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역사하는 믿음으로 온전하게 서라(계3:1-6) | |||
임진남 목사 | |||
오늘 우리는 사데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에서 느껴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사데교회가 어떤 잘못된 신앙 때문에 예수님께서 책망과 심판을 하신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데교회가 이런 책망과 심판 앞에 있는지 우리는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사데교회가 잘못된 신앙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옷”을 더럽혔다고 하는 것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위 가운데 온전한 것이 없다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그들의 신앙이 행위와 다르게 나타난다고 하는 것을 통해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데교회가 왜 책망 가운데 있는지 좀 더 자세하게 연구하고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서는 그 지역과 교회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말씀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교회의 사자에게 즉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와 장로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그 지역과 상당한 연관이 있습니다. 모든 지상의 교회들이 다 세상의 지역 속에서 세워지고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서울 강남에 있는 교회들은 더 많이 그리고 빠르게 세상의 유행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시골에 있는 그리고 섬이나 오지에 있는 교회들은 세상의 영향을 더디게 받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데 지역이라고 하는 곳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데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이 지역이 얼마나 부유했냐면 강 속에 있는 모래에서 사금들이 많이 나와서 금화를 만들어 통용하고 금으로 살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데는 돈의 지역입니다. 상업도 엄청나게 발달하였고 모든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두아디라, 서머나, 에베소, 빌라델비아, 브루기아로 가려면 이곳을 통해서 가야만 했던 아주 중요한 교통의 중심지 였습니다. 그러니 다양한 풍습과 유행들이 쉽게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사데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보면 이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는 다른 교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교회들은 대개 외부의 환난과 핍박, 그리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사상들과의 싸움에 처한 교회들이었고, 그 상황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들의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사데교회는 그런 일들과는 전혀 무관한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사데 지역이 부유한 곳이기 때문에 교회도 부유했습니다. 제 동기들이 예전에 서울 강남에서 가장 큰 교회의 부목사들로 있었던 기간에 그들이 성도들로부터 받은 책값이나, 선물을 자랑하는 것을 들어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물질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돈이 많으면 교회도 돈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데교회는 아마도 돈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한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라고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역사하는 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서 교제합니다. 그런데 사데교회는 돈으로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사데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는 책망을 받은 것은 사데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으로 교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이 부분에서 우리는 성도가 혼자 성령충만 할 수 있는지 신학적인 배움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보면 “성령 충만 하라” 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성령 충만하라” 하신 그 말씀 때문에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늘 충만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령 충만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은 유일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만이 성령으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성령 충만 하라고 하신 것은 성도가 혼자 충만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각 사람에게 은혜의 분량을 따라서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형제로서 교제를 갖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이루고 그 이룬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합니다. 그것은 아무도 스스로 혼자 성령 충만하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 나누고, 협력하게 하는 존재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령 충만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성도 지체 간에 협력하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혼자서 성령 충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실패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실패하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성령을 또한 한 없이 부어주십니다. 성령을 부어 주셔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우리로 하여금 섬기게 하십니다. 성령을 부어 준다고 하는 말은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늘 역사하게 하신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회의 교사들 즉 목사들만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의 사자에게 먼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먼저 교회의 사자인 네가 계시의 말씀을 읽고 깨달아 교회를 섬겨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자들도 매일 매일 죄 때문에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같이 주님께서는 교회를 이끌고 섬기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결코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자국어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대부이고 방언도 각 나라 언어가 아니라 몇 개의 구음으로 이루어진 말을 계속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성령 충만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에서 보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나와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아니 더 교만하고 은밀한 죄를 많이 짓습니다. 또한 성경을 많이 읽는 다고 자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령이 충만하여지지 않습니다. 이것도 많이 읽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읽고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신앙의 어떤 모양을 많이 하는 것으로 성령 충만하다고 하는 표준을 세웁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 충만이 이런 것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성도 혼자서는 성령 충만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이 서로 부족한 것을 인식하고 타인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를 같이 사용할 때 이루어집니다. 성부께서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는 성령이 충만하게 늘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할 때 그리스도는 성도 개인을 위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주십니다. 만약 성도가 성령 충만을 구한 것이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 요한과 신약의 사도들이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사역을 보면 우리는 왜 성령께서 그들에게 충만히 거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 즉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룰 교회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는 교회와 연관되어 주십니다. 또한 복음이 이방에 증거되게 하시기 위해 더더욱 주십니다. 이것이 정통기독교의 성령 충만에 대한 신앙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성령 충만을 구하는 집회를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하여 가정의 문제, 사업의 문제, 자녀의 문제, 병 고침에 대한 것들만 가득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성령 충만으로 사도들에게 역사하신 주님의 사역을 보면 이런 것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상에서 여전히 동일하게 복음 사역을 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이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 충만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상관없는 성령 충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성령 충만을 구하고 은사를 사모하는 것입니까? 많은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성령 충만과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구하라고 하지만 그 목적에 대해서는 바르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한국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 충만과 은사에 대한 왜곡된 신앙이 나타나고 급기야는 자신만이 최고의 신앙인이라고 교만하게 된 것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은 죽은 것입니다. 불법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법도 어기면 그것도 불법이고, 하나님의 계명도 어기면 그것도 불법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신 신앙의 방도를 따르지 않고 자신들만의 생각으로 만들어 놓은 신앙의 길로 가는 것도 불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7:22-23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으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저주의 말씀을 하신 것이 바로 사데교회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데교회가 자신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예배하고 서로 교제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시기에 그들은 죽은 자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가지고 죽은 자들로 그렇게 교회를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데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아 자신들의 삶속에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했는데 그들은 모든 것을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판단하고 행동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열심을 가지고 행동하였지만 그들의 행위는 주님과 상관없는 행위였습니다.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 “죽었다”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실 때는 그들이 죄와 관련되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 말씀과 연관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사역을 믿고 옛사람의 성품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도 옛 사람으로 그렇게 계속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는 있으나 옛 사람으로 계속 있기 때문에 진정 거듭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속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지만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기도는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기도 하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주변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교회 등록해서 몇 년 동안 다니면 세례를 줍니다. 계속 다니고 있으니 세례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회원은 늘어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장 우선순위로 둔다고 할 때 단지 특별은혜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족한 것은 특별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일반은혜를 중요하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는 이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펼쳐놓으신 일반 은혜를 사랑하고 감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이것을 중요하게 가르치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의 법, 권세의 순종, 이웃 간의 사랑 등, 이러한 것에 성령께서 일하신다고 하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어리석은 신앙이 자리 잡은 것입니다. 모든 세상의 문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문화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모든 인간이 누리게 만든 문화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문화는 사탄의 문화이고 기독교 문화만 좋은 것이라고 이원론적인 사고를 가진다면 세상은 악하고 교회만 선하다고 하는 왜곡된 신앙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무분별하게 세상의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교회 또한 잘못된 신앙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사데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바로 세상의 문화를 거침없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당시 세상의 문화란 바로 우상숭배와 연관이 아주 깊습니다. 사데지역 또한 상당한 우상의 문화들이 퍼진 곳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세상과 구별되지 않게 행동하자 교회는 환난과 핍박이 없습니다. “옷을 더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는 말씀은 사데교회 안에 여전히 세상과 하나 되지 않은 믿음의 자녀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옷”이라고 하는 말씀은 성도의 행실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세상의 문화에 물들지 않은 자들입니다. 사데가 돈의 도시였기 때문에 물질적으로 풍요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도 돈이면 다 된다고 여기고 있는 그런 가치관에 물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존재들입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때부터는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믿음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개혁신앙 가운데 전해지는 말 가운데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반드시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는 자는 성화를 이룹니다. 사데교회 안에 옷을 더럽힌 자들이 대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4절 말씀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옷을 더럽혔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만 믿음을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수의 성도들은 자신들을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유희 속에서 믿음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렇게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주님은 축복의 말씀을 약속하여 주십니다. 축복의 말씀을 보면, 첫 번째는 주님과 함께 흰옷을 입고 다니는 복이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입으신 옷은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옷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이기는 자는 주님께서 입으시는 그 옷을 마지막에 입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리의 흰 세마포 옷을 성도에게 입혀 주실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영광스러운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합당한 자들로 인정받게 한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하나님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여 주신다고 하는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많은 신학적인 주장들이 난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한다고 하는 부분에서 충분히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반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 지워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다가 잘못하면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 믿고 나중에 타락하여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이 예수만 믿으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심판을 받지 않는 다고 하는 말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은 곡언법으로 강하게 부정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결코 지워지지 않는 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가지고 이기는 자는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가질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버리고 신앙을 왜곡하며 세상과 하나가 되는 자들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은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가 지워지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부터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시는 언약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믿음으로 산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의도로 하나님을 믿는지 알고 계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참되게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자들은 세상과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아도 오직 주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지금 사데 교회가 실상은 죽었다고 하는 그 책망을 듣는 것은 그들에게 살아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살아 역사 합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이나 교만한자들이 가진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과 하나가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참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거룩한 행실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264&msection=2&ssectio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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