게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경건의 이 핵심뿐이므로 이 핵심체가 죽으면 교회는 쓰러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된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칼빈에게 거짓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가 무너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특별히 말씀 선포가 순수히 시행되지 않는다는 말은 사도와 선지자, 곧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된 교회요, 말씀으로부터의 진리를 요약하여 온 교회가 인정하고 고백한 역사적 신조들이 부정되는 교회인 것입니다. 도덕적으로는 많은 관용을 교회에 돌린 칼빈은 표지의 부패에 있어서는 타협이 없습니다. 칼빈에게 참 교회와 거짓 교회는 교회의 표지에 준하여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에게 표지를 잃은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거짓 교회로 여겨집니다.
칼빈에게 로마 카톨릭은 어떤 상태로 판단된 것일까요? 왜 칼빈은 로마 카톨릭을 거짓 교회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교황 제도하의 상태가 바로 이러한즉 거기 얼마나 많은 교회가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말씀 대신에 거짓말을 섞은 패악한 조직이 교회를 지배하며, 이 조직이 순수한 빛을 꺼 버리기도 하고 희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주의 성만찬은 가장 추악한 모독 행위로 대체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참을 수 없는 각종 미신으로 더럽혀졌다. 기독교는 교리를 떠나서는 존립할 수 없음에도 교리는 완전히 매장되고 제거되었다. 공중 집회는 우상 숭배와 불경건을 가르치는 곳이 되었다. 따라서 이렇게 많고 치명적인 비행에 참가하지 않아야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멀어질 염려가 없다. 교회와의 교통은 그것이 우상 숭배와 불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기타 악폐에 우리를 빠뜨리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조건 위에서 확립된 것이다.”
칼빈이 로마 카톨릭과 결별한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그들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성경관은 성경이 교회의 터가 아니라 교회가 성경의 터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상 교회의 머리로 자칭하는 교황을 중심한 로마 교회 조직은 성경을 무참히 왜곡하고 수많은 인간에게 속한 것들과 미신적인 것들로 진리를 흐리고 불순한 것들로 혼합시켰습니다.
칼빈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교회의 표지를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 짓는 잣대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칼빈을 분리주의자로 혹은 연합과 사랑을 멸시하는 자로 매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앞에서도 확인한 것처럼, 몹시 연합과 사랑의 정신을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도나투스파, 재세례파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말입니다. 말씀을 왜곡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근본 교리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관용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칼빈은 논쟁을 일으켜 교회와의 교통을 끊는 사람들을 이단자 또는 분리론자로 부릅니다. 이단자와 분리론자란 근본 교리가 아닌 매우 비본질적인 차이들에 대해 허탄한 논쟁을 일삼고 사랑과 연합을 무시한 채 분리를 시도하는 자들입니다. 또 이들은 표지가 있는 교회를 향해 완전주의적 망상과 자기 과시 혹은 교만한 마음으로 교회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칼빈이 이단자와 분리론자를 이처럼 정의한 것처럼, 칼빈은 분리주의를 경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연합과 사랑의 정신을 존중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참된 연합과 사랑의 정신의 기초에 관한 문제도 지적합니다.
참된 사랑과 연합의 정신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문제를 희생하고 파괴하고 타협하며 존속될 수 없습니다. 참된 연합과 사랑 자체가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함께 갑니다. “이 교통을 유지하는 유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양자 중 한 측면에 있어 배제하는 일을 철저히 경계합니다. 칼빈은 어거스틴을 따라 이단과 분리론자를 구별합니다. 이단자들은 그릇된 교리로 건전한 믿음을 부패하게 만드는 자들이며, 분리주의자들은 간혹 같은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교제를 끊는 사람들입니다. 칼빈은 양자를 모두 혐오합니다. 전자는 진리를 왜곡한 자들이요, 후자는 사랑을 멸시하는 자들인 이유에서입니다. 칼빈에게 진리는 사랑의 터입니다. 진리와 사랑은 분리될 수 없고 함께 합니다. 진리의 터 위에서 사랑의 연합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결합은 믿음의 일치에 달려 있으므로, 이 후자는 전자의 출발점과 종점과 유일한 법칙이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고 칼빈은 가르칩니다. 따라서 교회의 연합을 우리에게 요구할 때, 반드시 요구조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실 때, 연합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지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할 때, 우리의 의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간의 호의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회론적 관점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성경과 근본 교리와 성례를 파괴하는 교회가 교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표지를 가진 교회로서, 근본 교리를 일치되게 고백하는 교회 간에 관용과 화해 그리고 사랑의 정신으로 연합해야 하는 교회의 도리도 우리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맺혀지는 열매이니 말씀을 떠난 연합은 있을 수 없으며, 사랑과 연합의 정신을 파괴하면서도 참 진리 위에 서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서 연합을 추구하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칼빈은 치우치지 않은 진리의 터 위에 사랑과 연합의 정신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Calvin, Inst. IV, ii. 1-5 참조>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W97N/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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