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욥 38:1)
욥기에서 볼 때 욥의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향하여 교조주의적이고 신랄한 지적을 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욥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욥의 문제를 밝혀주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욥의 고통을 심화시켰을 뿐이다.
엘리후의 등장은 신비스럽기만 하다. 그의 강화는 욥의 입을 다물게 했다. 그렇지만 욥이 당면하고 있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나 주셔야 할 것을 요청했던 욥의 욕구(욥 23:2-7; 31:35)를 완벽하게 채워주지는 못했다. 엘리후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말씀하심은 욥기가 추구하고 있는 계시의 정점에 도달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욥의 고백은 그가 최상의 계시에 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는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이르러 직접 그 말씀을 보고 듣는 최고의 상태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다.
1.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여기에서 욥기가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교리나 변증에는 그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나타나심이야 말로 인생의 문제에 있어 가장 완벽하고도 궁극적인 해결임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욥기에 있어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여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부분(욥 38-41장)은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말씀하신 것으로는 성경의 기록 중에서 가장 길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 기록은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강화라는 사실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타나심만이 욥이 당한 고난의 문제에 대한 유일하고도 만족할만한 해결의 방법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 즉 자기 계시는 시대마다 독특하게 나타난다. 족장 시대까지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의 대상에세 자신을 보이시는 방법으로 계시하시는데 이것을 나타나심(theophanic)이라고 한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을 눈에 보이는 현현체(theopneustic)로 직접 계시하시는 방법을 택하셨던 것이다. 그 후 모세 시대에는 영감(theopneustic)으로 자기를 계시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감된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계시하시는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그러다 점차 하나님은 영감된 기록을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으로 남겨 놓으셨다.
이러한 계시의 전달 과정의 방법에서 선지자들을 두 그릅으로 분류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언어를 통해 전달했던 구술 선지자들(oral prophets)와 문자를 통해 기록한 정경선지자(writing prophets)로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있어서 그 최고봉은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theologic)으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영감된 기록(벧전 4:11)으로 세상 종말까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 계시를 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알려지고 수행되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모든 역사와 병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역사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내용을 보면 세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①이 계시는 이스라엘 역사와 함께 수세기 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②이 계시는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되었으며, ③그 계시의 메시지는 한 목적을 담고 있는데 곧 메시야에 의해 성취될 미래의 구원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인류 역사에 주어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핵심은 ‘메시야’(??שׁ?)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흔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속에서의 ‘기름 부음’이란 영속적인 성격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메시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해 지상에 오실 한 사람으로서 신적인 인간으로 계시되었다(사 9:5-6). 메시야가 지상에 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오심, 즉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그의 오심은 마지막 때가 되었음을 가리킨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인 왕으로 오시며 다윗의 다윗의 보좌에서 다스리실 것이다. 그가 오시는 목적은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데 있다. 그는 구세주로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메시야적 예언은 인간의 죄와 대조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의 불순종은 인류를 마음의 부패와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 속에 가두어 놓았던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그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친히 이 일을 해결하시기 위해 하와와 뱀을 적대 관계 아래 두시겠다고 선언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대립의 결과로 여자의 후손(씨)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는데(창 3:15) 이것이 곧 메시야가 오실 것과 그의 사역이 승리할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 최초의 예언이었다.
이 이후에 계속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이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 그 약속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이어졌고 야곱은 유다에게서 실로가 오시리라고 예언한다(창 49:1). 사무엘이 유다의 후손 다윗의 위(位)가 영원히 세워질 것이며 그 위에 앉은 한 주권자가 영원한 왕국을 통치할 것이라고 예언한 것 역시 이 약속에 기초하고 있다(삼하 7장).
메시야의 왕국은 영원하며 공의와 정의로 세워지며 백성의 소망이 될 것이다(이사야서). 그 왕국은 일시적이고 지역적인 이 세상의 왕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메시야의 왕국은 우주적이며 영원할 것이다(다니엘서). 그러나 메시야를 왕으로서만 보아서는 정치적인 인물로 보기 쉽다. 그래서 이사야는 메시야의 사역이 이 세상의 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본질상 영적인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구세주인 것은 확실하지만 자신의 죄의 대가가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하여 슬픔과 고난을 대신 지신 ‘종’으로 묘사를 하였던 것이다. 메시야가 고난을 받는 것은 사람들이 죄로부터 자유하며 하나님의 평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메시야는 고난을 받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야 한다. 이것이 그의 구속 사역의 본질이며 영원한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한 원복음(proto evangelium, 창 3:15)의 성취이다.
모세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던 것처럼 모든 선지자들은 오실 그 위대한 선지자(신 18:9-22)의 모형이었다. 비록 선지자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신약의 시대와 같이 충분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장차 올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메시야의 사역을 통일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폭풍 가운데 임재하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욥에게 있어 구원의 성취자로서 메시아적 사역을 이행하는 분이시다. 비록 폭풍이 구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을 상징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그 백성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하나님의 임재는 욥의 구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궁극적 목적은 인류의 구원인 것처럼 지금 폭풍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은 욥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계시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독특한 계시사적 사건으로 영원히 기념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 욥을 찾아오셔서 구원사역을 행하시는 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백성 가운데 임하셔서 구원 사역을 행사심과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욥의 삶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데 있어 예상치 않았던 삶의 현장을 그대로 예시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욥의 구원은 성도들에게 있어 구원의 확신을 가져다주는 순도 높은 예증이 아닐 수 없다.
2. ‘여호와’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지금 욥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가리켜 ‘여호아’라고 호칭한 것(38:1)은 매우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는 이름의 ‘여호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출 3:15)이시다.
이 이름의 의미는 우리 주님께서 밝히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마 22:32). 곧 여호와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초월하시지만 그 역사를 친히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계 1:8)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의 언약 백성에게 계시된 전능자 하나님이시며 산 자의 하나님께서 욥을 찾아 오셨다는 사실은 욥기가 그 절정(climax)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욥기기 추구해 왔던 문제가 해소된다. 그리고 욥이 당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길은 우리에게 불가해 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한계에 의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지혜를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폭풍 소리에 욥과 그 친구들의 논쟁이 사라지고 침묵 속에 감추어진 것처럼 욥의 혀끝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모든 질문과 불평들이 한 순간에 녹아내려 하나님에 대한 회개로 바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고 고백하는 욥의 항복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완벽한 계획에 따라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비록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고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위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온 세상, 온 우주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여기에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단지 우리들의 눈으로 볼 때 어떤 일들이나 상황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벗어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다.
마치 바닷물이 해안선을 넘어 육지로 침투하는 것 같아도 거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는 것처럼(욥 38:8)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통치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이다. 불의가 온 세상을 다 뒤엎고 있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리고 악인이 이 세상에서 장수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잠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유보할 뿐이며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바울 사도의 증거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인 성도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배후에서 고소하는 자가 궤계를 부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자신의 계획에 따라 통치하신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 2:15; 히 2:14-15; 요일 3:8 참고).
비로소 욥은 자신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더 분명해진 자신의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욥에게서 심각한 죄악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나님 역식 욥을 순전하다고 인정하셨다(1:1, 8).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발견한 자신의 결핍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피조물의 한계인데 욥의 지혜에 대한 결핍이다. 또 하나는 잠재되어 있는 죄성에 대한 것으로 이것은 고난이 아니었으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욥은 이 점은 토로하고 있다(욥 40:4-5; 42:2-6). 결국 욥은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3. 고난에 대한 욥기의 대답
고난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욥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가 하나님을 직접 만남으로서 바뀌게 되었다. 그 사이에는 욥이 인식할 수 없었던 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전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새롭게 가질 수 있었다.
욥은 이 과정을 통하여 이전에 자신이 알고 있었던 고난의 영역에 대한 자신의 이해 범위가 하나님의 주건적 섭리 앞에 얼마나 협소해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로써 어떤 고난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범주로서 해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따라서 고난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 그 답을 요구한다는 것은 욥의 이해력을 넘는 영역을 침범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종의 반역과 같은 행위였던 것이다(욥 42:3).
이 점에 대하여 욥은 철저하게 회개를 표명한다(욥 42:6). 이 회개는 욥이 고난 이전에 지은 죄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점에 있어 하나님은 심문하신 적이 없으시다. 또한 친구들에 대한 욥의 응답에 대해서도 잘, 잘못을 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욥의 잘못을 지적하신 것은 고난의 원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에서 행한 하나님에 대한 태도 문제였다(욥 40:8).
욥은 하나님의 경쟁자가 아니었다. 또한 하나님께 어떤 문제의 답을 요구할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서 재판을 요구했고 하나님이 응답하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욥은 지금 이 사실을 후회하고 있다.
욥기에서는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에 대하여 철저하게 침묵을 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이 행한 과거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욥은 이 점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또한 하나님은 욥의 주장에 대해 일체 말씀하지 않으신다. 결국 욥이 겪은 고난의 원인은 비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서 욥과 욥기를 읽는 독자들은 고난에 대한 이해의 태도를 바꾸게 된다. 이것이 욥기가 보여주고자 한 메시지이다. 즉 고난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되었을 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해의 범주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의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게 밝혀지게 된다(롬 8:28).
욥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다시는 예전과 같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고 전혀 생각을 하지 못했다(욥 14:7-9). 욥은 자신의 인생의 기운이 쇄하여 마침내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단정을 내렸다(욥 16:22-17:1).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욥의 분노는 사라졌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3)는 말과 같이 욥에게 새로운 변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욥은 하나님의 길과 성품 그리고 창조의 능력과 재주, 주권적인 통제와 섭리적인 돌봄과 사랑을 깨닫는다(욥 42:5). 그리고 자기를 낮추는 표시로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를 한다. 아무도 하나님을 비난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아무런 의무를 가지시지 않다는 사실은 욥의 의문을 사라지게 했다. 또한 비록 욥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길이 완전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게 되었다(시 18:30).
이제 하나님은 욥을 각별하게 대우하신다. 여호와이신 하나님은 욥을 가리켜 “내 종”이라고 기꺼이 호칭하신다(욥 42:7-8).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신뢰하신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욥의 위치를 회복시키셨다는 선언이다. 비록 욥이 하나님과 논쟁을 시도했지만 지금 욥은 그 교만을 철저하게 회개한다(욥 42:6).
그 가운데서 욥은 절대로 하나님을 비난하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종의 위치로 회복된 욥은 친구들을 변호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위해 부름받는다(욥 42:8-9). 이것은 중보자로서 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난 이전보다 두 배의 복을 욥에게 주심으로 욥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하시었다. 고난의 문제, 그 끝도 없는 질문은 이렇게 끝이 난다.
고난의 목적에 대해 욥의 친구들은 ‘징계’라고 정의한다. 욥은 ‘멸망’으로 해석한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망시키시려고 작정했다고 주장하였다. 엘리후는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교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첫째, 그것은 등장 인물들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문제였는데 고소하는 자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욥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에 도전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무지함을 드러낼 뿐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비록 욥이 고난받은 일에 대해 하나님으로부터 한마디 설명을 들은 바 없을 지라도 욥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대해 더 깊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다.
욥기 저자는 이러한 욥의 변화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결코 도전받는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신비에 속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자비하고 유익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 말을 욥기 기자의 말로 바꾼다면 “생각해보라. 비록 의인이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다고 하자. 그 고난은 우리의 지혜로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가 장차 누리게 될 영광에 가히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욥도 그러했지만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고난받으심을 생각한다면 그 앞에서 우리는 그저 잠잠히 입을 다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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