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가복음에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막11:32-42).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일컬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 누가가 누가복음 11장에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치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여’라는 호칭으로 부른 것은 마가복음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과 같은 의미라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경우가 거의 드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출애굽기4:22-23)’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탕을 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런 하나님께 대한 부름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로마서8:15-16)’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성령께서 증거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와 하나님과 나의 관계와 같아졌다는 말이다(갈라디아서4:6참조). 하나님을 아빠 혹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강조된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알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가도할 것을 가르치신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만 가능한 특권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만들어졌음을 확실히 한다. 그 증거로 제시된 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불교나 힌두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내재성에만 근거한 범신론적 생각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닐뿐더러, 유대교나 이슬람처럼 하나님의 초월성에서만 근거한 능력과 권능은 있지만 그의 백성들에게 무관심한 이실론적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섬세하게 역사하시고, 우리의 삶을 오른 길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2. 따라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한다는 말이 된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통해 나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었음을 믿는다는 고백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아담처럼 자신의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요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이기는 이김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자녀들이 아빠를 의지하며 살아가듯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신앙적인 결단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고백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가운데 있다는 말이고, 그 관계의 바탕은 ‘서로에 대한 앎’에 있다. 연구하고 분석해서 아는 앎이 아니라 듣고 순종함으로 삶에서 하나님을 알고, 나 역시 하나님께서 알아주심으로 나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3. 이사야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데 실패했음을 지적하신다. 심지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이사야1:3)’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데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사야1:5-6)’인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이스라엘 사람들의‘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7절)’하게 되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던지는 상황은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위기 가운데 상태였고, 결국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나 그리고 우리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서로의 관계 가운데서 나오는 앎을 이해하는데 실패한다면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비참한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로 인해,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삶의 정황을 맞이하게 된다. 즉,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아빠라고 부름으로써 우리의 삶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빠와 자녀로서의 관계이고,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우리는 요즘 특별히 기도하고 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나와 친밀하지만 능력 없는 내가 만들어낸 신이나 능력이 많은 초월해 있음에도 나와는 전혀 관계를 맺지 않는 그런 신이 아니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온 세상을 만드신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일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주신 나와 아주 친밀한 아빠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기도하는 또 한주간을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