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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에서 섭리의 교리

섭리

by 김경호 진실 2016. 5. 7.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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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에서 섭리의 교리를 나누어 봅니다!]

by 박동근

앞서,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 그분의 섭리

출애굽기 2:1-10

조직신학에서 섭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섭리는 창조주가 모든 그의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활동하시며, 만물을 그들의 지정된 목적으로 인도하시는 신적 에너지의 지속적인 실행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섭리는 그 요소로서 보존과 협력과 통치를 포함합니다. 섭리론에 따르면, 세상에 보존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용하시어 그 목적 가운데 이끌어 가시며, 모든 것들이 목적대로 되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으며,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련하고 좁고 제한적인 시야로 온 우주를 운행하시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하나님의 큰 손의 능력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대로, 우리의 감정과 판단대로 우리의 정황들과 사건들을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사건 넘어의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진정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깨어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분별하며, 또 알 수 없는 미래를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섭리가 무엇인지, 왜 성도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려 합니다.

1. 보존 : 우리는 구속의 백성, 특별히 소명자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 속에서 보게 됩니다.

모세는 이미 아는 대로 하나님께서 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택함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실 때 가문이나 외모나 인간적인 것을 보고 택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속한 그 어떤 이유나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이 구원에 관련된 것이든 소명에 관련된 것이든 하나님의 오로지 주권적인 기뻐하시는 뜻과 긍휼과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레위 가족 중 한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통해 태어났다고 가르칩니다. 구속 백성을 구속하는 대과업을 안고 태어난 모세는 야곱의 12아들 중에 보잘 것 없고 비천한 자 레위의 자손에서 태어났습니다. 레위는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을 때, 세겜에게 속한 족속들을 살육하므로 아버지에게 큰 근심과 문제거리가 된 아들입니다. 야곱이 죽기 전 아들들에게 예언과 축복의 말을 줄 때, 레위와 그 살육에 동참한 시므온은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듣게 됩니다. 그것이 창세기 49:5-7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민족적 지도자를 이처럼 비천한 레위의 계열에서 선택하셨고, 레위의 계열로서 아론의 계보에 속한 자들이 제사장 직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섭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와 같은 죄인들이, 그것도 이방인된 우리들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요 소명자들로 부름받은 사실은 놀랍고 기적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의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계획 그리고 긍휼 안에서 우리는 부름 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 주신 은혜 하나만으로도 우린 평생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름 받음을 우리 안에서 자랑할 데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께 부름 받을만한 가치가 발견될 수도 없고 발견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뜻에 따라 누군가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보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보존하시나, 특히 성도들과 소명자들을 특별한 섭리와 사랑으로 지키시고 보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핏덩이 같은 아기 모세는 한편으로는 바로 왕의 정책 때문에, 한편으로는 마귀의 의식적인 역사 속에서 그 생명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바로 왕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러한 악행을 저질렀으나, 사탄은 모세를 염두에 두고 바로 왕의 완악함과 그런 마음에서 흘러나온 정책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사탄이 구속 역사에서 큰 역할을 감당할 하나님의 사람을 몰라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치밀하고 집요한 바로 왕과 사탄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한 아기가 숨 쉬는 시간과 장소에서 무한한 지혜와 능력과 권능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자신의 뜻대로 굴러가도록 이끄셨습니다. 온갖 방해와 의도적이고 집요한 추적과 압박 속에서 어린 아이의 생명을 삼키려 바로 왕과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어린 먹이감을 향해 돌진 했으나 하나님의 섭리는 이 작고 무능한 아기를 자신의 품 안에 품고 지키셨습니다. 아기의 주변의 모든 사건과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이 아기를 품고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 아기를 보존하신 것일까요?

2. 협력 :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원하실 목적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수단들 속에서 역사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모세만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도 지금까지 몸과 영혼을 이처럼 부지하고 있는 사실을 감사할 줄 모릅니다. 그저 당연히 살아야 하기 때문에 살고 있는 줄 알고, 그저 우연히 이렇게 우리가 몸과 영혼을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리석게도 오묘한 기적과 같은 것에는 호기심과 집착을 가지면서도, 일상 속에서 이미 우리가 우연처럼 여기고 일상이라고 부른 시간들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오늘도 차를 몰고 오다가 반대편에서 돌진하는 차량의 운전자가 정신을 순간적으로 잃어 우리 차를 덮칠 수도 있었습니다. 공사장을 지나다가 공사장 벽돌 하나가 떨어져 우리의 두개골을 쪼갤 수도 있었습니다. 어제 무심코 뽑은 코털 하나가 문제를 일으켜 뇌막염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암, 폐렴, 신종바이러스, 신부전증 등 수많은 병마들은 사람을 가려 찾아오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멀쩡이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큰 사고와 질병을 앓은 적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정도 병마로 숨을 거두기도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 것일까요? 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배신하고 이단에 빠지고 세상 쾌락에 넘어가 교회도 버리고 하나님도 버리고 주를 등지고 배교하건만 우리들은 여전히 주 앞에 나올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섭리, 곧 그분의 보존하시는 은혜를 인해서 우리의 몸과 영혼은 지금 이렇게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기적이 아닙니까? 주님께서 나의 몸과 영혼을 보존하시고 있다니, 그 큰 손, 사랑의 손, 권능의 손이 지금 이곳에서 이 못난 나를 붙들고 있다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요?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선택받고, 믿음 안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심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 일들 속에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을 보존시켜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우연한 것들이 하나님께는 필연적이십니다. 우리 주위에 우연처럼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사건들 속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자신의 뜻대로 모든 일들을 허락하시고 운행하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어떤 본문보다 이 하나님의 섭리, 곧 협력을 잘 보여줍니다.

바로 왕과 사탄은 검고 포악한 센 손으로 모세의 목을 졸라왔지만, 하나님께서는 모세 주변의 모든 환경을 통해 신속히 역사하셨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모세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한계에 부딪혔고, 더 이상 집에 아이를 숨겼다가는 아이도 자신들도 모두 몰살 당할 위험에 처했을 때, 앞에 일어날 일을 알지 못했지만, 한계에 부딪힌 자가 최후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그러나 지극히 초라한 조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의 초라한 조처를 사용해 모세를 보존하셨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사람의 손가락 굵기의 세모난 모양의 줄기로 갈상자를 만들고 그것에 역청과 나무진을 발라 아기를 그곳에 넣었습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상자였지만, 이 상자는 바로의 공주로 말미암아 건짐을 받기까지 아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8명의 구속백성을 보호하였다면, 이 갈상자야 말로 아기 모세의 방주였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통해 그 백성을 구속하시듯, 갈상자 방주가 모세를 구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갈상자, 부모로서 한계에 부딪혀 마지막 최선의 행위 속에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셨습니다.

나일강 강 가 갈대숲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장소였습니다. 바로의 공주는 아마도 종교의식의 하나로 신성시 여기는 나일강에 나와 목욕을 하려 했을 것입니다. 절묘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바로 왕(투트모스 I 세)의 딸을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손길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방법을 인간이 예측하고 한계 지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원수의 손을 통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기를 발견한 바로 공주는 시녀들을 통해 갈상자를 건져내었고, 그 안에 아기를 보았습니다. 권력자의 딸 바로 공주가 이 보잘 것 없는 노예 민족의 아이를 업신여기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바로의 딸은 아이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 바로의 공주의 마음에 긍휼이 넘쳐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냉담한 감정을 느꼈다면 모세의 숨통은 끊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긴 세월이 지난 후 자신을 속인 야곱에 대해 긍휼의 마음을 주셨 듯, 바로의 딸에게 긍휼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시어 자신의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모세의 누이는 어떠했습니까? 버려진 아기를 등지고 속히 자리를 뜨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누이는 멀리서 바라보았고, 아기가 공주의 긍휼을 받고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누이는 담대히 다가가 마치 모르는 아이인 것처럼 행동하며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보살 필 유모를 소개합니다.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고 바로 바로 공주의 품에 안긴 모세의 친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이렇게 보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주변의 모든 사건과 환경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보존되었습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이유도 조건도 없는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사랑으로 택하고 부르신 자를 보존하셨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한계에 부딪혀 아이를 갈상자에 넣어 버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 한계에 부딪혀 통곡하며 아이를 나일강에 버릴 수밖에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상황들을 사용하여 모세를 지키셨습니다. 섭리는 그처럼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권능과 지혜로,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네 삶과 생의 한 가운데에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우리는 함부로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환경과 주변의 사람들과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함부로 속단해서도 안 됩니다. 단지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앞에 가장 합당한 말과 행동을 하며 주님의 역사를 바라보고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적 의지에 따라 경건과 율법에 합당한 행동과 말을 하고, 모든 일의 결과와 성취는 하나님의 작정적 의지에 맡긴 체 그의 처사를 신뢰속에서, 의지함 속에서 맡기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의무는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이고, 일의 성취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고 교훈합니다. 우리는 믿고 주어진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언제나 무서운 무기는 약속입니다. 택한 자를, 소명 받은 자를 보존하신다는 약속 말입니다. 모든 환경과 사람과 사건들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말입니다. 섭리 신앙 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며,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3.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한 섭리를 기대할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선한 섭리로 역사하실 까요? 우리가 진정한 교회의 참된 회원이요, 언약 백성이라면 이런 설레이는 기대를 해도 될 것입니다. 모세는 단지 한 개인으로서만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한 아이만을 위해 이런 자비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한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더 멀리는 온 인류에 흩어진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위해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한 지체가 됨의 복됨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한 지체요 소명자로서 서 있는 모든 개인들을 세상의 온갖 유혹과 세파 속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의 지체이며, 교회를 향한 목적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위해 자비를 베푸시지만, 멀리는 그가 속한 교회를 위해 자비를 베푸시며, 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비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생활하는 각 개인들의 삶의 복됨이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것일까요? 우리가 교회의 한 지체라는 사실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여 교회의 지체로 삼으시기도 하였지만, 우리가 교회의 지체라는 이유로 교회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개인을 지키십니다. 교회의 넘어짐은 지체로서 나의 넘어짐이며, 나의 넘어짐은 교회의 넘어짐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택하시고 믿음으로 택함받음을 확증받은 성도들을 섭리 가운데 보존하십니다. 교리가 가르치는 섭리의 세 요소는 성경적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보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보존하시되 성도들의 생의 한 가운데 모든 사건, 관계, 사람, 환경을 통해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성도를 보존하시므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성도들의 삶을 이끌고 통치해 가십니다.

이 섭리의 역사를 오늘 출애굽기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증거하십니다. 섭리를 믿지 않는 성도는, 의심하는 성도는 결코 어둠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죄와 시험과 역경이 많은 세상에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섭리가 발견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송도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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