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의 오해
최더함(아리엘개혁교회 담임목사. 마스터스 세미너리 책임교수. 개혁신학포럼 학술위원)
오해
먼저 두 가지 질문으로 칼빈주의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 칼빈 만큼 살아생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대적자들로부터 음해와 핍박과 공격을 받고 있는 인물이 있을까?
2. 인류사에서 칼빈주의 만큼 결정적이고 광범위하며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에도 반대로 그에 상당한 오해와 멸시를 받는 신학사상이 또 있을까?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해 부정적이고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아예 칼빈을 악마로 생각하고 칼빈의 이름이 들어간 모든 용어를 듣기조차 거부한다. 마치 사단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닫고 얼굴을 찌푸리는 형국과 같다. 이런 경우 대개 진위여부보다 태생적으로 칼빈이라는 인물과 칼빈주의라는 진리의 체계에 대한 거부감이 내재된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싫은 것’의 심리는 논리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며 인간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나쁜 사상일 뿐이다. 근원적으로 보면 이런 사상의 흐름과 생존은 오직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섭리에 따라 허용되어 나타나고 존재하는 대적의 역사이다.
그러나 칼빈은 종교개혁가이자 예수님 이후 사도와 교부들과 어거스틴으로 이어지는 사상과 동, 서방신학을 섭렵하고 총괄하여 가장 성경적인 신학을 수립한 장본인이며,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고 쓰임을 받은 가장 천재적이면서 동시에 충직하고 열성적이며 경건한 성령의 사람이었음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다. 산이 높을수록 골이 깊듯이 칼빈에 대한 모든 공격과 왜곡과 오해들은 칼빈의 이러한 위대함에 대한 역설적인 반증이 된다. 여기서 칼빈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와 평가를 논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첫째, 칼빈 개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16세기 말, 독일에서 떠돌던 한 이야기는 칼빈에 대한 왜곡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한 늙은 농부가 자신이 속한 루터교회 목사에게 찾아와 꿈에 자기 집 주위를 한 마녀가 날아다니는 것으로 인해 몹시 괴롭다고 토로했는데 이에 루터교 목사가 혹시 그 마녀가 누구를 닮았느냐고 묻자 그 농부는 그 마녀의 생김새가 칼빈과 닮았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당치도 않을 이런 식의 악의적인 소문은 칼빈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칼빈에 대한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이미지는 칼빈이 생존할 때부터 제기되어 왔다. 칼빈의 생애를 살펴보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그는 대적자들의 공격에 시달렸다. 대표적으로 몇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삐에르 아모 사건
- 1545년 1월, 불륜을 저지른 아내와 이혼하고 재혼을 허가받이혼소송에 반대하는 칼빈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제네바 시민법을 강력하게 비난하여 아모는 체포됨.
- 200인 의회는 칼빈의 온건한 처벌 요청을 수락하고 아모로 하여금 시의회당 정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라고 결정함.
- 그러나 아모는 칼빈이 독단적으로 7년 동안 이단을 전파했다고 주장하고 하나님을 모독하자 시의회는 아모에게 참회의 복장을 입고 머리를 민 채 손에는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감옥에서 시청까지 끌려와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춤 금지사건
- 포병대장 페렝의 아내가 주일에 춤을 추어 치리회로부터 징계를 받자 폭언을 퍼부었다. 그녀는 치리회가 자기 집안인 파브르 가문에 대해 좋지않은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치리회는 그녀의 친정 아버지의 간통문제까지 거론하며 더욱 강한 처벌을 내렸다. 칼빈은 이에 페렝과 대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페렝이 거부하며 뒤에서 칼빈에 대한 저주와 악담을 퍼부었다. 칼빈은 편지를 보내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회의 규율을 따르라고 충고했다.
연극 공연 사건
- 칼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의회는 주일 날 ‘루 모네’가 주도하는 ‘사도행전’이라는 연극공연을 허가했다. 이 연극은 2주간의 시간과 500명의 출연진이 필요한 대규모 공연이었다. 이에 미쉘 꼽 목사는 설교를 통해 시의회와 적극적인 반대를 하지 않은 칼빈을 꾸짖자 연극배우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칼빈이 중재에 나서 그들을 진정시켰다.
결혼식 사건
- 8월, 페렝의 친척 결혼식에서 신랑이 주어진 질문에 ‘예’라는 대답을 거부하고 머리를 가로 질러 시의회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중상모략 편지 사건
- 6월 27일,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을 비난하고 살해 위협을 하는 편지가 교회 설교단에 붙었다. 시의회는 자끄 그뤼에가 용의자임을 밝혔고, 그는 7월 26일에 잘못을 끝내 거부하자 교수형에 처해졌다.
페렝의 반격
- 9월 20일, 시의회 회의장에서 페렝은 자기 아내와 장인의 수감과 관련하여 시의회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베른 출신인 그는 이미 5월에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추기경 벨레와 손을 잡고 그 대가로 수백의 기마병의 지휘권을 손에 쥔 상태였다.
소문과 11월 선거
- 로잔느에선 칼빈을 가인이라 불렀고, 곧 그가 제네바에서 추방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11월 선거에서 칼빈 반대파들이 시의회 선거에서 다수파를 장악했다.
- 이때 트롤리에는 칼빈의 저서와 설교에 대해 계속 비난을 가했고, 페렝을 포함한 다수가 이제 성찬식 참여를 공공연하게 거부했다. 다음 해 2월, 페렝이 수석 시장관으로 선출되었고 이로써 칼빈의 종교개혁은 55년 선거 때까지 많은 저항을 받았다.
- 제롬 볼섹(1522-1584)이 칼빈의 이중예정론을 강하게 비난했고, 결국 그는 12월에 추방되었다.
장 트롤리에의 예정론 공격
- 1545년 목사회의 반대로 목사가 되지 못한 트롤리에는 정치적 노력 끝에 시의회의 감사가 되었다.
- 9월 1일, 시의회에서 예정론을 가지고 칼빈과 논쟁을 별였다. 그는 멜랑흐톤을 옹호하며, 기독교강요를 손에 들고 칼빈이 죄의 기원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칼빈은 멸망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 속에 숨겨져 있고, 다른 하나는 분명히 가시적인 각 사람의 죄에 있다며, 이 죄를 하나님의 작정 탓으로 돌리는 것을 매우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필리베르 베르뗄리에르 사건
- 1년 전 과음으로 교회로부터 성찬 참여징계를 받은 그가 시의회에 성찬 참여를 복권시켜 줄 것을 청원하고 시의회가 이를 허가함.
- 9월 2일 소집된 시의회에서 칼빈과 목사들은 교회법을 설명하며 반대 입장을 전달했지만 시의회에서 수용하지 않음.
- 9월 3일 주일 예배에 교회는 베르뗄리에르의 성찬참여를 금지함.
- 11월에 베르델리에르가 재 청원하고 200인 의회가 이를 허락함. 다시 칼빈과 제네바 목사들은 시의회의 결정을 반대함. 이에 시의회는 베른, 취리히, 바벨, 샤프하우젠 등에 사절단을 보내어 자문을 구함.
세르베투스와의 논쟁
- 두 사람의 서신교환과 논쟁은 1546년부터 시작되었다(약 30여 통의 편지가 교환되었다).
- 1553년 그는 자신의 저서인 <기독교의 회복>을 통해 삼위일체와 원죄, 유아세례, 이신칭의 등의 교리를 부정하고 칼빈을 공격했다.
- 비엔느에서 그는 이단죄목으로 종교재판소의 심문을 받던 중 탈출하여 8월 13일 칼빈의 설교를 듣는 군중 속에 숨어들었지만 곧 체포되었다. 비엔느에서 그의 소환을 요구해지만 제네바는 거절했다.
- 그는 수감 중 시의회에 편지를 보내 칼빈을 마법사라고 공격했다.
- 10월 26일 그는 시의회로부터 화형을 선고받았다. 칼빈은 시의원들을 상대로 백방으로 그의 화형을 감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칼빈은 처형 당일인 27일에 그를 찾아가 위로하였고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끝내 삼위일체에 관한 그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칼빈의 왜곡된 초상화로 남아있다. 많은 칼빈의 초상화 대부분이 칼빈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착화하고 있다. 매서운 눈매와 날카로운 콧날, 뾰족한 턱과 깡마른 얼굴형태는 어디 하나 따뜻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다. 칼빈을 깎아 내리기 위한 대적자들의 행위가 얼마나 악의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외 칼빈의 사생활에 대한 공격도 만만치 않았다. 알다시피 칼빈은 이들레뜨 드 뷔레라는 미망인과 결혼을 했는데 이것 때문에 칼빈은 돈 많은 과부와 의도적으로 결혼을 했다는 루머에 시달렸다. 결혼 10년 만에 부인이 죽자 입방아에 올랐고, 부인이 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딸이 간음 사건에 연루되자 목회자 자질문제가 거론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부인과 자녀들에 대한 칼빈의 애정은 남달랐다. 부인 사후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살아생전에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다. 그녀는 아주 사소하게라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다”(삐에르 비레에게 보낸 편지 중)
칼빈에 대한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는 미카엘 세르베투스 사건에 대한 왜곡 때문이다. 두 사람의 서신교환(약 30여 통)과 논쟁은 1546년부터 시작되었다. 1553년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저서인 <기독교의 회복>을 통해 삼위일체와 원죄, 유아세례, 이신칭의 등의 교리를 부정하고 칼빈을 공격했다. 그는 개신교인들을 선천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비엔느에서 그는 이단죄목으로 종교재판소의 심문을 받던 중 탈출하여 제네바로 피신했고, 어느 날 칼빈의 설교를 듣는 군중 속에 숨어들었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비엔느에서 그의 소환을 요구해지만 제네바는 거절하고 그를 수감했다. 세르베투스는 수감 중에도 시의회에 편지를 보내 칼빈을 마법사라고 공격했다. 결국 그는 시의회로부터 화형을 선고받았다. 칼빈은 시의원들을 상대로 백방으로 그의 화형을 감형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칼빈은 처형 당일에 그를 찾아가 위로하였고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악의적인 모함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관한 그의 생각을 바꾸지 않았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를 두고 반대자들은 아직도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살인한 장본인이라고 호도한다. 이런 억지 주장은 제네바의회가 제정한 시민법의 배후에 칼빈이 있었고 모든 의회의 결정을 칼빈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반면에 그들은 세르베투스가 어떤 인물이었고 그가 제네바시를 비롯한 당시 국가사회의 어떤 법을 위반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칼빈을 대적하고 모함했는지에 대해 함구한다. 당시 사회에 대한 일말의 지식만 있어도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행위는 모든 유럽의 국가에 있어서 사형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애써 모른 척 한다. 나아가 세르베투스가 자신을 악의적으로 비방하고 모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의 회심을 위해 사형 직전까지 그를 찾아가 설득하고 의회에 용서를 구하는 탄원을 한 칼빈의 행적에 대해선 아예 그런 사실조차 처음 듣는다는 투로 이야기한다.
그들은 칼빈이 얼마나 성령의 사람이며 기도의 사람이며 경건의 신학자이며 열정적인 종교개혁가였는지 애써 부인한다. 그들은 칼빈이 왜 제네바시를 종교개혁의 도시로 건설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교회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왜 하나님이 종교개혁이라는 심판을 단행해야 했는지 침묵한다. 그들은 카톨릭교회에 의해 1천년 동안 지속되어 온 온갖 죄악과 타락을 청소하고 새로운 기독교회를 탄생시킨 주인공이 칼빈이며 그 중심에 <기독교강요>라는 불후의 저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평가 절하한다. 아예 읽어보지도 않는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교회가 지상 최고의 타락한 교회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바이고 준엄한 역사의 손으로 고발하고 있음에도 그런 교회를 지지하며 개신교인들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방해한 인물을 법에 의해 심판한 것을 문제시 삼는다. 대한민국 법정이 사형죄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체포하고 법에 따라 사형을 실시한 것을 두고 그것은 살인행위라고 매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악의적인 흑색선전을 주님의 이름으로 고발해야 한다.
둘째, 칼빈주의는 칼빈이라는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부각시킨다.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싫어하는 사람은 이 용어가 칼빈이라는 사람을 지나치게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한다. 사람을 숭상하였기에 고린도교회가 분열된 것처럼 칼빈에게 의존하는 칼빈주의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반론은 상당한 일리가 있다. 실제로 칼빈주의 안에서 이런 사례들이 있었다. 칼빈주의 설교자였던 스펄전 목사(Charles H. Spurgeon, 1834-1892)는 ‘어떤 사람들은 칼빈의 성경해석을 성경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질타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칼빈이라는 한 사람을 따르는 사상이 아니다. 심지어 칼빈은 생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어떤 용어도 사용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주문할 정도였다. 칼빈도 흠이 많은 인간이요 완전한 신학자도 아니었다. 칼빈주의가 가르치고 있는 많은 신앙의 가르침들에는 칼빈이 언급하지 않은 것들도 수다하다. 그럼에도 칼빈의 이름이 들어간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가 가장 훌륭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고, 이후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이 가장 충실하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의 체계를 발전시켰으므로 편의상 사용하는 것이고, 또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지도자들의 이름을 따서 교파나 사상을 호칭하는 사례가 너무 많듯이 칼빈주의도 그런 예에 속한다. 이런 전통은 일반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16세기 유럽에서는 위대한 종교개혁가들의 이름을 따서 교회나 교파의 명칭을 통칭했다. 루터(1483-1546)를 따르는 교회를 ‘루터교회’라 부르고, 츠빙글리(1484-1531)를 따르는 스위스 북부교회를 츠빙글리 교회라 부르고, 메노 시몬(1496~1561)을 따르는 사람을 ‘메노나이트’라 부르듯이 칼빈주의라는 용어도 그런 습성에 해당할 뿐이다.
셋째, 칼빈주의는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다.
비판자들은 칼빈이 사용한 신학 용어에도 부정적인 평가를 한다. 어떤 이들은 칼빈의 이중예정이 성경 밖의 하나님의 주권을 이야기한다며 이런 이론은 당장 폐기되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인다. 이외 삼위일체, 휴거, 천년왕국 등의 용어도 거부한다. 특히 삼위일체의 발견은 가장 위대한 신학적 발견이라고 평가받는다. 아리우스주의 등 이단을 제외하고선 누구도 이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삼위일체는 오직 한 분이면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적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지신 하나님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이 교리는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단들에게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이다.
이런 반론들은 타당성이 없다. 이런 논리라면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하여 설명하는 모든 신학용어가 무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 진리인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어떻게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로 가르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마치 라면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없고 무조건 건강을 해치는 음식이므로 라면을 추방해야 한다는 논리와 진배없다.
넷째, 칼빈으로 인해 율법주의 혹은 교조주의가 나타났고 이것이 복음을 가로막았다.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복음을 지나치게 교리 중심으로 분류하고 해석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을 가로막았다고 평한다. 다시 말해 칼빈의 영향으로 나타난 강해설교는 성경을 지나치게 분석하고 주석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교조화하고 형해화했다고 공격한다. 특히 이런 반론자들은 칼빈의 예정론을 대단히 거부하는 심사를 가지고 있다. 예정론으로 말미암아 모든 복음의 효과적인 선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로 예정론을 꼽는다. 북미개혁교회의 프롱크 목사는 도르트신조 강해설교를 통해 예정론을 함부로 다루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고취하면서 예정론을 이해하기 위해선 전문가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우리는 예정을 구름 속에 있는 높은 산꼭대기와 비교할 수 있다. 그 산꼭대기는 깊은 골짜기, 갈라진 틈, 벼랑을 따라 굽이굽이 좁은 길로 오를 때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은 매우 좁은 길이어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한다. 한 걸음이라도 헛디디면 당신은 벼랑 아래 바위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높은 곳을 오를 때에는 전문가의 안내가 필요하다”
또 김세윤은 예정론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가장 밝은 불빛으로부터 시작해야 이해된다고 조언한다.
"예정은 태초를 논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논할 때 태초라는 시점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원 사건부터 논해야 한다.(중략) 예정 교리는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논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고 고백하며 그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일어났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게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계시가 가장 환하다. 이전가지의 계시 즉, 구약의 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계시에 대한 준비 계시였다. 그래서 구약의 계시는 그 불빛이 그다지 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의 계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계시에 대한 그림자였다. (중략) 그런데 이 계시의 불빛은 양쪽으로 멀리멀리 비췰수록 희미해진다. 이쪽은 태초요 저쪽은 종말인데 중간의 불빛이 양쪽으로 갈수록 희미해진다. 중간(그리스도)이 제일 환하다“
확실히 우리에게 예정론이 없다면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모든 불안감으로 신앙의 항로가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확신은 구원의 감사로 이어지고 신앙하는 일을 더욱 경건하게 만든다. 예정이라는 산꼭대기에 오르려면 많은 땀과 피의 헌신을 쏟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죄인은 자신을 낮춘다. 예정의 골짜기에 갇혀 불쌍한 거지처럼 무릎을 꿇고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이 얼마나 추한 죄인이며 우매한 자인지를 깨닫는다. 도무지 자신의 힘으로는 산의 정상으로 갈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예정은 죄인을 낮추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의 방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
칼빈주의는 결코 율법주의도 아니고 교조주의도 아니다. 더욱이 칼빈주의는 칼빈 개인의 사상도 아니요, 칼빈이라는 한 사람을 추앙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품도 아니다. 칼빈주의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전승과 교부들과 어거스틴과 그 뒤를 잇는 후예들과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들을 칼빈이 가장 성경적인 기독교를 세우기 위해 혼신의 열정과 모든 지성적 헌신으로 종합하고 체계화한 신학적 열매들이다. 가장 성경적인 신학으로서 오직 칼빈주의만이 성경을 바로 알게 하고 바로 믿게 하고 바로 행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도 칼빈주의는 개혁을 위한 연구를 병행한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는 가장 성경적인 개혁신학이다. 지금도 칼빈주의는 개혁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성경적인 신학과 사상과 신앙을 고수하고 개혁하기 위해 정통 기독교라는 역사의 강물이 되어 도도히 흐르고 있다. 한 번도 이 강줄기에서 이탈하지 않고 비록 소수이지만 하나님나라의 그루터기로서의 사명을 잃지 않고 있다. 칼빈주의가 곧 개혁주의요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역사적이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주류(main stream)임에 틀림없다.
[출처] 칼빈주의의오해- 최더함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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