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섬에 여전히 살아 숨쉬는 순교정신
제주 복음화의 샘물 성내교회 비롯, 이기풍 이도종 목사·조봉호 선생 발걸음 곳곳에
제주 선교의 개척자 이기풍 목사, 제주를 대표하는 항일 애국지사 조봉호, 제주 출신 최초의 목사 이도종 목사. 세 사람의 첫 만남은 애월읍 금성리의 작은 기도처에서 시작됐다.
이기풍 목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최초의 한국인 목사 7인 중 한 사람이다. 선교사의 직함을 부여받은 그의 첫 부임지는 당시만 해도 복음의 불모지나 다름없다고 알려졌던 제주도였다.
▲ 사라봉공원에는 기독인 애국지사 조봉호 선생을 추모하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있던 한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림읍 귀덕리 출신으로 경신 숭실학교에서 수학하며 그리스도를 만난 후, 선교와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조봉호 선생이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개척한 금성교회에는 눈에 띄는 젊은이 하나가 있었다. 바로 이 마을 출신의 청년 이도종이었다. 믿음의 스승이자 선배 두 사람으로부터 받은 감화는 자연스럽게 평생 그들의 뒤를 따르는 길로 이어졌고, 결국 세 명 모두 이 땅에 자랑스러운 이름을 남긴다.
총회출판부장을 지내고 제주선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제주교회사> 발간의 공로자인 박창건 목사(동홍교회)가 동행자로 나선 이번 여행은 제주 성내교회(강연홍 목사)에서 시작한다. 사실상 제주 곳곳에 복음의 샘물이 흘러가도록 발원지 역할을 했던 이곳에는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비와 이기풍 목사의 공적비가 세워져있다.
7년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성내 삼양 조천 모슬포 한림 용수 세화 등 제주 곳곳에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했던 이기풍 목사는 훗날 장로교단 총회장에까지 오르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활약한다. 그리고 마지막 사역지가 된 여수 우학리교회에서 일제의 강압적인 신사참배에 맞서다, 칠순의 나이에 모진 고문을 감당하지 못하고 순교하고 만다.
▲ 제주순례길이 시작되는 애월면 금성교회당. |
성내교회 예배당 곁에는 생전의 이기풍 목사가 그 아래서 동네 사람들을 만나, 전도하고 설교했다는 팽나무가 건재하게 서있다. 이 목사의 막내 딸 이사례 권사가 그 아래서 복음 전하러 먼 길 떠난 아빠의 귀가를 기다리며 팽나무를 친구 삼았다는 이야기도 애틋하다.
발걸음을 성내교회에서 머지않은 사라봉공원으로 옮기면 이번에는 조봉호 선생의 이름과 마주치게 된다. 사라봉 중턱에 제주 출신 애국지사들을 기리고자 마련한 모충사의 세 탑 중 하나는 바로 조봉호 선생을 위한 것이다.
조봉호 선생은 신실한 전도자인 동시에 피 끓는 애국지사였다. 기미년 만세운동 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회생회를 조직하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인 1만원을 4550명의 회원들로부터 거두어 상해로 송금하는 일을 주도한다. 후에 이 일이 일제에 발각된 후에는 스스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 37세 젊은 나이에 옥사한다.
박창건 목사가 사라봉의 비문을 읽어내는 목소리가 숙연하다. “그는 생명과 재산 모든 것을 조국 독립을 위하여 희생하였으나 유해도 유가족에 인도되지 않았다. 그가 잠든 묘도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1977년 도민의 이름으로 그의 애국정신과 희생을 기념해 기념비를 세웠다.”
▲ 4·3사건 당시 봉기에 가담했던 주민들의 구명에 앞장선 조남수 목사를 기리는 공덕비. |
사라봉에서 섬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서남쪽에 있는 대정교회(류덕중 목사)에는 ‘이도종’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깊이 새겨져있다. 뭍으로 나가 평양신학교 졸업 후 목사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평생 주저함 없이 스승들에게 보고 배운 복음의 길, 애국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일제는 독립운동에 앞장서던 그의 다리 한쪽을 꺾었으나, 그의 의기마저 꺾지는 못했다.
앞서 이기풍 목사가 일으킨 수많은 교회들을 성장시키고, 새로운 교회들을 개척하여 제주노회까지 설립하며 불꽃처럼 살았던 이도종 목사에게 대정교회는 최후의 목회지가 되었다. 해방 후 살벌했던 제주 4·3사건 당시,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악지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심방하기 위해 나섰던 이 목사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실종된 지 1년 후에야 무장대들에게 스파이라는 오해를 받아 생매장 당한 그의 시신을 어느 산자락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예배당 앞마당에서 세워진 기념비와 묘소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작은 공간에 강렬한 인상을 자아낸다. 특히 교인들이 산방산에까지 수레를 끌고 가 캐온 돌로 새겼다는 기념비는 고인을 향한 사람들의 흠모와 애도의 깊이를 짐작하게 한다.
▲ 제주 대정교회에 조성된 이도종 목사의 묘역. |
대정교회를 떠난 후 모슬포교회(손재운 목사)에 들러 제주 선교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역사관과 4·3사건 당시의 또 다른 순교자 허성재 장로의 자취, 무장대에 가담했다 목숨을 잃은 처지가 된 주민들의 구명에 앞장서 수천 명의 생명을 살린 조남수 목사의 공덕비까지 살핀 후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조천읍 이기풍선교기념관(이사장:김정서 목사)으로 향한다.
제주노회와 전국 교회의 정성이 모여 세워진 이 기념관의 입구에는 세 명의 순교자 비석이 탐방객들을 맞이한다. 이기풍 이도종에 이어 뜻밖의 이름 하나가 거기 등장한다. 바로 2007년 분당 샘물교회 봉사단을 이끌고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갔다 탈레반에 목숨을 앗긴 배형규 목사이다. 그가 순교한 날은 자신의 42번째 생일이자, 제주선교 100년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제주에서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제주영락교회에서 자랐던 배 목사 역시 앞선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갔던 것이다. 순교자들은 그렇게 화석이 되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성도들을 깨우고 일으키는 동력이 된다. 제주는 여전히 순교정신이 살아 숨을 쉬는 성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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