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49-56, 위로의 근거 | |
1. 20여년전, 세계화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다. 그때에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비판이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 당연한 듯 우리는 세계화된 세상에 산다. 간간히 다른 나라를 여행한 사람들의 입에서나 ‘어디를 갔더니 거기에서 우리나라 ㅇㅇ 기업 이름이 있는 간판을 봤다’정도의 말이 있었던 때와는 달리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상품이 있고, 우리나라의 기업이 있다. 문화도 하나의 상품이 되어 세계로 뻗어가고, 다른 나라의 문화도 우리나라에 하나의 상품이 되어 들어온다. 텔레비전에 우리나라에 사는 외국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에서 생활하는 이야기가 방송되는 지금은 정말 세계회된 시대이다. 이런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경쟁 안에 있다. 경쟁이 만연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탑을 쌓아간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라고 말하며, 자신들의 탑을 쌓는다. 엄청나게 화려하고,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사람의 권리가 중요시되는 시대에 살지만, 우리는 그 시대 안에서 끊임없이 깨어진 사람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사람됨을 포기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시대 안에 우리는 산다. 복음을 받고 즐거움과 기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로 인한 무한 경쟁의 시대 안에서, 그리고 우리 스스로 쌓아올린 탑으로 만들어진 가치와 삶의 기준에 의해 우리의 마음은 돌밭이거나 가시밭이다. 그래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막 4:17)’가 되거나‘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막 4:19)’가 된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갖는 고난이고, 우리는 결국‘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가 될 수밖에 없다.
2. 이런 현대인들의 상황은 어느 시대나 같다.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개혁이 한참 일어나던 그 시대에도 그리고 17세기 유럽 사회에서도 혹은 해방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도 같다. 그래서 누구나 아픈 삶을 산다. 시대적인 요구에 뒤떨어진 것 같아 불안해하기도 하고, 삶의 무게에 눌려 염려와 세상의 유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혹은 그리스도인으로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력 다가서는 환난과 박해 앞에서 굴복하기도 하는 삶을 어느 시대에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시 23:4)’같이 살아가는 삶이 위안을 얻은 삶이고, 이런 위안은‘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라는 고백을 바탕으로 가능하다. 즉, 현대와 같이 위험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흔들리지 않는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다윗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라는 고백은 그래서 다윗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열쇄가 된다. 종교적인 혼란으로 고통스러워하던 16세기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유일한 위한의 근거를 예수님께 찾고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씻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보호하시며, 성령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 답에서). 그리스도의 것이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말이다.
3. 위로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르시우스는 위로는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서로 대비시키는 특정한 추론의 과정의 결과로 생기는 것으로, 이 선을 정당하게 고려함으로써 우리의 비통함을 누구려뜨리고, 인내로 악을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시편119편을 쓴 시인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19:50-51)’라고 말한다. 시인이 당하는 고난이나 삶의 괴로움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해 얻는 기쁨을생각해보니까 그것이 위로가 되었고, 주의 말씀이 그 고통을 이기게 했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시인은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시 119:52)’다고 말한다. 세상의 유혹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따라감으로 스스로 위로를 얻었다는 말이다. 현대가 경쟁과 여러 가지 삶의 층에서 느껴지는 갈등으로 인해 고뇌하고 힘들어하는 시대라면, 그런 상황에서 받는 위로는 삶의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그리고 결코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얻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확고하게 우리 안에 만들어진다. 그래서 시인은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5-56)’라고 노래하고 있다.
4.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가정을 만든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 적절한 사회 망을 만들며 살아간다. 문제는 많은 일을 하고, 열심을 내면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들 스스로 느껴지는 삶의 무게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함은 요원하기만 하다. 도리어 삶의 무게에 눌려 고난스러운 날들을 보낸다.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고, 현대인들이 가질 수 있는 위로의 바탕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말이다. 시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2)’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 안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위로를 얻게 된다. 삶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말씀을 사모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선교회 대표) |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770&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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