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세대 종교개혁자 칼빈은 1536년 8월부터 종교개혁의 중심지 제네바에서 설교자로, 교사로 일하면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다. 자신이 원해서 그곳에 머무른 것도 아니었건만 제네바시의회와 시민들은 칼빈의 개혁을 좌절시키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칼빈의 집 주위로 몰려와서 돌을 던지거나 총을 쏘며 시위를 벌였다. 결국 칼빈은 견디지 못하고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된다. 개혁을 시도한지 2년도 못되어서 였다. 이렇게 제1차 칼빈의 제네바 사역은 끝이 났다. 이 때 칼빈은 본래의 그의 목적지였던 스트라스부르그로 간다. 여기서 만난 사람이 마틴 부서였다.
부서는 칼빈보다 20살이 더 많은 당시 50세의 사람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을 화합시키기 위하여 노력했던 부서는 관용과 사랑의 사람이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6개월을 머무르면서 부서의 관용과 사랑을 배우게 된다. 당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토마스 교회의 목회자가 되어 프랑스 난민들을 섬기고 있었다. 칼빈은 이곳에서 두 자녀를 둔 재세례파 출신 과부 이델데 드 뷰어를 만나 독신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접고 결혼을 한다. 3년 후인 1541년 칼빈은 개혁지도자로 와달라는 제네바의 요청에 “신속하고도 신실하게 나의 심장을 드리겠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고 추방된 도시 제네바로 간다. 여기서 칼빈은 목사, 장로, 교사, 집사의 네 직제를 가진 교회 공동체를 세운다.
더 이상 교황이 교회의 머리가 되는 교회가 아닌 신자들의 회합으로 이루어지는 교회가 출발되었으니 이것이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가 된 것이다. 칼빈의 가장 큰 공헌은 위기에 처한 종교개혁을 구했다는 것이다. 그의 사상은 400년간 서구인들이 성찰하였던 철학, 교육, 복지, 정책, 문학, 음악, 예술, 경제 등의 많은 영역에 영향을 끼친다. 칼빈은 제네바를 유럽 최초의 공교육 도시로 만들었다.
당시 유럽 정부들이 교육이 국가적 임무라는 사실을 모르던 시절 칼빈은 시 재정과 기부자의 후원을 받아 시립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빈민의 자녀들까지 성경 인문 실기교육을 받게 하였다. 물론 학비는 무료였다. 그가 세운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 대학으로 1559년 그가 처음 개교할 때 900여명이 등록할 만큼 인기가 높았고 제네바는 현대 공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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