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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Maranatha)에 담겨 있는 의미> 송영찬목사

송영찬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7. 9. 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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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Maranatha)에 담겨 있는 의미>

한글 성경에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개역) 또는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2, 개역개정)라고 번역하고 있는 ‘마라나타’(Maranatha)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이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1.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마라나타’(Maranatha)

이 단어는 바울 사도가 주님의 위대한 영광으로 고린도전서를 마무리하면서(고전 16:21-24) 사용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인사말(고전 16:21-24)은 마치 이 서신을 마치면서 봉인을 하는 것과 같아서 일종의 언약 체결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특히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혹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고전 16:21-22)는 말은 마치 고대 언약 체결식에서 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것을 연상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주를 받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에는 지, 정, 의로 표현되는 인격적인 감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전심으로 마음을 쏟아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멸망만이 남을 뿐이다. 반면에 이 말은 주를 사랑하는 것만이 최종적인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약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개역 성경에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라고 번역된 ‘마란 아타!’(Maran atha!)를 외치고 있다.

이와 관련해 KJV는 한글개역성경과 같이 “If any man love not the Lord Jesus Christ, let him be Anathema Maranatha”(KJV)라고 번역하고 있다. 반면에 NIV는 한글개역개정성경과 같이 “If anyone does not love the Lord--a curse be on him. Come, O Lord!”(NIV)라고 번역하고 있다.

2. ‘마라나타’(Maranatha)에 담긴 의미 이해

‘마라나타’(Maranatha)에 사용된 아람어 ‘아타’(???)의 시제는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주께서 오셨다, 주께서 오신다, 주께서 오시고 있다’는 세 가지 시제를 가질 수 있다.
동시에 이 단어는 서술형, 명령형으로 볼 수도 있다. 곧 ‘주께서 오신다’ 또는 ‘주여 오시옵소서“로 번역이 가능하다.
또한 이 단어를 완료형으로 보게 되면 미래의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 표현하는 예언적 과거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 ‘주께서 오셨네!’ 또는 ‘주께서 오시네!’ 또는 ‘주여, 오소서!’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G. Campbell Morgan, 고린도전서 강해, p. 323).

칼빈은 이 단어를 ‘아멘’이나 ‘호산나’와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마란 아타!”(Maran atha!)라는 단어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말에서 ‘저주를 받을지어다’(Anathema)를 강조하고 확증하는 감탄사와 같은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마라나타’(Maranatha)는 ‘파문, 저주’(Anathema)의 의미를 강조하고 선포하여 확증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나는 저주하노라’ 혹은 ‘저주를 선포하노라’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J. Calvin, 고린도전서, p. 484-485).

3. 언약 체결식을 상징하는 ‘마라나타’(Maranatha)

어느 경우이든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주님’이며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신다. 이것은 허구(虛構)가 아닌 사실을 강조한다. 동시에 주님의 최종적인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 사도는 앞선 저주의 선언에 이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3-24)라고 복을 선포하고 있다. 이때 복의 선포는 앞선 저주의 선포와 반대의 개념을 가진다. 곧 그리스도의 저주의 대상은 멸망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의 대상은 영원한 생명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는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와 전혀 반대의 개념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be with you, 고전 16:23, KJV)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재차 확증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사랑이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My love to all of you in Christ Jesus, 고전 16:24, KJV)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바로 앞에서 선언한 ‘나는 저주를 선포하노라’(Maranatha)는 선언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 개념을 가지게 된다.

이처럼 서신을 마치면서 바울 사도가 수신자들을 향해 복과 저주를 그들 앞에 놓는다는 것은 이 서신으로 고린도 교회가 언약에 참여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 사도 역시 바울 사도와 동일한 개념으로 요한계시록을 마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He who testifies to these things says, "Yes, I am coming soon." Amen. Come, Lord Jesus.
The grace of the Lord Jesus be with God's people. Amen.
(계 22:20-21, KJV).

이때에는 신구약 66권에 대한 언약체결식과 같은 의미도 함의된다.

4. 마치는 말

이제 고린도 교회와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달려 있다.
동시에 이 복과 저주의 선언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는 바울 사도의 선포를 기억하게 한다. 이처럼 우리는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만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가 복을 받아 저주가 아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이며 그리스도의 공로이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죽도록 서로 사랑을 베푼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우리에게 자랑이나 공로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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