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친히 듣고 경험하십시오
믿음을 소유만 하지말고 여인을 따라 우물가 예수를 만나야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요 4:42)
이제 눈이 내리는 겨울이 성큼 다가 왔습니다. 멋진 코트 한 벌을 장만해 분위기를 내볼까? 아니면 주말에 멋진 여행을 떠날까? 어느 것이 좋을까요?
미국 코넬대학교 심리학과 토머스 길로비치 교수에 따르면 옷을 사는 것보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어떤 경험을 할 때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아이들,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대학 졸업 때까지 교육비가 얼마나 들어갈까요? 대략 3억 정도의 비용이 든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 돈을 주면 자녀들에게 큰 도움이 될 텐데 부모들은 그 돈으로 공부를 시킵니다. 경험을 시키는 것이지요. 경험을 구매하는 것입니다.
돈은 모아두면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10년이 가도 그대로입니다. 오히려 가치는 줄어 들 수 있습니다. 돈은 쓸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돈은 모으기 위해서 버는 것 아니라 쓰기 위해 버는 것입니다. 소유는 낡아지고, 경험은 빛나기 때문입니다.
의학박사이며, 정신과 의사인 오카다 다카시는 <나는 상처를 가진 채 어른이 되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애착의 끈’을 이야기 합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에게 자꾸 안기고 매달리려한답니다. 아무리 많은 영양을 섭취한다 해도 충분히 안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합니다. 자주 안겼던 아이는 응석꾸러기 같이 유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강인하고 다부지게 자라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이에게 가장 심각한 상황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애착의 대상이 없어지는 경우입니다. 사별이나 이별로 인해 더 이상 엄마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아이에게는 세상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는 마구 울어 댑니다. 엄마를 찾으며 슬픔과 분노를 터트립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서 엄마가 돌아오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겉으로는 우는 일이 없어집니다. 대신 풀이 죽어 어두운 표정으로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기력한 모습을 보입니다. 좋아하는 장난감을 손에 대지 않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식욕이 떨어지고 슬픔 속에 잠이 듭니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나면 엄마에 대한 기억은 봉인되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안정된 모습으로 생활하게 됩니다. 이것을 탈애착의 단계라 합니다. 생존을 위해 아이는 엄마를 향한 애착을 잘라버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을 지켜줘야 할 부모에게 학대를 받은 경우입니다. 부모를 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상반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력하고 나쁜 존재다’라는 죄 의식이나 자신을 부정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래서 깊이 상처받으면서도 부모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탓하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자신이 나쁜 아이라서 사랑해 주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자라서도 대인관계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고, 사람에게 쉽게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어릴 적 경험은 평생을 좌우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우물가 여인의 숨겨진 이야기를 우리는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슬픈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꿀 만큼 사람 관계가 어려운 사람입니다. 자신이 버렸는지, 아니면 버림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남편 다섯을 바꾸었다는 사실입니다.
관계가 어려운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집착합니다. 버림받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인생을 살면서 행복과 불행은 어디서 느끼게 되나요? 관계입니다. 좋은 관계에서 행복을 느끼고, 틀어진 관계에서 불행을 가져다줍니다. 우물가 여인에게는 이것이 고통입니다.
이런 상처를 안은 여자가 예수를 만납니다. 이처럼 슬픈 여인이 어느 날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생을 얻었습니다. 관계에 메마른 그녀는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직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남편 다섯이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남편이 아닌 기막힌 상태입니다. 여전히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달라졌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를 전합니다.
39절,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한 사람의 간증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경험을 통해 간증이 나오고, 그 간증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우물가에 계신 예수님을 청합니다. 자기들과 함께 유하자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동네에서 이틀을 그 사람들과 지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동네 사람들의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42절,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 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수가성 우물가 여인의 간증을 듣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친히 듣고”라고 합니다. 이제까지는 우물가 여자의 말을 들었지만 이제는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 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앎이라’는 지식적인 앎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친히 듣고 경험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여인을 통해 들었던 그 분을 직접 만났고, 그 분에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경험으로 더 깊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고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생각이 무너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랑거리들 소위 대단한 스펙들도 배설물이라고 합니다. (빌 3: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보십시오. 경험은 모든 이론을 뛰어 넘습니다. 경험은 모든 사상도 무너뜨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러 가던 삶의 행로가 바뀝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겼습니다.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신앙은 이론이 아닙니다. 경험입니다. 믿음을 소유만 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
이후로 우물가 여인은 더 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그 여인은 그 감격스런 순간을 가슴에 새기며 새로운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모든 슬픈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목표와 목적을 향해 걸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를 만난 경험은 새로운 길을 걷게 합니다. 당신을 무엇을 위해 살아갈 작정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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