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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 기독교 선행론에 대한 서론적 해설]박동근목사

감사

by 김경호 진실 2016. 12. 24.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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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32주 “감사” - 기독교 선행론에 대한 서론적 해설

86문. 우리는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참한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왜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합니까?

 

 

 


답. 분명히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한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구원의 열매에 의해서 우리 믿음이 확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경건한 행실에 의해서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87문.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회개하지도 않으므로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답.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정한 자, 우상숭배자, 간음하는 자, 도적질하는 자, 주정뱅이, 거짓말장이(비방하는 자), 강도 등과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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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32주일 문답은 “감사”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감사”의 주제는 교의신학에 있어 “선행론”으로 바꾸어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중생과 회심 그리고 성화의 주제와 연관되어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서의 “감사”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맥락 혹은 배경 아래서 다루어집니다. 이 감사의 주제는 앞에서 다룬 주제들을 전제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1문답으로부터 이 감사의 주제 직전인 85문까지의 맥락은 오늘 다루는 주제인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문답은 전체 신앙고백의 서론적인 언급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1문답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한 사나 죽으나 유일한 위로를 묻고 그 답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복음을 답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 마친 문답까지는 1문답에서 제시한 복음의 내용들을 자세히 전개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큰 맥락에서 보면, 1문답 이후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를 다루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비참한 인간의 중보자가 되셔서 죄인을 어떻게 대속하셨는지를 제시한 후, 선물로서 주어진 믿음에 의해 값없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성령으로 죄를 씻으신 은혜를 가르칩니다.

 

즉, 오늘 다루고 있는 32주 “감사”는 이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받아 의롭다 여김을 받아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자녀로 용납해 주신 은총에 성도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것입니다. 죄의 비참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에게 나타날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보은의 교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무엇으로 나타나는가하면 그것이 성도의 선행입니다. 진정 구원을 알고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총을 알고 경험한 자들은 감사로 응답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가 바로 선행의 동기가 됩니다.

 

성경은 선행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 안에서 선행은 구원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선행은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감사의 동기로부터 드려야 하고 공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이미 받은 구원, 구원의 깊이와 넓이와 부요함 앞에 성도는 오직 감사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은혜에 대한 감사하여 감사의 표현으로 선행에 힘씁니다. 구원을 받으려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구원에 감사할 수밖에 없어 선행을 합니다.

 

누가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오직 우리의 비참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벌 받으심과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세우신 공로로만 제거되고 위로됨을 아는 성도에 의해 감사가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분이심을 깨달은 자들이며,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를 반역한 죄의 비참함을 깨달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배반한 죄인을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은총을 아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 영광을 짓밟고 모욕한 죄의 중함을 깨달은 자들이며, 그런 비참한 죄인을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신 성품의 완전하심과 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자들만이 자신이 받은 은총이 얼마나 눈부신 것인지를 알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처럼 십자가 안에 비추이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공의와 사랑의 가치를 깨달은 자들만이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감사할 줄 알고 찬송할 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구원을 감사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찬양은 감사의 마음으로부터 드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선행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공로도 없는 것입니다. 성도가 선행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감사의 표현으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선행을 행하는 동기가 감사일 때만 하나님께서는 그 선행을 기뻐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공로로 여긴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선행을 교만히 여기시며, 하나님의 은총을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갈취하는 교만한 행위로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행위”를 가증히 여기십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자신의 의를 의지하거나 그것을 공로삼는 일은 완전하고 충족하며 오로지 우리의 칭의의 공로적 원인이 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갈취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선행은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기에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개혁신학자들은 성도의 선행이 감사의 표현이 될 수 있지만, 공로가 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불완전함(imperfection)의 자취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가장 훌륭한 행위도 여전히 항상 어떤 육의 불결(impurity)로 얼룩지고 부패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어떤 찌꺼기가 그것[선행]에 섞인다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거룩한 종들에게 조차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며 성자들의 행위조차 치욕의 보상으로 나타날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성화의 열매는 엄중한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에서도 동일한 메아리가 들려집니다.

 

62문. 그러나 왜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義)나 그것의 일부가 될 수 없는 것인가?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의인들은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모든 측면에서 일치해야만 하는데, 이생에서 우리의 가장 훌륭한 행위도 불완전하고 죄로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동일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순종을 통해서 이생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정도의 선행에 도달한 사람들일지라도, 잉여공로(supererogation)를 세운다든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결코 행할 수가 없는데, 이는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마저도 그들은 다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최선의 행동을 통해서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죄 사함이나 영생을 얻을 만한 공로를 세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선행들과 장차 있을 영광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으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무한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유익을 드릴 수가 없고, 우리들의 전에 범한 죄의 빚을 감하거나 탕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의무를 행한 것뿐이요, 우리는 무익한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의 행위들이 선하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에 의해 되어 진 것들이라면 여러 가지 연약성과 불완전성이 뒤섞이고 더럽혀져 결국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견디어 낼 수가 없다.

 

그리고 개혁신학자들과 그들의 신앙고백들은 모두 이러한 불완전한 선행이 하나님께 기쁘시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불완전한 선행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그와 함께 있는 죄를 용서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불완전한 행위조차도 중생케 하심과 회심 그리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역사로 나타난 것이기에 인간에게 공로가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선행은 구원의 공로가 될 가치는 갖지 못하지만, 받은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불완전한 성도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 용서하심으로 받아주십니다.

 

오로지 의롭게 됨은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우리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은총도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진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의 관계를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 가운데 선행에 힘쓰고 애씀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르시누스는 감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했습니다.

 

감사는 일반적으로 은덕을 입은 사람에게와 그 은덕 자체의 고마움을 인정하고 표명하며, 은덕을 베푼 자에게 합당하고 가능한 의무를 거꾸로 이행하기를 바라는 일종의 덕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르시누스는 이러한 감사에는 진실과 정의가 함께 포함된다고 가르칩니다.

 

감사에 진실이 함축되어 있다는 의미는, 감사를 통해 그 받은 바 은택을 시인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감사는 받은 바 은택이 실제한다는 인정이므로, 은택이 진정한 것이라는 것을 은택을 입은 자가 증언하는 것입니다. 감사할 때, 은택이 진실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감사로서 하나님께 우리가 은총을 입은 사실이 진정한 것임을 감사로 인정해야 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감사에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는, 자신에게 은택을 베푼 대상에게 돌아갈 합당한 것이 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정의”는 “몫”이라는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예를 들면, 언약 안에서 선을 행한 자에게는 약속의 상급이, 악을 행한 자에게는 형벌이 분배될 때, 이는 행한 것에 대해 그 합당한 몫이 돌아가는 것이지요. 또 한편, 성경에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곡식 이삭을 남기는 자비의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므로, 추수 후 남겨진 이삭들은 가난한 자의 몫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돌아갈 것을 돌리는 것이 정의인 것이지요. 또 일꾼들에게 돌아갈 품삯을 일꾼들에게 지급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품삯은 노동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할애하신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지급하지 않을 때 불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의미는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돌리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지요. 감사가 정의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큰 은총을 입었으니, 그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고 은혜의 제공자되시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감사를 돌리는 것이 정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감사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그 은혜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행위이며, 이와 같은 큰 은총을 입은 자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드려야 할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을 피하고, 죄를 피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므로 그분에게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한다는 것은 단지 도덕적인 행위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중생하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을 통해 맺혀지는 우리의 전인적인 삶의 태도요 열매들을 통칭합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이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웃을 섬기는 행위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런 예배 행위, 순종 행위, 누군가를 섬기는 행위의 근본 혹은 뿌리는 감사의 동기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공로사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게 하는 것은 은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의 동기로 선행의 열매를 맺는 성도의 삶의 뿌리와 근거는 중생과 회심입니다. 중생하고 회심하지 못하고 성화의 영을 받지 못한 자들은 결코 이러한 감사의 선행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루는 “감사의 표현으로서 선행”의 주제는 중생과 회심의 주제와 또한 연관되어있습니다. 구원에 속한 선행은 자연인에게서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 선행은 죄의 지배속에 있는 자들이 행할 수 없습니다. 감사의 선행은 오로지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주제와 관련해 이후의 이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생활로 나아가는 회심을 다룹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감사의 주제를 제시한 후, 회심을 다루고, 선행을 다루고, 하나님의 율법을 다루고 이와 관련된 의미에서 기도를 다룹니다. 따라서 후에 우리는 십계명과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강설하게 됩니다.

 

즉,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구원과 구원의 생활에 있어 두 가지 큰 이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우리의 비참을 깨닫고, 그러한 비참한 죄인을 구속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구원하신 은혜를 깊이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신앙고백이 가르치고자 하는 위로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은총을 받은 자들은 감사로서 선행의 생활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로

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의 완전한 구원이 되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총에 대한 인정과 감사로서 거룩한 삶의 추구로서 선행을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론적으로 우리는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 주제들 속에서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합니다. 분리되지 않지만 구분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이중은총으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공로 떄문입니다. 그 공로를 전가받아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받았고 자녀로 받아들여 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진노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 칭의를 통해 회복된 관계에 토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거룩한 변화와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합할 때, 우리는 칭의로 의롭게 여겨지는 동시에 성화를 통해 거룩해 집니다.

 

거룩함은 중생과 회심 그리고 성화의 은총을 주시는 성령을 통해 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해방됨은 죄의 지배력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죄를 회개할 수 있고, 투쟁할 수 있고, 때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을 입기 전까지 우리는 불완전하여 율법의 요구를 행위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성도에게 성화의 열매가 맺혀지지만 그것이 구원의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불완전함을 용서하시고 우리의 선행을 감사의 표현으로서, 믿음의 진정성의 증거로서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진정 구원받았다면, 은총에 대한 감사로서 일생 선행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지배력을 상실한 죄를 성도로서 합당히 대적해야 합니다. 죄를 짓는 일이 존재하나, 성도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는 데서 나아와 죄와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이기고 선행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감사의 표현으로 기뻐 받아주심을 성도들은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은 그런 의미에서 감사로서 예배하고, 순종하고,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넘어지지만 죄는 지배력을 잃어 우리를 지배하고 죽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회개하고 투쟁하고 선행으로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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