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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기독론

by 김경호 진실 2015. 10. 1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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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 승천 이후의 기독론

(캄펜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B. Kamphuis 은퇴강연)


2015. 9. 3. Prof. Dr. Barend Kamphuis

번역: 이충만 (2015. 10. 6)


나는 30여년 전(1986년) 1930년대 네덜란드 개혁파 진영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비위격적 인성에 대한 논쟁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적었다. 이후로 나는 늘 기독론과 씨름하였다. 박사학위논문에서도 기독론을 다루었고, 캄펜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대부분 기독론을 강의하였다. 나는 늘 기독론을 연구하였지만, 기독론은 끝없는 논의의 대상이다. 나는 뛰어난 선배들에게 많이 배웠다. 그 중에서도 존 칼빈, 헤르만 바빙크, 칼 바르트, 클라스 스킬더, 헤릿 베르카워, 디트리히 본훼퍼, 그리고 브람 반 더 베이크를 언급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들 중 누구도 기독론의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비밀이 그리스도안에 계시되었음을 분명하게 가르쳤지만, 이 계시의 풍성함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나 스스로도 기독론을 공부 하면서 나의 이해력의 한계를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에 대한 개혁파 신앙고백과 교리를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개혁파 신앙고백과 교리 또한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배웠다. 즉 개혁파의 교리 또한 특정한 접근방식에 불과하다.


나는 본 은퇴강연을 통해 비밀로써의 기독론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 한다. 이로써 내가 기독론의 최종적인 결론을 지을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기독론의 비밀에 대한 나의 접근 역시 가능한 것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기독론의 특징인 비밀스럽게 감춰짐[1]에 대해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피려 한다.


우선, 나는 승천 사건을 살펴 보고, 승천을 감춰짐과 관련하여 기술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찾아 보겠다. 이로써 나는 “감춰짐”의 의미를 규명하려 한다. 또한 승천과 오순절 사건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도 어떻게 이 “감춰짐”의 비밀이 지속 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겠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비밀이 그리스도인들의 비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 역시 언급해야 한다.


  1. 그리스도의 승천

    20125Nederlands Dagblad는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해 꺼려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천여명의 목사들의 인터뷰에 기초하여 작성되었다. 인터뷰에 응한 목사들 중 절반 이상은 교인들이 승천에 대하여 말하기를 꺼려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힘들어 한다고 말하였다. 뿐만 아니라 목사들 중 15%는 자신들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였다.

    동시에 이 기사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되는 두 가지 고충도 언급하였다. 첫째, 목사로서 “매 번 예수님의 승천이 어떤 측면에서 우리에게 이로운지를 설명해야만 한다”는 고충이었다. 성탄절, 고난과 부활, 혹은 성령강림주일이 의미하는 바는 아주 뚜렷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떠나가신 것이 왜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사건인가”라는 질문은 여간 어려운 설교주제가 아닐 수 없다. 두번째 고충은 변화된 세계관의 문제이다. 하늘, 혹은 천국을 특정한 공간으로 생각한다면, 이 공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그 어디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특정한 우주공간으로 옮겨 가신 우주여행을 의미하는가?

    나는 본 고별강연에서 두번째 고충은 다루지 않겠다. 이는 최근에 논의되고 있다. 예를들어, 뤼코 반 덴 브롬 (Luco van den Brom)은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한 박사논문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승천을 “예수님께서 3차원의 피조된 실재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공간이 지니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려 지신 것’이라고 정의한다.[2] 그는 세계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하늘’과 승천의 공간적 특성을 유지하려 시도하였다.

    나는 첫번째 고충을 다루고자 한다. 이 첫번째 고충이 더 어려운 주제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16장 7절에 친히 말씀하셨지만, 왜 예수께서 떠나시는 것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앞서 언급한 기사에서 목사들은 전통적인 대답을 제시하였다: “예수께서 재림 하실 것을 준비하시고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아버지 옆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기 때문이다”, 혹은 “예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마지막 대답이 가장 많은 응답자 수를 (42,5%)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대답도 “왜 예수님의 승천을 기뻐하고 기념해야 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왕권을 누구나 항상 경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승천을 기념하지 않고 있다. 올해 초 나는 아내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였다. 우리의 일정에는 공교롭게 승천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교회는 수시로 모이기에 힘쓰지만, 승천일은 예외였다.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지 않았다. 사실 이는 그리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의 승천을 감춰진 비밀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곧 승천에 대한 거리낌은 그 원인이 성경 자체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감춰짐으로써의 승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이는 누가가 사도행전 1장 9절에 기록한 승천사건이다. 제자들은 이 승천을 증언해야 한다. 그들은 승천의 증인이 되기 위해 이를 목격하였다. 그런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예수께서 “들려 올려지시는 것”을 목도하였다. 예수께서 “하늘”로 가시는 것은 보지 못하였다. 이는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누가의 증언은 제자들이 본 광경을 기록한 것이다.[3] 이들은 예수께서 들려 올려지시는 것 외에 구름에 가리워 더 이상 보지 못한다. 11절에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께서 “하늘로” 올려 지셨음을 알린다.

    누가복음을 읽은 독자들은 이미 구름과 관련된 다른 사건을 안다. 변화산 사건이다.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 구름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눅 9:34-35). 이때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이다. 또한 예수께서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가르치며 구름을 언급하셨다. 사람들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눅 21:27).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을 통해 나타났음을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구름을 좇아 이동하였고, 구름이 회막 위에 머물렀다 (출 40: 34-38). 또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에 구름이 성전에 가득했다 (왕상 8:10). 시편은 구름이 하나님을 두르고 (시 97:2), 하나님께서 구름을 자신의 수레 삼으신다고(시 104:3) 찬송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에는 구름에 대한 다른 의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곧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감춘다. 모세는 구름이 머물고 있는 회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 40:35).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위엄이 구름으로 나타났을 때 성전에서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 할 수 없었다 (왕상 8:11). 솔로몬에 따르면, 주께서는 “캄캄한 데 (어두운 구름 안에)”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왕상 8:12).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고, 구름에 의해 가려져 있다. 시편 97편 2절도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었을 때 그 형태는 달랐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그 영광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광도 승천으로 인해 시야에서 사라졌다. 승천시의 구름은 구약성경의 구름과 같은 기능을 한다. 구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도 가리운다. 승천은 감춘다. 승천 이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적어도 우리의 육신적인 시력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히브리서 기자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할 때 (히브리서 2장 9절), 이는 육신적인 시력으로 그리스도를 보고 있지 않다.

    칼빈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승천 기록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이제 예수께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구름이 예수님을 모인 무리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곧 무리들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 만족하고, 그 이상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가려 애타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우리의 이해력이 그리스도의 높으신 영광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구름은 우리의 무모를 제어하는 고삐이다. 이는 율법 아래에서 연기가 성막을 가득 매웠던 것과 같다”.[4] 칼빈은 구름을 감춰짐으로 이해한 몇 명 안되는 주석가 중 하나다.

    골로새서 3장 3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감추어지심에 대하여 명확하게 이야기 한다. 이 구절은 골로새의 교인들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곧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에게 집중할 것을 요구하는 문맥 안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너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3절과 4절은 부분적으로 대조를 이루는 평행구조로 되어 있다. 두 구절 모두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을 말한다. 특히 4절은 “너희 생명”과 그리스도는 동일시한다. 그런데 3절은 이 생명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너희가 죽었”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분명히 있으나,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러기에 이 생명은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인지 가능하지도 증명 가능 하지도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4절은 다른 측면도 보여주지만 이는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그 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고 “너희 생명”도 영광 중에 나타난다. 4절의 “영광 중에”라는 구절은 3절의 “하나님 안에”와 대구를 이룬다. 이 두 표현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 그 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지금은 감춰져 있지만 곧 계시된다. 믿는 자들의 영광 또한 그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지금은 보이지 않으나 곧 만인에게 드러날 것이다 (나는 이를 조금 후에 다시 논하겠다).

    바울이 가르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안에” 계신다는 것 자체가 그분의 영광이지만 계시되지 않는다. 승천으로 인해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밀스럽게 감춰지셨다.

    개혁파 신학은 베들레헴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는 것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부활로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제대로 부각시킬 수 있기에 아주 좋은 신학적 틀이다.[5] 또한 이 구분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역사적 순서를 잘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에는 낮아지심으로부터 높아지심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적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파 신학의 도식 또한 다른 교의학적 도식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접근방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순서 뿐만 아니라 낮아지심과 영광을 받으심 사이에는 변증법적인 관계와 긴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6]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안에, 곧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도상에 변화산 사건이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낮아지심의 절정이지만, 동시에 요한복음이 가르쳐주듯이 높아지심을 의미한다. 반대로 높아지심 안에 낮아지심의 요소가 여전히 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감춰져 계시기 때문이다. 이로써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조롱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골로새서 1장 24절에 기록하였듯, 주께서는 주님의 지체들이 고통받는 것으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계신다. 땅 위에 있는 그분의 몸인 교회는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계시되었다. 그러나 현재 감춰져 있다.[7] 언젠가 우리는 주님을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다 (요일 3:2).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3. 믿음의 큰 비밀

    “크도가 경건의 비밀 (믿음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 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딤전 3:16). 여기에 영광 가운데 올리워지신 것이 우리 믿음의 비밀이다. 왜 비밀인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비밀의 네 가지 측면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첫째로 역사적 측면이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16장 25-26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 영세 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바가 이제 계시되었다. 곧 그리스도는 오랫 동안 감추어져 계셨다가 마지막 때에 계시 되셨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의 비밀의 유일한 측면이라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의 비밀은 전부 드러났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두번째 측면은 인식론적 측면이다. 이는 인간의 이해가 지니는 한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인간적인 지혜나 경험의 산물이 아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이 지식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다. 이 지식을 우리는 증명할 수 없고, 그저 받아들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비밀의 세번째 측면은 인격적 측면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인격적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어떤 자명한 진실 이거나 여러 진실 중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인격 자체가 진리 이시다 (요 14:6). 한 인격을 아는 지식은 늘 그 인격의 신비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적 측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 감춰 지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 계신 분이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돌프 터 펠더의 박사논문 제목은 이를 잘 지적한다.[8]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이해보다 더 크시다 (Deus semper maior). 헤르만 바빙크는 교의학 시리즈 두번째 권에서 신론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언급한다: “신비는 교의학의 본질적 요소이다”.[9] 교의학은 늘 “불가해한 분 앞에” 서 있다. 바빙크는 하나님께 적합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 하셨기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참되고 정확하나, 이 지식은 항상 상대적이고 완전한 이해에 미치지 못한다.[10] 이는 승천 하신 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으로 인하여 우리의 시야에서 분리되셨다. 그분은 하나님 안에 숨겨지셨고 하나님의 신비에 참여 하신다.

    스코틀랜드 신학자 제임스 앤덜손은 2007년 기독교 신학의 모순성에 대한 중요한 연구를 통해 기독교의 핵심적인 두 가지 교의, 즉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의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엔덜슨은 이 두 교의는 상호 양립할 수 없는 내용들을 조화시키기 위한 노력에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이 교의들의 모순적 성격을 회피하려는 오늘날의 신학적 시도들도 결함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 칼케톤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같은 고대 교회의 가르침들은 모두 상호 화해될 수 없는 모순된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11]

    그러나 동시에 앤덜손은 이것이 외견상의 불일치일 뿐 실제적인 불일치는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는 모순을 MACRUE, 명료하게 설명되지 않은 모호함으로 인한 단지 표면적인 모순 (a Merely Apparent Contradiction Resulting from Unarticulated Equivocation)”이라고 정의한다.[12] 동일한 단어가 다른 의미로 사용될 때에 “모호”하다. 예를 들어, 안다 (kennen)이라는 동사를 다음의 두 경우에 모두 사용한다면 이 단어는 “모호”하게 사용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재림의 때를 아신다 (kennen)” 혹은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4장 36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재림의 때를 아시지 (kennen) 못한다”.[13] 동일한 단어가 두 문장에서 조금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기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엔덜슨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이 안다 (kennen)”라는 단어의 상이한 뜻을 명료하게 정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교의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앤덜손의 지적에 동의한다. 이 모순이 외견상의 불일치라는 그의 주장에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MACRUE에 대한 그의 논의는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이는 실존적인 문제에 대한 이성적인 해결책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 하였듯이, 그리스도의 비밀과 신비는 인격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격이시며, 특정한 정식에 따라 제한되는 분이 아니시다. 이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동일하다. 우리가 누군가를 더 잘 알게 될수록, 그 인격의 이해하기 힘든 면을 더욱 존중하게 된다. 이는 부부 사이에도 그러하다. 내 아내가 나에게 여전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앤덜손이 말하는 MACRUE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아내를 알수록 아내의 개성과 나와 다름을 존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진리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만날 때 더욱 그러하다.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비밀의 네번째 측면, 곧 신학적 측면도 MACRUE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모호한 용어사용의 문제로 정식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사55:9). 하나님은 너무나 높고 너무나 크시기에 결코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나는 이를 지도투영법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흥미롭게 읽었다.[14] 지구의 둥근 표면은 어느정도의 왜곡 없이는 평면에 펼쳐 묘사될 수 없다. 그러기에 지도를 제작자는 필요를 위해 특정한 도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고, 일정부분을 왜곡시키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제작자가 실제 면적비를 정확하게 나타내려고 노력한다고 하자. 혹은 실제 거리비율을 정확하게 나타내려고 노력한다고 하자. 이 둘의 결과는 동일할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동일하다. 항상 진리의 한 측면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충분하게 고려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분의 신성 혹은 인격의 통일성 충분히 고려하는 것은 어렵다. 하나의 인격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인간이라는 것은 고로 모순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한계를 훨씬 넘어 있는 실재를 인간적인 신조와 교의적 정식이라는 평면에 끼워 넣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가? 그렇다. 하나님의 성육신의 기적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설명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해력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우리의 말, 찬송, 신앙고백, 그리고 교의적 설명들이 터무니 없이 빈약하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가? 그렇다.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이해의 한계는 특정 의견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교회를 분열시켰다. 정작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신데, 우리는 그분에 관하여 싸운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다. 만약 수학문제를 풀듯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명민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은 교회의 주변부로 밀려 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수학문제를 풀듯 이해할 수 있다면, 교회에서 찬송은 없어지고 믿음의 언어는 학문의 언어로 대체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믿음의 큰 비밀을 분명히 규명하지 못한 채 더듬고 있다. 우리가 이미 해결 방법을 찾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 혹은 “어떻게”라는 의문사를 사용하여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란 도대체 무엇인가 (wat)?혹은 “그분은 어떻게(hoe) 그러한 분이신가?” 그러나 교회는 디트리히 본훼퍼가 가르쳐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신가(wie)?”라고 질문한다[15]: “오늘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분은 당신을 위해 누군시가?”; “그분은 30여년 동안 기독론을 연구한 나에게 도대체 누구신가?” 이러한 질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 안에 숨어계심, 곧 그분의 비밀을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4. 승천과 오순절

    주님께서 승천하신 지 열흘 후에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셨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강림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감춰 계시지 않는가? 요한일서 2장 20절은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모든 것을 안다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약속 하셨고, 성령이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분이시라 가르치셨다(요 16:33).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떠나가사는 것이 유익하다(요 16:7). 승천 이후의 기독론만이 아니라, 오순절 이후의 기독론도 재고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부재하시는 동안 우리를 돕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다. 그러나 성령의 임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를 완전히 대체하지 않는다.[16]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재를 더욱 깊이 깨닫도록 하신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재림을 더욱 갈망하게 하신다.

    개혁파 신학은 항상 승천의 실재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개혁파 전통은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의 편재성으로 승천의 의미를 가르치지 않는다. 이는 루터파의 가르침이다. 오히려 개혁파는 승천의 의미로, 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으로, 곧 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 가신 것을 강조한다. 이는 성령께서 오셨다고 하여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오히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를 바르게 인식하도록 도우신다. 마이클 홀튼도 이를 잘 지적하고 있다. 그는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체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성령은 또 한 분의 구원자가 아니시다. 오직 구원자는 한 분이시니,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령님의 사역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17]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피조물이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완전한 구원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 8:23). 성령은 첫 열매 이며, 완전한 속량에 대한 보증으로써 임시적인 선물 이시다. 이러한 성령을 통해 우리는 영원을 미리 맛보지만, 이는 그 영원을 애타게 동경하게 만든다. 주는 영이시다 (고후 3:17).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더욱 주님을 그리워한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성령으로 충만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망으로 충만함을 의미한다. 이는 성경의 마지막 메시지와 일치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계 22:17). 곧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고대한다. 성령께서 이 열망을 채워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성령은 이 열망을 더욱 부추기신다. 성령께서도 “오라”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심어 주신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그리워하는 지를 깨닫게 한다. 신부는 자신의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 사랑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는 감춰 계셨던 신랑께서 나타나실 때 이루어진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감추어계심을 중단시키고, 감춰진 비밀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이 감춰계심을 의식하도록 돕는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시기에 성령께서도 이 감춰짐에 참여하신다. 우리는 성령을 다 이해할 수 없고, 규정하거나 임의로 조종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내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요 3:8). 그런데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예상과 다르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러하시니라”라는 말씀을 예상할 수 있으나,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라고 말씀하셨다. 곧 성령님 뿐만 아니라, 중생을 가져다 주시는 성령의 사역 또한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으며, 불가해하고 숨겨져 있다.[18] 이 또한 믿음의 큰 비밀이다.

    승천의 비밀, 승천으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감춰짐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강화된다.

    5. 우리도 감춰져 있다

    골로새서 3장 3절은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안에 감춰져 계시지 않고, 우리 또한 그러하다고 가르친다. “그와 함께”,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는 골로새서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표현이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12);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골 2:13);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랴” (골 2:20);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3-4).

    한스 뷔르허는 박사학위논문에서 이 표현들을 분석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사역에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폈다.[19]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에 참여한다. 이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관계이다. 과거적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장사되었다. 이는 그리스도인됨의 출발점이다. 현재적 관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고, 생명을 얻었고,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다. 미래적 관점에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을 고대한다. 다른 서신들과 비교하여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구속의 현재적 실재를 강조한다. 이는 세상의 권세들에 대한 두려움을 의심할 여지없이 깨뜨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구속의 현재적 실재성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음도 포함한다.[20] 새 생명은 실재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고, 그와 함께 살아 있다. 또한 에베소서 2장 6절이 가르쳐 주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승천에도 참여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분의 감춰짐에도 참여하고 있다. 곧 우리의 참된 존재에 대한 진리도 구름으로 감춰져 있기에, 우리의 인지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는 우리의 참 생명의 근원과 그 실재는 논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참 생명은 숨겨져 있다.[21] 우리는 오직 믿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골로새서 3장 2절의 말씀을 따라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바라본다. 이것은 이 땅의 것이나 세속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 자신 안에서 확신을 찾으려는 것에 대한 경고이다.“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 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골 2:21-22) 우리는 땅의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 우리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감춰져 있다.

    이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감춰져 있는 참 생명은 비밀 이기에 다른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으며, 우리 자신도 오직 믿음으로만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행위, 중생의 경험, 혹은 성령 세례 등으로 이 숨겨져 있는 비밀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를 통해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주님을 믿는 믿음 외에 그 어떤 다른 확신을 발견할 수 없으며, 주님의 성령 외에 다른 누구를 의지할 수 없음을 배운다.

    한 가지 더 있다. 감춰 진 것은 안전하게 보호 된다. 비밀은 안전하다. 감춰진 것은 공격 받지 않는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 보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19-21).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4절에서 훈육한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의 참된 보물, 곧 영생은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다. 감춰져 있기에 온전히 안전하다. 그곳에 우리의 마음을 두자 (요일 3:2)

    6. 결론

    이 강연을 시작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시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기독론의 특징인 비밀스럽게 감춰짐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인가? 이제 답을 할 때이다. 지금까지 살펴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춰져 계신 것은 승천의 결과다.

    나는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한 4가지 측면을 제시하였다: 역사적, 인식론적, 인격적, 그리고 신학적 측면이다. 승천은 특히 인식론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과 관련있다. 인식론적 측면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지능력의 한계를 넘어 더이상 볼 수 없는 하늘로 올리워지셨다.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계시로 인한 것이며 믿음으로 인한 것이다. 신학적 측면에서 그리스도는 구름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올리워지셨다. 주님은 하나님 안으로 감춰 지셨다.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다 파악하고 규정 하려는 다양한 기독론적 노력은 하나의 접근방식에 불과하다. 신학적 노력이 상호 모순적인 도식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당혹스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스도의 실재 자체는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실재는 우리의 이해와 인지능력의 한계를 넘어 있다. 또한 다양한 기독론적 접근방식이 가능 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당혹스러워 하지 않아도 된다. 다양한 방식의 지도투영법이 상이한 결과물을 만들듯이, 모든 기독론 또한 그러하다.

    경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일체성,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등의 교의들이 바로 그 경계이다. 그러나 이 경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하다.

    기독론은 신학의 핵심이다.[22]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하신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의 신학이 늘 결함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승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접근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이 원천으로부터 마시고 즐긴다. 그러나 이 원천을 헤아리거나 좌지우지 할 수 없다. 신학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우리는 늘 인간적인 개념의 언저리에서 더듬 더듬 말할 뿐이다.

    이는 신학의 보편성과 관련이 있다. 기독론은 교회사의 심각한 교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교회들은 기독론적 문제로 인해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배척하였다.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는 자들과 단성론자들은 공교회로부터 쫓겨 났다. 1054년의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교의학적으로 필리오케에 대한 논쟁, 곧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에 대한 논쟁과 관련있다. 종교개혁 때도 루터파와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이견으로 논쟁하였다. 기독론적 정식들의 한계를 인식하는 자는 차이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 있는 진리는 구름으로 인하여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러기에 그 진리 자체는 교리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모든 기독론적 논쟁들이 불필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쟁점이 무엇이며 그 쟁점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쟁점의 최종적 결론은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시고, 우리 또한 영광 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때 주어질 것이다. 우리의 참 생명이시고 진리이시며 기쁨이신 그리스도만이 영원 하시다!




 

[1] 이 단어는 본 은퇴강연의 주제이다. 네덜란드어로 “verborgenheid”인데, 이는 “감춰짐” 혹은 “감춰진 비밀”으로 번역 될 수 있다. 이 단어는 골로새서 3장 3절에 나타난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강연제목 또한 골로새서 3장 3절과 관련있다. 하지만 이 단어를 문맥에 맞도록 번역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골로새서 3장 3절을 따라 번역한다면 “감춰짐”이라는 어색한 번역을 선택해야 하는데, 이것이 Kamphuis교수가 의도하는 바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번역자는 이 단어를 “감춰짐” 외에 “비밀” 혹은 “비밀스럽게 감춰짐”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2] L.J. van den Brom, God alomtegenwoordig (Dissertationes neerlandicae. Series theologie 7), Kampen, Kok 1982, 231.

[3] Simon J. Kistemaker, Exposition of the Acts of the Apostles (New Testament Commentary), Grand Rapids, Mi.:Baker 1990, 55.

[4] Ioannis Calvini, Commentari in Acta Apostolorum (CO 48), 12.

[5] Daar liegt de breuk. 각주에 넣자. 전환점, 기존 틀이 깨어지는.

[6] Michael S. Horton, Lord and Servant. A Covenant Christ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5, 258; B. Kamphuis 부분에서 H. Bavinck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바빙크는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사이의 변증법과 믿음의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Gereformeerde dogmatiek 3, Kampen: Kok 1967, 427).

[7] Vgl. Oliver O’Donovan, The Desire of the Nations. Rediscovering the roots of political theology, Cambridg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146.

[8] Dolf T. te Velde, Paths beyond tracing out: The connection of Method and Content in the Doctrine of God, Examined in Reformed Orthodoxy, Karl Barth, and the Utrecht School, Delft Eburon 2010.

[9] Herman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2, Kampen: Kok, 1967, 1.

[10] Herman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2, 25.

[11] James Anderson, Paradox in Christian Theology. An Analysis of its Presence, Character, and Epistemic Status, Milton Keynes, UK/Waynesboro, GA: Paternoster 2007 (Paternoster Theological Monographs), 80.

[12] James Anderson, Paradox, 222vv.

[13] James Anderson, Paradox, 231.

[14] Oliver Crisp, Revisioning Christology. Theolog in the Reformed Tradition, Farnham (etc.). Ash gate 2011, 9.

[15] Dietrich Bonhoeffer, Berlin 1932-1933 (Dietrich Bonhoeffer Werke 12, ed. Carsten Nicolaisen e.a.), Gütersloh: Kaiser 1997, 282-285.

[16] P.H.R. van Houwelingen, Johannes. Het evangelie van het Woord (CNT 3), Kampen: Kok, 1997, 300.

[17] Michael S. Horton, People and Place. A Covenant Ecclesiology,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8, 22.

[18] A. van de Beek, God doet recht. Eschatologie als Christologie, Zoetermeer: Meinema 2008, 161.

[19] Hans Burger, Being in Christ. A biblical systematic investigation in a reformed perspective, Eugene Oregon: Wipe & Stock 2008, 213-224.

[20] B. Kamphuis 대목에서 Karl Barth 그리스도의 배타성에 대한 강조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다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 4/3/2, Zollikon-Zürich: Evangelischer Verlag, 1959, 864).

[21] Peter O’Brien, Colossians, 171.

[22] A. van de Beek, Jesus Kurios, De Christologie als hart van de theologie (Spreken over God 1.1), Kampen, Kok,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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