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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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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진실 2016. 6. 20.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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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순종

 

오늘 강의의 주제는 사랑과 순종입니다.

첫 번째 주제는 성도간의 사랑입니다.

 

비밀하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사소한 일에 비밀이란 말을 쓰지는 않죠.

비밀하면 무엇인가 중요한 일에 대한 것이라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34절 찾아봅시다. 에베소서 3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내용을 암시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죠.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을 읽으면에서 이것은 에베소서 2장입니다.

에베소서 2장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에베소서 214절 봅시다. 에베소서 21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 말씀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에서 둘이 누구일까요?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는 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유대인의 역사는 약 2천년 정도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2천년 동안 선민의식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2천년 동안 하나님의 택함 받은 민족이라는 우월의식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사마리아는 BC 870년 북이스라엘의 건설과 함께 북이스라엘의 수도지역으로 번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는 BC 720년에 북이스라엘을 침공한 앗시리아에 의해

700년간을 혼혈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대화는커녕 길에서 마주치는 것도 부정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먼길을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사마리아 지역을 일부러

돌아서 가는게 그들만의 순수성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이방인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어디에서 하나가 될까요?

에베소서 216절 전반부에 답이 나옵니다.

에베소서 216절을 보면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여기에서 한 몸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 몸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과 이방인이 교회에서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시기 위해

어떤 일을 하시나요?

에베소서 214절 후반부 봅시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여기에 있는 중간에 막힌 담은 성전에 있는 담을 상징합니다.

성전에는 담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방인의 뜰에 있어야 하며 성전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던 담을

허무셨습니다.

이제는 이방인들도 성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던 담을 허무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큰 나무를 잘라보면 나이테가 보이고

나이테를 보면 나무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탄방교회가 설립된 지 36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36년 동안 탄방교회에 좋은 일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어려움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탄방교회 안에 막힌 담이 생겼을 것입니다.

 

2천년 전에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탄방교회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탄방교회 안에 막힌 담을 허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탄방교회 안에 있는 둘을

하나로 만들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탄방교회 안에 있는 막힌 담을 허무시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탄방교회 안에 있는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탄방교회 안에 있는 둘을 하나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면

역시 우리 하나님은 위대하시구나하고 감탄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잘하려면 겸손한 마음과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잘 합니다.

반면에 겸손하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합니다.

 

큰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잘 합니다.

반면에 작은 믿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해도

온전한 순종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창세기 21617절 찾아봅시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령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성경공부를 하는데 어떤 청년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드셨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지 않으셨으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텐데요.”

 

답변하기가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215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통치하라고 하십니다.

 

통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통치를 아담에게 위임하십니다.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아담이 비록 통치 행위를 위임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과 아담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에서였습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다니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는 피조물이다.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창세기 35절에 사탄이 유혹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합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손종한 것입니다.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됩니다.

교만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출애굽할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약 이백만명이었습니다.

이백만명의 지도자가 되어 이백만명을 애굽으로부터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백만명의 지도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이라는 어려운 일의 지도자로 모세를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에서 어떻게 교만을 꺾으시고

겸손한 마음이 되도록 변화시키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출애굽기21112절을 봅시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모세는 애굽 왕의 궁전에서 자랐지만 자신이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세의 행동을 볼 때

모세 마음 안에는 교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갑니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면서 지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으로 도망 와서 처음에는 뿌듯한 마음으로 지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1124-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고통을 당하는데 모세 혼자 왕궁에서 편하게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뿌듯한 마음도 일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삼년이 지나고

사년이 지나고 오년이 지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면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사도행전72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

 

모세는 애굽 궁전에서 왕자로서 학술을 배워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일은 매우 단순한 일입니다.

양을 데리고 광야에 나가면 양들은 알아서 풀을 먹고 목자인 모세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운 똑똑한 모세가 매우 단순한 일인

양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매우 견디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왕궁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역동적인 생활입니다.

반면에 미디안 광야에서의 양치는 일은 단순한 일의 반복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단순한 일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통해서

보람이나 성취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어제 양치는 일이나 오늘 양치는 일이나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그렇게 일년이 가고 또 일년이 가고 십년이 흘렀는데도 모세의 생활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똑똑한 모세가 이렇게 단순한 일을 십년 동안 한다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모세는 자신이 바보가 되어가는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왕궁에서 배웠던 지식들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또 십년이 지나 이십년이 되었지만 모세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양치는 일에는 그렇게 머리 쓸 일이 없습니다.

양치는 일에는 그렇게 고도의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또 십년이 지나 삼십년이 되었지만 모세는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왕궁에서의 생활은 오래전의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왕궁에서 배웠던 지식들은 이제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또 십년이 지나 사십년이 되자

모세는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십년 동안 단순한 일을 반복하면서 모세는 겸손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온지 40년이 되는 해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십니다.

 

출애굽기 310절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출애굽기 311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모세가 대답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내가 누구관대의 의미는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궁에서 40년 동안 애굽 사람의 학술을 배우면서 교만해진

모세를 40년 동안 단순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으로 인도하심으로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좀 더 일찍 모세를 부르시지 않으셨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온지 10년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으면

모세가 무엇이라고 답변했을까요?

하나님 저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배웠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일을 잘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답변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온지 20년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으면

모세가 무엇이라고 답변했을까요?

하나님 제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조금 잊어버리긴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해 보겠습니다.”

라고 답변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온지 30년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으면

모세가 무엇이라고 답변했을까요?

하나님 제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많이 잊어버리긴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는 일을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라고 답변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40년 동안 애굽 사람의 학술을 배우면서 생긴 교만한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키는데 40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모세의 교만한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사는게 여유가 없을까?’

나는 왜 이렇게 사는게 힘들까?’

나는 왜 이렇게 형통하지 않을까?’

나는 왜 이렇게 단순한 일만 해야 하나?’

나는 왜 이렇게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일만 해야 하나?’

내 인생은 언제까지 이렇게 별볼일 없는 인생이어야 하나?’

도대체 왜 하나님은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으실까?’

도대체 왜 하나님은 나에게 좀 더 많은 것들을 주시지 않으실까?’

도대체 왜 하나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실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키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키시고 계십니다.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게 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키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만들어 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잘 하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이 필요하고

또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큰 믿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222절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은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명령에 순종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둘이 있는데요.

첫째는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고요.

둘째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통해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하늘의 뭇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명령과 서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어려운 명령에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어려운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라함이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큰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전에는 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반응과 연약한 반응을 번갈아 가면서 행합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처음부터 큰 믿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에서 믿음의 반응이 무엇인지

연약한 반응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723절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었다고 했는데요.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갈대아 우르가 아브라함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하시니까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믿음의 반응입니다.

 

창세기1131절 찾아봅시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친척을 떠나라고 명령하셨는데

아버지와 조카 롯과 함께 떠난 것은 연약한 반응입니다.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약 60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15년 정도 머뭅니다.

하란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 아닌데 하란에서 15년 동안 머문 것은

연약한 반응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살 때 고향을 떠나라고 첫 번째 명령하셨고요.

하란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죽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두 번째 명령하시는 말씀이

창세기 1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하란을 떠난 것은 믿음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하란을 떠날 때 조카 롯을 데리고 간 것은 연약한 반응입니다.

 

창세기 1210절을 봅시다.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가나안에 기근이 있다고 해서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연약한 반응입니다.

애굽에 내려가서 아브라함은 죽는 것이 두려워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바로가 사래를 취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셔서 막으십니다.

자기 목숨을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 한 것도 연약한 반응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갈을 통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제안하자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연약한 반응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아들을 낳게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1717절 아브라함의 반응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이라요 하고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창세기171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믿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사라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씀을 믿지 않은 것은 연약한 반응입니다.

 

창세기2012절 봅시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약 100세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여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의 꿈에 나타나셔서 경고하시며 사라를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애굽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했습니다.

25년이라는 세월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을 많이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100세에 똑같은 거짓말을 또 하는 아브라함을 볼 때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직도 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연약한 반응을 보면 우리의 모습과 참 많이 비슷합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있자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믿음으로 인내하기보다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쓰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애굽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자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위험이 닥치면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여종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얻으라고 하는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의 시간까지 기다리기보다 빨리 빨리 성과를 내고자 하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75세에 애굽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하였는데,

100세에 그랄 왕 아비멜렉에게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모습은

동일한 죄를 반복하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이 큰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있습니다.

 

사라는 90세에 이미 경수가 끊어졌습니다.

경수는 다른 말로 월경 또는 생리라고 합니다.

게다가 사라는 경수가 끊어지기 전에도 불임증이 있었습니다.

창세기1130절에는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잉태할 수 없는 사라가 잉태하고

아들을 낳는 것을 경험하면서

아브라함은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불임증이며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불임증이며 경수가 끊어진 사라가 잉태하고 아들을 낳는 것을 경험한

아브라함은 큰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실 때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큰 믿음을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떨 때는 믿음의 반응을 보이고,

또 어떨 때는 연약한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연약한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가 60세 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가 약 120세입니다.

아브라함이 첫 번째 명령을 받은 후에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에도 순종하기 까지 약 60년이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이 60세에 고향을 떠난 후에 아브라함은 너무나도 많이

연약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지 40년 만에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을 경험하게 하시고 큰 믿음을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명령에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연약한 반응을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작아서 연약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신실하게 역사하셔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큰 믿음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믿음이 큰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역사하시고

결국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키시고

우리의 작은 믿음을 큰 믿음으로 성장시키시며

결국 순종의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 아담은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겸손한 마음과 큰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순종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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