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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의 사상은 종말론적 보응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송영찬목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6. 3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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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의 사상은 종말론적 보응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욥과 세 친구들 사이의 변론에서 우리는 특이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세 친구들의 변론에서는 그들이 한번도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욥의 현실만을 보았다. 그 뒤에 계시는 하나님에게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반면 욥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호소하고 때론 불평을 토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법정에서 다투는 것처럼 싸우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욥이 하나님과 영적 투쟁의 전쟁터에 서 있는 투사와 같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를 행하듯 하나님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는 용사로서의 욥을 발견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나설 것을 과감하게 요구하기도 하고,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말씀하여 주실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철저하게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이로 인해 욥은 극도로 고통과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여기에서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의 욥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욥은 지칠 줄 모르는 전사였다.


욥은 하나님과의 외로운 투쟁을 전개해 가면서 하나님이 중재자(חיכומ)가 되어 주실 것을 요청하였고(욥 9:33) 법정에서의 증인(דהשׁ)이 되어주실 것을 요청하였으며(욥 16:19) 마침내는 보수자(לאג)가 되어 주실 것을 요청했다(욥 19:25).


욥이 하나님께 요청한 것은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감히 요구할 수 없는 당돌한 요구였다. 심지어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욥 9:24)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불의를 행하셨다고 억지를 부린다. 이런 억지는 시편 73편이나 예레미야 애가 3장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불평을 토로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는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1. 욥은 자신의 의를 맹세할 정도로 당돌했다(욥 27:2)


욥은 하나님께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그 소송에서 하나님께 대변할 중재자를 요구한다. 그러면서도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무고하다는 사실을 아신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때문에 하나님이 증인이 되어주실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소송이 혹시라도 잊혀지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리고 자기의 피가 땅에 묻혀 덮혀질까 걱정되었다(욥 16:18-22). 그래서 급기야 보수자(לאג)를 요청하기에 이른 것이다(욥 19:25).


욥에게 있어 이런 과정은 자기 정화(katharsis)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가 공의보다 크다는 사실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굴복하고 만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께서 어떤 섭리를 가지고 고난을 주시지만 장차 이 고난이 끝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모든 의혹이 풀릴 것을 고백하기에 이른다(욥 23:13-14). 그렇기 때문에 욥은 전능자의 사심을 가리켜 자신의 순전함을 담대하게 맹세할 수 있었다(욥 27:2).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욥 27:6).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자신의 생명과 명예와 양심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신감은 욥이 믿고 의뢰하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초한다. 욥은 하나님이 주권적인 지혜와 권능자이시며 공의보다 은혜가 크신 분임을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구약에서는 맹세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레 19:12). 특히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성품에 누를 끼치는 어떠한 형위라도 금지되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예수 그리스도 역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마 5:34-36)고 하심으로 맹세를 금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3-64) 하시면서 맹세를 하신다. 이것은 맹세에 대한 근본적인 속성을 밝혀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금하신 맹세는 거짓 맹세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이나 심지어 자기 머리로 맹세했다는 구실로 맹세한 바를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맹세는 곶 그것이 사실이며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맹세가 필요치 않으신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은 만유를 다스리시는 통치자시며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이 세상을 심판하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말(word)은 곧 실체(reality)이고 행함(action)이다.


2. 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적 성품을 의뢰했다(욥 27:3-6)


욥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는 죄악에 대한 보응이며 다른 하나는 의에 대한 보상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보응적인 의’이고 후자는 ‘하나님의 보상적인 의’의 속성이다. 그리고 이 속성은 동질적이며 동시적이다. 결코 분리해서 작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는 창조언약에는 공의의 두 가지 속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서 사망에 이르게 되는 보응적인 의와 먹지 않음으로서 생명을 누리는 보상적인 의가 그것이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는 원리의 근간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백성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상적 의’의 속성에 따라 그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언약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보상적 의의 속성에 따라 그의 백성들은 신앙의 용사로 인정을 받았다(히 11장).


시편 기자가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143:1)라고 한 것 역시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적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신앙의 표현이었다(시 4:1; 35:24 참고). 그들은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구원의 약속을 상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욥은 이 사상을 바탕으로 “결코 내 입술이 불의를 말하지 아니하며 내 혀가 궤휼을 발하지 아니하리라”(욥 27:4)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실성을 증거한다. 욥은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을 주장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자녀임을 증명해 줄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범죄한 아담에게 주신 은혜언약이나, 노아에게 주신 보존의 언약이나,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 안에도 역시 두 가지 측면의 공의적 속성이 담겨 있다. 그리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시내산 언약에서는 이 두 가지 속성이 명백하게 언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가 친히 세우신 새 언약의 성취였다(마 26:28).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여주셨다(고후 3장).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중보자로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보응적인 의’를 만족시켜 드렸다(히 9:1, 15, 18-19; 12:24).


아울러 새 언약 안에서 그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덧입을 수 있도록 하셨는데(눅 22:20; 고전 11:25) 이것은 하나님의 ‘보상적 의’의 속성이다. 이에 근거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며(시 19:11; 잠 13:13) 이 땅에서 번영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출 20:12; 레 25:18-19).


특별히 신약에서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복음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상급이 주어질 것을 말하고 있는데(마 10:41-42; 막 9:41) 이것은 믿음을 포기하게 만드는 시련을 극복한 성도들에게 주어질 것이다(히 10:35; 요이 8). 이 상급은 영원한 구원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마 25:34; 계 11:18).
이런 점에서 욥은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않을 것”(욥 27:6)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으로 언젠가 욥의 무고함을 해소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욥의 공의의 신학은 다분히 종말론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소발(욥 20:5; 21:7)이나 그의 친구들이 말하는 현세의 보응 신학(고난을 받는 것은 죄악 때문이다)과는 구별된다.


3. 욥은 대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있다(욥 27:7-22)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전지전능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보응 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무고한 자신을 대적하는 행위는 불의이며 하나님은 불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욥 27:7).


욥은 이제 불의한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저주가 무엇인지 소상하게 그 내역을 밝힌다. 그것은 불의한 자가 죽을 때 하나님을 찾을지라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욥 27:9-10). 그들은 무고한 욥을 하나님께서 징벌하신다고 주장하고 욥에게 죄가 있다고 거짓 증언을 한 자들이다(욥 27:11-12). 그리고 욥은 악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징벌을 나열하고 있다(욥 27:13-23).


일부 학자들은 이 징벌 내역은 소발의 발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발에게 세 번째 발언의 기회를 주고자 한다. 그러나 악인이 즉각적인 징벌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소발의 주장(욥 20:5; 21:7)과는 달리 욥은 종말론적 보응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은 욥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본문에서 저주를 말하는 욥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는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의 이 말은 산상수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에서 ‘저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저주는 개인적인 보복이어선 안 된다(롬 12:19). 하나님은 완고하고 패역한 무리들을 결국 멸하시고 말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적에게 하는 저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방식이어야 한다(신 28장).


둘째, 저주는 대적자들을 회심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 한다(살후 1:6-9).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이 영원한 멸망에 도달하기보다는 그들이 회개하도록 인도하기 위함이다(롬 2:2-4). 오히려 대적자들이 형벌을 통해 하나님을 찾게 된다면 그 형벌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오히려 가벼운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악인의 최후는 심판이라고 보증해 주고 있다. 때문에 욥은 악인이 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것은 그들의 최종적인 운명이 아니라고 경고한다(욥 27:19-23). 이것은 악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당한다는 소발의 주장과는 다르다. 오히려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자들을 심판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따라서 악인을 향한 본문의 저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욥의 앙갚음을 대변하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욥은 대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에서도 그 정신을 찾을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욥의 신학 사상이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욥의 사상은 종말론적 보응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뱀에 대한 저주(창 3:14), 에발산에서 언급한 저주(신 27:1-9)는 하나님의 언약과 연관되며 종말론적 사상을 담고 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으심 되었다고 증언한다(갈 3:13; 신 21:23).


우리는 모두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를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눅 6:28)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누구로부터 저주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저주의 상징임과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에게는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졌음을 받은 상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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