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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복되도다> 송영찬목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7. 6.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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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복되도다>

욥이 당한 고난의 배경은 신비스럽게도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욥이 어찌 까닭없이 경외하리이까”(욥 1:9)라 했던 고소하는 자의 참소는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는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그리고 등장 인물들은 고소하는 자의 실체를 볼 수 없다. 심지어 욥 자신도 고소하는 자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인식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고소하는 자는 욥의 고발자로 등장하였으며 그 역할을 수행한다. 고소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고발하는 자(계 12:10)임과 동시에 파괴자였다(계 9:11). 욥에게 있어 고소하는 자는 분명히 대적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욥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을 파괴할 것같은 영적인 공격을 당하였던 것이다. 욥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세력 앞에서 깊은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에 대해 욥은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했다. 그리고 자신의 무고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갈망하며 거듭해서 하늘 문을 두드렸다(욥 13:22; 31:35). 그러나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욥은 설 자리가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욥은 하나님이 친히 중재인이 되어 주시기를 갈망했다(욥 9:33). 그리고 변호인이나 보수자가 되어주실 것을 소원했다(욥 16:19-20).
이 과정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공격하심이 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법정 공청회를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하셨다. 대신 욥은 엘리후의 강화를 통해 자신의 실체(實體)를 볼 수 있었다.
만일 욥이 엘리후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면 여전히 마음속에 담긴 의문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엘리후가 말한 고난의 목적에 대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므로 필연적으로 그가 행하시는 바가 옳다는 엘리후의 변증에 따른다면 욥이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한 것은 분명히 잘못이었다.
욥은 엘리후의 강화를 통해 자기 정화(katharsis)의 과정을 매듭지었다. 전능자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그 행사가 올바르다는 사실을 엘리후가 밝혀주지 않았다면, 친구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욥은 또다시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왜 자기가 고난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지 의문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1. 초월자이신 하나님

욥이 기대한 것처럼 마침내 욥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비록 폭풍 가운데 하나님이 등장하셨다 할지라도 그 자리는 어전회의와 성격과 같은 천국 법정임에 틀림없다. 드디어 욥이 원했던 법정 공청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청원에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욥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욥의 소환장에 응하는 대신 욥에게 소환장을 발부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70여 가지가 넘는 질문을 하신다. 하나님은 생물과 무생물계의 수많은 현상에 대해 욥을 심문하시듯 질문하신다.
자연과 인간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그 길을 이해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문제들에 대해 한마디도 답변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상대로 논쟁할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고 모든 짐승들에 대해 목적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도 그분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밝혀진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계획과 목적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한 가지도 답변할 수 없었다.
대신 욥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욥 16:7) 버림당하고(욥 16:8) 공격받는다(욥 16:9)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끝가지 침묵하시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심에 대해 불평을 토로했었다(욥 19:7). 그러나 지금 욥은 바로 그분 앞에 있지 않은가?
비록 하나님께서 폭풍(폭풍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욥이 범죄했음을 시사해 준다) 가운데 등장하셔서 책망을 하시지만 욥이 그분 앞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책망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욥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 책망은 상대적으로 욥이 무지하고 성급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준다.
하나님은 욥에게 하나님의 길을 성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보존자이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일일이 설명해야 할 이유가 없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 무엇을 계획하고 계시는지,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하나님의 행함을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인간은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그분께 경배와 감사를 드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욥의 질문, 즉 사람이 당하는 고통가운데 담겨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의 책망가운데 욥은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2. 욥을 찾아오신 하나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God`s appearance)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느냐는 그 다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한 요지는 이미 엘리후의 강화에서 충분히 보여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엘리후의 강화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훨씬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이해를 돕는 설명이 아니라 질문으로 계속 진행된다. 그 질문은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은 누구인가?”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 답은 욥이 지금까지 추구한 질문을 일순간에 초월한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받는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본체론적(ontology) 논증 앞에서 욥이 택할 수 있는 길은 회개뿐이었다.
욥은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한다. 장황했던 친구들과의 변론과는 달리 욥의 답변은 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간결한 욥의 말 속에는 깊고 철저한 참회가 담겨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 단어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이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의 성취자로 불려지는 성호 ‘여호와’는 욥기 전반부인 1-2장에서 18회 기록되었다. 그리고 친구들과의 변론 중에는 오직 한 번 욥의 말에 등장한다(욥 12:9).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이 성호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폭풍가운데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여호와’로 호칭하면서부터이다(욥 38:1). 그리고 후반부(욥 38-42장)에서는 ‘여호와’의 성호가 12회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성호가 유독 친구들과의 변증에서는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그들의 변론이 여호와 하나님과 깊은 관련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그들의 변론으로는 욥기가 처음부터 추구했던 문제의 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3. 신실하신 여호와

욥을 책망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는 가장 긴 기록이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보다 긴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직접 발언하신 말씀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말씀은 두 부분(욥 38:1-40:2; 40:6-41:34)으로 나누어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언하시는 도중 욥에게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욥 40:2)는 책망에 대한 욥의 짧은 응답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욥 40:4-5)고 욥은 탄식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욥의 도전에 대한 책망은 계속되었다. 이것은 마치 법정에 서 있는 욥에게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욥이 자신을 위해 변호한다는 의지는 이미 무시된 상태였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욥 38:4). 하나님은 창조의 사역을 말씀하시면서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년수가 많음이니라”(욥 38:21)고 욥을 철저하게 무시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욥을 무시하신 것이다.
그런데 욥기 기자는 또다른 하나님의 모습을 ‘여호와’라는 성호 속에 담아 두고 있다. 욥기 기자는 욥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무시되는 상황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의 성취자이신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욥 38:1; 40:1, 6; 47:2). 그리고 최후에 가서는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욥 42:9)는 말로 결론을 내린다.
‘여호와.’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복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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