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주차(말6). 십일조 정신
(본문) 3:7~1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 다섯 번째 설교
말라기 선지자는 오늘 설교를 통해 유다 백성들이 불행을 겪는 원인과 해결책을 밝히고 있습니다. 먼저 불행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농사는 메뚜기 떼나 병충해로 인해 엉망이 되었고, 포도열매는 시들시들해서 수확도 하기 전에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열심히 일을 했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아 근심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원인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냥 재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후가 좋지 않고 병충해가 들끓어 농사가 망했다고 신세 한탄을 합니다.
- 이렇게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면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모든 일의 주권자이심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믿으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영적으로 가려지면 영적인 일이 느껴지지 않게 됩니다.
- 마치 코감기가 걸리면 코가 마비되어 냄새를 잘 맡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젠가 이빨치료를 위해 치과병원에서 이빨을 치료받기 위해 마취주사를 맞고 물 한잔을 마셔보았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감각이 없으니까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그냥 침 흘리듯이 주르르 입 밖으로 새는 것입니다.
- 이렇게 무감각이 무서운 것입니다. 무감각해지면 결국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분별이 아니 됩니다. 사람이 분별력을 잃으면 자꾸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옛날 미국 프로야구 시합 때에 안타를 친 선수가 갑자기 거꾸로 그라운드를 달리다 아웃되는 웃지 못할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선수는 밤에 병든 아내를 돌보다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시합에 임했다가 그만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유다의 백성들이 바로 이런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완전히 영적으로 무감각해지자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고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무감각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말라기 선지자는 모든 원인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어겼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그것은 곧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 곧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행의 원인인 십일조와 헌물을 잘 내면 다시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우리가 어떻게 주께로 돌아가는냐?’고 반문할 때 하나님은 간단하게 하나님이 정하신 영원한 규례인 십일조 문제를 꺼내들면서 이것을 지키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십일조(마아세르)와 헌물(맛타나)
십일조와 헌물은 원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위해, 그리고 고아와 과부들과 나그네들의 구제를 위해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입니다. 앞의 십일조는 모든 소득과 생산물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헌물이고 뒤의 헌물은 십일조 외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이자 영원한 규례(민18:23)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와 헌물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멸시하며 도적질하는 범죄행위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24:2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주었으므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24절)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7~29)
그러나 하나님은 십일조와 헌물이 의무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이것을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내라고 당부하십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그리고 이것을 내는 것을 곡식을 심는 것에 비유하시면서 되도록 많이 낼 것을 권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이렇게 하나님은 즐겨내고 많이 심는 자를 이렇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하려 하심이라”(8절)
“심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무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라”(10-11절
그런데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이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9절)
먼저, 하나님은 헌금을 내지 않는 것에 대해 ‘나의 것을 도적질했다‘라고 표현하시며 분노하십니다.
-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소유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만물에 대해 소유권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은 만물에 대해 주권을 행사하실 권한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인은 주인 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권을 가진 주인이십니다. 그 누구도 자신이 주인이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뜻 안에서 잠시 소유권을 위임받은 상태입니다. 이 사람을 일러 ’청지기‘라 부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고 하나님의 것을 지키고 보존하고 계승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받은 권리만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것을 맡았다가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 그런데 하나님은 다 돌려달라고 하시지 않고 10분의 1만 돌려달라고 하십니다. 이 자체가 은혜입니다. 특혜입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돈을 빌려주고서 10%만 달라고 합니까? 십일조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도적 중의 제일 큰 도적입니다. 100%를 다 갚는 것도 아니고 10분의 1만 갚으라고 함에도 그것마저 갚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양심의 화인을 맞은 자요, 철면피 중의 철면피요, 도적 중의 제일 큰 도적일 것입니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십일조를 강요하지 말라고 하고, 십일조에 대한 다른 해석을 시도하고, 십일조가 마치 개인적인 선택사항인 것처럼 호도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규례를 파괴하고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정말 회개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도적질한 자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일개 사람의 저주도 무서운 법인데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면 그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 ‘저주’는 히브리어로 ‘칼랄라’입니다. 이것은 ‘가볍게 여기다’ 혹은 신임하지 않다‘라는 뜻의 ’카랄‘에서 유래했는데,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게 되었다는 듯을 내포합니다. 저주 받은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진멸당합니다. 히) ’아칼‘은 ’굶주린 자가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다‘는 뜻인데 하나님은 저주 받은 자를 남김없이 싹쓸이하십니다. ’솨마드‘는 황페케 된다’는 뜻인데 저주 받은 자는 병과 칼에 의해 완전히 괴멸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저주받은 자는 ‘파라크’되는 데 이것은 ‘산산조각이 난다’는 뜻입니다.
- 한 마디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도 죄를 지으면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결코 저주를 받지는 않습니다. 최고의 벌이라 해도 ‘징계’정도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로는 ‘무사르’가 있습니다. 이는 잘못한 자를 책망하는 것인데 주로 ‘사랑의 책망’(욥20:3)이나, ‘교훈 혹은 훈계’(욥36:10)에 헤당하고, 또 하나는 ‘야싸르’가 있는데 이는 ‘부모가 아이의 잘못에 대해 매질하여 가르친다’는 것으로 일종의 ‘사랑의 채찍’에 해당합니다.
- 반면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최고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 등 헌금을 내지 않는 자는 도적질 하는 자이고, 이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헌금의 문제가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임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3.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지금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주를 언급한 것은 경고입니다. - 말라기 선지자는 저주를 단행하기 위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 다는 것을 경고하는 사자입니다. 이 경고는 하나님의 요청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이라도 유다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7절)고 요청하십니다. 지금이라도 규례를 지킨다면 다 용서하고 오히려 축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 여기서 ‘돌아오라’는 히브리어로 ‘슈브’입니다. 이는 ‘가던 길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완전히 뒤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는 ‘철저히 회개하고 잘못된 삶의 방향을 온전히 전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진정한 회개는 완전한 개과천선을 뜻합니다. 일부분만 돌아서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반성입니다. 반성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마음 뿐 아니라 행동으로도 완전히 달라진 것을 뜻합니다. 말로만 충성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고 쉽지 않기에 성령님에게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돌아가리이까?” 라고 묻습니다.
- 이 질문의 저의가 무엇입니까? 정말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방법을 몰라서 이렇게 묻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짐짓 자신들의 죄악을 숨기고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모르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겠다는 말없는 선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유대인들 사이에 점점 반 십일조 문화가 퍼져나갔습니다. 너도나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악은 이처럼 빠른 속도로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장악합니다.
- 우리 속담에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이어트를 예로 들면 살을 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잠시 방심하면 금방 살이 찌고 맙니다. 악은 선을 쉽게 이깁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쉽게 사는 방법은 ‘내 좋을 대로’ 사는 것입니다. 옆 사람이 죽든지 살든지 관심 없이 오직 나를 위해 살면 정말 편합니다. 이런 사람의 눈에는 오직 돈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으면 부자가 됩니다. 부자로 살면 모든 것을 얻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돈을 버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돈벌이가 되지 않으면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내 돈 가지고 내가 즐기겠다는데 뭐 잘못되었냐고 반문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부 어쩌고 하는 것은 바위에게 차렷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우이독경).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정신 이상자로 여겨집니다.
- 그러나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악인이라 말합니다. 이런 악인들의 말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악인들의 인생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시1:4)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1:6)고 말씀하십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은 사막에다 집을 짓고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산에 소나무가 한 그루만 있다고 치면 그 소나무는 말라 죽습니다. 피조물은 하나님 없이 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근원이기에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진 조재는 다 말라 죽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생명수를 공급받지 못합니다. 기름이 떨어지면 자동차는 멈춥니다. 악인은 더 이상 기름이 공급되지 않으며, 기름이 떨어지면 멈추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입니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양심적으로 화인을 맞았습니다. 양심이 죽었다는 것은 영적인 생명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나님에게 시치미를 떼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하고 능청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내 규례를 어겼다, 그러므로 내게로 돌아오라”고 하신 것은 “너희가 영원한 규례인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했지만 내게로 돌아오면 내가 용서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다시 받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시는 규례를 어기지 않고 하나님과 함게 기쁘고 즐겁게 잘 살겠습니다” 하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철면피 같은 이런 유대 백성들의 시치미와 능청스러움을 다 아시고 보면서도 그 방법을 다시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10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10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 먼저,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분부하십니다. ‘나의 집’은 예루살렘 성전‘을 뜻하고 ’양식‘은 온전한 십일조입니다. 이 십일조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한 양식입니다.
- 느헤미야 총독의 때에도 레위인들과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들이 양식을 공급받지 못해 흩어진 사례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전이 버림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느헤미야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다시 곳간에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채웁니다.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내가 모든 민장들을 꾸짖어 이르기를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하고 곧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느13:10~12)
- 다음으로, 하나님은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문법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가정법이 아니라 현재명령형으로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시험하면’이라는 조건부가 아니라 ‘시험하여’라는 실행명령을 내리십니다. 이것의 의미는 시험하는 것이 조건부라면 선택사항이 됩니다. 시험하면 복을 주고, 시험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는 차원이 됩니다. 그러나 ‘시험하여’는 ‘시험하라’는 명령입니다.
-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정리하면, 십일조의 문제가 시험이라는 것과 연결되는 것은 십일조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축복이 보장되어 있다는 강력한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하여 하늘 문을 통해 주어지는 하늘의 복을 다 받으라고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권 추첨식으로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당첨되는 사람에게만 상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은 조건부가 아니라 당연히 시험해서 복을 누려야 하는 의무이자 권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모든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구하기만 하면 주시고 찾기만 하면 찾아주시고 두드리면 하늘 문이 열리도록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11절과 12절의 아름다운 축복의 약속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 11절에서 토지의 소산이 풍성할 것입니다. 포도나무 열매가 풍성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농사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모든 산업, 모든 일을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 또 12절에서 너희 땅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십니다. 땅은 삶의 기반입니다. 땅이 기름지면 모든 작물이 풍성하듯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 모든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예수 잘 믿으니 복 받는구나’하는 소리가 들려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올해 다르고 내년 다르게 성장하고 풍성해져야 합니다. 만약 그런 성장이 보이지 않으면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역사로 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뜻을 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 식대로 살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하늘 문을 닫으시고 당신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4. 결론- 십일조 정신이란?
첫째, 하나님이 제정하신 영원한 규례로서 성도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 요즘 한국교회 안에 십일조에 대해 딴소리를 하는 무리가 있는데 그들의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결과적으로 그런 주장이 교회를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만 십일조의 오용과 남용에 대한 비판을 한국교회는 겸허히 들러야 합니다. 십일조는 교회건축비나 기타 재산증식의 용도롤 쓰여져선 안 됩니다. 오직 주의 종들과 가난한 이웃의 구제를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한국교회가 인색하다는 평가를 겸허히 듣고 즉시 고쳐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발적인 의무이행을 바라십니다.
- 의무를 이행하는 일은 대부분은 자신에게 무거운 짐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무를 회피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무를 기쁘게 수행할 것을 원하십니다. 헌금을 낸다는 것은 우선은 내 소득을 쪼개는 일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 소득이 줄어드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점을 주목하십니다. 하나님나라의 법칙은 역설적인 것에 있습니다. 당장은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유익이 되도록 역사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나라의 이 법칙을 깨닫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심는 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 이것은 두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결코 양으로 계량하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가짐이냐, 그 동기를 살피신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억지로, 내라 하니까 내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내는 가 내지 않는가를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 다음으로 충분히 많이 낼 수 있음에도 아까워서 적게 내는 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돈 쓰는 것이 아까답고 생각되면 얼른 회개해야 합니다. 돈은 사랑의 도구여야 합니다. 돈을 쓰는 것은 그냥 단순히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십일조와 헌금을 내는 자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나라에 대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니 잔머리 굴리지 말고, 요령 피우지 말고, 기회주의적으로 행하지 말고, 인색하게 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에게 받는 복은 우리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십일조와 헌물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고 믿고 행함으로서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진짜 복을 받고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넷째,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 하나님은 그분께 돌아오기 위해 많은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재산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십일조와 헌물을 다시 내는 것입니다. 100만원을 빌려주고서 10만원만 갚으라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형편이 어렵게 된 것은 이 최소한의 요구, 10만원도 갚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대한 배신이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행위입니다.
-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국민들이 최소한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나라의 기반이 흔들릴 것입니다.
다섯째, 십일조에는 ‘지금 저는 제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신앙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 십일조를 맨 처음 바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획득한 전리품의 10분의 1을 살렘의 대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바쳤습니다. 그것은 ‘이 승리가 나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라는 의미에서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 야곱은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치던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에는 ‘만약 살아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다면 그것은 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입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 모세 시대에는 십일조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무로 명문화시켰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백성이 자기 힘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고백하며 살도록 한 것입니다.
- 우리는 공부를 해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안요, 결혼을 하고 직장을 들어가고, 사업을 하고, 집을 구하고, 새 차를 구입해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선물은 내가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 십일조는 바로 그런 신앙의 고백이자 증거입니다. 이런 고백 위에 하나님은 축복을 주십니다.
사람이 인색해지면 모든 것이 메마르게 됩니다. 유대인들이 인색해지자 제사장들이 사라지고, 제사장들이 사라지자 백성들의 죄가 드러나고,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르니까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나 하나쯤은 어떠랴?’는 생각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주범이 됨을 명심해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진짜 주인공이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시고 각자에게 주어진 의무를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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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48주차(말6). 십일조 정신 (아리엘 개혁교회) |작성자 아리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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