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

강의자료

by 김경호 진실 2015. 12. 7. 00:16

본문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

 

어떤 사람이 아버지 생신 선물로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가

건강식품을 사서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잘 먹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속으로 옷을 사주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 생신 선물로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가

옷을 사서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잘 입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속으로 날도 추워지는데 건강식품을 사 주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에 부모님과 자주 대화를 많이 하면

부모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지 알 수 있을 것이고,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선물을 사드리면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같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후 제자들과 같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십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내용이므로

오늘 본문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요17장2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뿐만 아니라 저희 말을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곧 우리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요17장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1절에는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라고 예수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22절에는 하나됨의 수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께서 하나가 된 것같이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은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탄방교회 성도들이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될 때 기뻐하십니다.

탄방교회 성도들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탄방교회 성도들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것들 중에 하나는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주일 11시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12시에 집에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학교 교사 회의를 하거나, 식당 봉사를 하거나, 교회 청소를 하거나,

남선교회 모임을 하거나, 여선교회 모임을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거나

교회 안의 여러 모임과 회의를 하는 중에

누군가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지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가 쉽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면 우리는 자꾸 그 순간이 생각이 납니다.

 

‘그분이 나에게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분이 그럴 분이 아닌데?’

‘나를 무시해서 그렇게 말했나?’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길래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

‘왠지 화가 나는군’

‘그분을 좋게 보았는데 이제 보니 영 아닌 거 같아’

‘왜 그렇게 말했냐고 따질까?’

‘장로님에게 이 일을 말할까?’

‘아니야 참아야 돼!’

‘그런데,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빠지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누군가가 자꾸 생각나면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 23절에서 28절까지 보면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이 나옵니다.

 

일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계산하기 쉽게 십만원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백 데나리온은 백 X 십만원 하면 천만원입니다.

 

일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일 달란트는 육천 X 십만원 하면 육억원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일만 X 육억원 하면 육조원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누군가가 자꾸 생각나면 이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저 집사님이 나에게 백 데나리온 만큼 잘못했어.

저 집사님은 나에게 천만원 만큼 잘못한거야.

하지만 나는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 만큼 잘못했어.

나는 하나님께 육조원 만큼 잘못한거야.

내가 하나님께 육조원을 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년에 일억원씩 저금한다고 하고

십년 저금하면 십억원, 백년 저금하면 백억원, 천년 저금하면 천억원

만년 저금하면 일조원, 육만년 저금하면 육조원을 저금할 수 있네.

일년에 일억원씨 육만년 저금하면 일만 달란트를 하나님께 갚을 수 있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육만년을 살 수 있지? 이것은 불가능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일년에 천억원 저금하면 육십년이면 육조원을 저금할 수 있어.

일년에 천억원을 저금하려면 대충 한달에 백억원을 저금해야 돼.

한달에 백억원을 어떻게 저금할 수 있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한달에 백억원을 저금할 수 있지?

이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내 힘으로는 일만 달란트를 갚을 수 없어.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만 달란트를 용서해 주셨어.

 

그러니까 나도 저 집사님이 나에게 천만원 만큼 잘못한 거 용서해야겠어.

천만원이란 돈은 작은 돈이 아니야.

하지만 천만원은 육조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이제 저 집사님이 나에게 잘못한 거 용서해야겠어’

 

예수님께서는 일 데나리온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백 데나리온 이라고 하셨습니다.

일 데나리온은 대략 십만원입니다.

십만원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삽니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은 천만원이니까 큰 돈입니다.

천만원은 대학생들 일년 등록금이고요.

중고등학생들 스마트폰 좋은 것으로 열 개 살 수 있고요.

주일학교 학생들 장난감 아이스크림 과자 엄청나게 사고도 남는 돈입니다.

 

우리 마음이 상한 정도가 천만원 정도니까 작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 받은 육조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말이나 행동이 자꾸 생각날 때마다

일만 달란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선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남편의 말이나 행동으로 마음을 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남편의 말이나 행동을 자꾸 생각하면 화병에 걸리게 됩니다.

화병에 걸리면 심장이 약해지고 뼈가 약해지고 소화가 안 되며 두통이 생깁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남편의 말이나 행동이 생각날 때마다

일만 달란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은 나에게 천만원 만큼 잘못했어.

하지만 나는 하나님에게 육조원 만큼 잘못했어.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나 되는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나도 남편의 잘못을 용서해야겠어.’

 

남선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아내의 말이나 행동으로 마음을 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아내의 말이나 행동을 자꾸 생각하면 혈압이 올라가게 됩니다.

혈압이 올라가면 뒷목이 뻣뻣해지고 잠도 잘 오지 않고

회사에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아내의 말이나 행동이 생각날 때마다

일만 달란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내는 나에게 천만원 만큼 잘못했어.

하지만 나는 하나님에게 육조원만큼 잘못했어.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나 되는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나도 아내의 잘못을 용서해야겠어.’

 

청년, 중고등부, 주일학교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의 말로 마음을 상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부모님께서 다른 집 자녀들과 비교하는 말을 할 때 마음이 매우 상할 것입니다.

‘다른 집 애들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다른 집 애들은 좋은 대학에 입학하는데 너는 공부를 한거냐 안한거냐?’

‘다른 집 애들은 공부도 잘 하는데 너는 왜 맨날 놀기만 하냐?’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부모님의 말을 자꾸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책상에 앉아도 공부가 되지 않고, 집중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부모님의 말이 생각날 때마다

일만 달란트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천만원 만큼 잘못하셨어.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육조원이나 되는 죄를 용서해 주셨어.

육조원은 정말 엄청나게 큰 돈이야.

이제 나에게 심한 말을 하신 부모님을 용서해야겠어.’

 

성도 여러분!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예기치 않게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상처를 받으면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용서를 해야지 하고 마음먹어도 용서가 잘 되지 않습니다.

상처를 받으면 마음이 아파서 아픈 감정이 계속해서 느껴지게 됩니다.

아픈 감정이 계속 느껴지면 부정적이 생각이 나고

마음의 평안이 사라집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생활을 하다가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게 되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아픔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가룟 유다가 군대를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오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여행하면서 예수님의 설교도 많이 듣고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위기의 순간이 오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상처로 인해 마음이 아플 때에 여러분의 아픈 마음에 집중하지 마시고,

예수님계서 잡히실 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눅22:61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아플 때, 여러분의 아픈 마음에 집중하지 마시고,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라고 말한

베드로를 돌이켜서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 백성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히신 이후에 빌라도가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라고 질문했을 때

예루살렘 백성들은 소리 지르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아플 때, 여러분의 아픈 마음에 집중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소리를 듣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 참기 힘든 아픔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할 때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망신을 주면 수치심을 느끼게 되며

그런 모욕감을 준 사람에 대해서는 용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렇게 모욕감을 준 사람에 대해서는 미운 마음을 넘어 적개심을 갖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을 때, 그래서 수치심을 느낄 때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릴 때

천으로 하체를 가린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림 속의 모습과 같이 천으로 하체를 가린 채 십자가에 달리셨을까요?

 

요한복음 19장 23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다 같이 읽겠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속옷은 제비를 뽑아 가졌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취하고 속옷도 취하였으므로

예수님은 벌거벗김을 당한채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장 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벌거벗김을 당한채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4절을 다같이 읽어 봅시다. 시작.

 

시편 22편 18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예수님께서 속옷을 입고 십자가에 달리셨으면 어떨까요?

히브리서 9:22절에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속옷을 입으셔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속옷을 입으셔도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속옷까지 벗김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달리심은 우리의 수치도 담당하신 거 아닐까요?

 

창세기 2장25절에는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이후에 몸이 벗을 줄을 알고 부끄러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십자가 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 6시간 동안 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무 옷도 입지 않고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수치심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가지고 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수치심을 예수님께 드리십시오.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여러분에게 입혀주신 의의 옷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모욕감을 준 누군가를 이제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생활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오면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고 다시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교회 생활은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다 예기치 않게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상처를 받는 경우도 있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아프게 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복수를 하면 안 되니까 참게 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단지 참기만 한다면 미운 감정이 무관심으로 변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관심한 마음은

성도의 하나됨을 방해하는 원인이 됩니다.

 

여러분의 무관심한 마음이 사랑의 마음으로 변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하고 계십니다.

성령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무관심한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보이지 않아서 한 달 전에 그 청년에게 ‘잘 지내시나요?’ 하고

카톡을 보냈습니다.

그 청년은 교회를 옮겼다고 대답했습니다.

교회를 옮긴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청년은 관계의 어려움이 있어서 다른 교회로 옮겼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와 관계가 어려울 때,

일만 달란트를 생각하시고,

십자가에서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시고,

성령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십일조를 백만원 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탄방교회가 천명 모이기를 원하십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이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 되신 것 같이

우리가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벌거벗긴 채로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이 사람은 절대 용서 못해요’ 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

이제는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728x90

'강의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과 순종  (0) 2016.06.20
요한계시록  (0) 2016.06.06
유럽교회와 한국교회  (0) 2015.09.07
광야  (0) 2015.06.07
교회선택기준  (0) 2015.03.0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