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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송영찬목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6. 30.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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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엘리후는 많은 부분에서 욥과 세 친구들의 수준을 능가하고 있다. 엘리후의 변증은 침묵 속에 숨어 있는 욥을 일깨웠다. 엘리후의 변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첫 번째 변증 :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엘리후의 변증(욥 32-33장)

엘리후는 욥의 자기 정당화와 친구들의 굴복에 대해 실망한 것으로 보인다(32:6-9). 따라서 욥에 대해 직접적인 도전을 제기한다(32:17-20). 엘리후는 먼저 하나님의 위대함을 강조하고(33:12) 현세적인 인과응보 사상에 대해 새롭게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34:11-12). 이것은 엘리후의 중심 사상이다.


엘리후에게 있어 고난의 근원이나 원인을 찾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함에 있어 때로는 역경을 주시기도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속한다(33:14-20).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현현(顯現)의 다양성에 속하며 고난도 그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고난은 언제나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되어선 안 된다. 때로 고난은 교육적인 목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무례한 일이라고 지적한다(34:23). 그리고 욥에게 회개를 촉구한다(33:26). 하나님은 그 일을 하시기에는 너무나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엘리후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할 즈음에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 귀를 여시나니”(36:15). 여기에서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엘리후의 변증은 고난의 신비를 제거하지 않는다.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엘리후도 친구들의 의견과 같이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움뿐 아니라 동시에 사랑의 원리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고난도 있다는 점에서 친구들과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의로운 자가 받는 이 고난은 여전히 자신에게 고착(固着)되어 있는 죄를 발견하고 죄로부터 깨끗하여짐으로써 구원의 보다 높은 차원에 도달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고난은 형벌(현세적 보응)이라는 개념을 넘어 이해해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33:17-18). 하나님은 동정 어린 사랑으로 고난에 앞서 먼저 내적 경고들(inward monitors)을 보내주시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적 경고들은 징계의 전주곡이다. 왜냐하면 무거운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고난은 의로운 자가 멸망에 빠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義)를 발견할 수 있다(33:23-24). 이것은 의로운 자와 악한 자가 받는 고난을 구별지어 주는 잣대이다. 그 결과 고난 받는 자의 마음이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일깨우는 것이다. 엘리후는 이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사 그로 자기의 얼굴을 즐거이 보게 하시고 사람에게 그 의를 회복시키시느니라”(33:26).


또 하나 엘리후가 강조하는 것은 고난을 통해 허물을 깨닫고 자신의 교만함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36:8-12). 여기에서 고난은 하나님을 향하여 귀를 열 수 있도록 해 준다(36:15). 친구들도 욥이 회개하면 번영과 구원이 회복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고난은 하나님의 형벌로만 단정되어 있었다.



2. 두 번째 변증 : 하나님의 의에 대한 엘리후의 변증(욥 34장)

엘리후는 자신이 불의하게 취급된다고 주장하는 욥의 태도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욥의 평가와 모순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욥의 부질없는 도전은 창조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결코 비견(比肩)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로서 지고(至高)하신 존재자의 의로움이 욥에 대해서만 부당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만일 누구라도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지혜로우심을 부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엘리후는 자연계의 신비한 현상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곧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완전한 지혜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의롭지 않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어느 한 쪽에서 잘못 이해한다 할지라도 다른 면을 견고하게 붙들고 있다면 그 일로 우리가 잘못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잘못 이해된 부분이 있다면 확고한 지식들로 인해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3. 세 번째 변증 :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엘리후의 변증(욥 35장)

인간의 의로움이 하나님 앞에서 공로가 될 수 있는가? 만일 인간의 의로움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든 보상(報償)을 해 주신다면 그것은 일종의 공로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의롭기 때문에 그에게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철저하게 의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아무런 유익을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로운 자에게 상을 주시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로움에 대해 보상을 늦춘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


욥은 자신의 무고함을 내세워 하나님께서 속히 판별해 주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무고한 자신이 여전히 고난 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잘못 아시고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부족함이 없으시며 자족하신 하나님(The All-Sufficient God)께서는 인간과 협력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또는 인간에게 그 어떤 일로도 해명을 하실 이유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하여 답변을 요구한다거나 해명을 촉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답변이나 해명을 요구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고난이 임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심히 애통해 하며, 겸손히 간구하며, 인내로 기다리며, 확신에 찬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만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평이나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응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있는 자기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4. 네 번째 변증 :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엘리후의 변증(욥 36-37장)

지금까지 진행된 엘리후의 변증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전지전능하시다는 신학에 근거한다. 때문에 하나님은 의로운 자에게 징계를 하시며 고난을 받도록 하시는 것은 그들을 정화시킴으로 더 큰 영광에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만일 하나님에게 있어 불합리한 점이 발견된다면 엘리후의 주장은 정당성을 상실할 것이다.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정화를 목적으로 하는 고난을 주실 수 있으시며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모순되거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욥이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에 결코 저촉되는 일이 아니다(36:1-26).


나아가 엘리후는 본질상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능력 또한 위대하신 분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심히 의로우시고 의로 충만하다는 신학적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선 어떤 부당한 일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 개개인에게도 부당한 일을 행사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에게서 부당한 처사를 발견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부인하는 일과 같다.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현명하다고 주장하거나 자기의 의(義)를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말 것이다.



5. 결국 최후 판결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다.

욥은 엘리후 앞에서 철저하게 침묵을 지킨다. 엘리후는 욥의 침묵을 일종의 투항으로 간주한다(33:31, 33).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요소가 있다. 즉 하나님께서 엘리후를 인정하시고 그 변증을 옳다고 확인해 주셔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응답해 주셔야 한다고 주장해 왔었다. 욥은 자기의 무고함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엘리후의 변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그 앞에서 무고함을 주장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엘리후의 변증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엘리후의 변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후의 주장에 대한 하나님의 재가(裁可)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욥기의 저자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현현(顯現 : vision)을 암시하고 있는 문학적 복선이다. 욥이 지금의 상태에서 새롭게 회복되는 유일한 길은 엘리후의 변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욥기 기자가 시사해 주고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욥이 지금의 어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정형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전격적인 하나님의 현현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것은 성육신(incarnation) 교리의 정당성을 입증해 주는 신학적 배경이 된다.
하나님의 현현은 하나님께서 가시적으로 인간에게 출현하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현현은 신인동형어법적 요소(anthropomorphism)를 가지게 된다. 에덴 동산에서 거니시는 하나님(창3:8), 아브라함을 찾아 온 세 사람(창 18:1-2), 야곱과의 씨름(창 32:24-28), 모세가 본 하나님의 등(출 33:18-23)을 비롯해 여호와의 사자가 곧 하나님 자신으로 판명되는 기이한 현상(창 18:16-17; 삿 13장) 등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때로 하나님은 구름, 폭풍, 번개, 불과 같은 자연 현상으로도 현현하신다(출 3:2-6; 13:21; 19:18-19; 24:15-18; 사 30:27-28).


욥은 자신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변증에 의해 비로소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인식할 수 있었다. 욥의 위대한 경건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의 현현 앞에서 자신의 저급한 상태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엘리후의 변증 때문이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이로써 욥은 초기의 저급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계로 발전될 수 있었다. 욥은 엘리후의 변증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은 또한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가 옳다는 사실과 그에 반해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참고로 욥의 불평에 대한 엘리후의 변증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①하나님의 침묵 :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응답하지 않는다고 불평했다(13:2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꿈과 고통을 통해 말씀하신다(33장).
②하나님의 의 : 욥은 무고하게 고통 당하는 자신을 구하지 않으신다고 불평했다(19:6-7; 27:2).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며 그의 모든 행사는 의로움으로 충만하시다(34장).
③하나님의 주권 : 욥은 자신의 무죄에 대해 보상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했다(10:7). 그러나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주권자이시다(3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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