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무의미한 중언 부언의 기도(배현주목사

배현주목사(고양)

by 김경호 진실 2018. 6. 5. 10:58

본문

무의미한 중언 부언의 기도(배현주목사)

선지자 이사야는 1장 15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시는 바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신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이 두 본문은 평행을 이루고 있다. 두 본문의 내용을 연결시켜보면 전반부는 ‘너희가 손을 펼 때에’와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내가 너희로부터 눈을 가리우고’와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손을 펴는 것은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눈을 가리우는 것은 듣지 않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간구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듣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하는 것이다. ‘손에 피가 가득 한 것’은 범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부당하게 사람을 압제하고 핍박하며 괴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하여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 29장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심각한 부패는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하나님 앞에서 위선자가 된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심각한 이유였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자들은 가장 먼저 자신들의 ‘손’을 깨끗하게 해야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맡은 직무를 거룩하게 수행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προσε?χεσθαι ?πα?ροντα? ?σ?ου? χε?ρα?)’고 디모데 서신에서 증거하였다(디모데전서 2장 8절). 모든 불의와 불법과 탈법을 일삼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 그런 추한 손을 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많은 기도가 될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진심으로 간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손에 피가 가득한 체로 간구하기를 원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눈을 가리우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은 그 기도 드리는 기도의 방식 때문이 아니라 그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신자들의 부패하고 타락한 심령의 상태 때문이다. 그들의 외식과 가식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더럽히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무지’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이스라엘은 외모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였고 자신들의 물질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룩한 마음을 요구하셨고 그들의 중심을 받으시고자 하셨다.

선지자 이사야는 1장 16절에서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하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죄를 멀리하는 것은 타인의 훈계나 권고 혹은 외부의 어떤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정결한 양심을 갖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이 그 마음의 돌이킴을 받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씻으려고 해서 씻어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깨끗하게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그들에게 그런 거룩한 심정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 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거룩한 심령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 일을 시작하시고 주도하시고 이루어서 결말을 지으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한분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가 사람의 마음을 변화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는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וּכּ?? וּ???)’는 것은 그런 자발적인 심령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심어 주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만 가능하다고하는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 다음 구절에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고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마태복음 6장12절)”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바로 이 기도의 이런 부분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행하여야 기도의 열납을 받을 수 있는 가를 증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드리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으로서 기도 할 때 그 기도가 열납이 되는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1장 17절에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에 대하여서 증거하십니다.

첫번째 ‘선행을 배우라’고 하는것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씀하고 있는 ‘선행’은 인간의 기준에서 선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행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율법에 대한 반역에서 부터 타락하였기 때문 이다.

두번째 ‘공의를 구하’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표현으로 ‘정의를 구하라’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공평하게 모든 자에게 실행되며 그 법도가 어그러지지 않고 신실하게 준행되는 그런 사회를 이루라고 하시는 것이다. 공의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가장 먼저 자신이 그런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세번째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부당하게 배척당하며, 공평하지 못하게 대우 받는 모든 자들은 곧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학대 받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을 학대 하는 자를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라디아서4장29)고 증거하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들을 핍박하는 무리들은 교회밖에 있었다기 보다 교회 안에 있었다. 초대 교회 시대에 유대교가 초대 교회를 핍박하였으며 종교 개혁 시대에는 로마 카토릭 교회가 개혁 교회를 핍박하였고 이제도 그와 같은 현상은 변함이 없어서 거룩한 성도들을 위선과 허례에 빠져 있는 무리들이 핍박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갖고자 헛된 권세를 가지고 ‘성령으로 난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증거한대로 ‘우리가 자유자다’고 하는것이다.

진리가 없는 자들의 횡포가 잠시 우리를 뒤엎고 심히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어둠 처럼 곧 사라지고 모든 고통과 어려움울 위로하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님으로 등극하실 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있다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죽는 그 날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과 같은 것이다. 다만 우리의 죽음은 한 개인의 심판이지만 주님의 재림은 모든 육체에 대한 심판이다. 그때 주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홀연히 일어날 것이요 모든 행악자들과 술객들 그리고 음행하는 자들을 주님께서 영원히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부당하게 사람을 핍박하는 자들을 ‘육체에 난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런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학대 받는 자들을 도와주는’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신다. 그것은 ‘성령으로 난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네번째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그 당시 ‘고아와 과부’는 경제 활동에 종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가 상징하는 표상은 모든 가난한 자들이다. 이들을 위하여서 공평하게 신원하고 변호하는 그런 사회가 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모든 자들에게 일정하다. 그분은 결코 누구에게도 불공평하게 대우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는 자신의 영원하신 작정안에서 모든 자들을 가장 공평하게 대우하신다. 그 하시는 모든 사역은 공평이며 진실 무망이다. 참으로 주님의 밝은 진리의 빛을 받은 자들은 얼마나 하나님께서 공평하신 분이신가를 알게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모세는 증거하기를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고 하였으며 (신명기32장4절) 또한 그와 같이 선지자 느헤미야는 증거하기를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느헤미야9장33절)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평하시나 인간은 불공평하며 하나님은 정의로우시나 인간은 정의롭지 못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길이 높고 심오하며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서 인간의 길은 저급하고 전적으로 오염되고 타락하였으며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타락한 백성들에게 ‘나의 길과 너희들의 길이 다르다’고 증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완전하시고 높으신 뜻 앞에서 모든 인간은 오직 예만 되고 아니오는 허락이 되지 않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인간이 해야할 바는 순종이다. 그뜻을 깨달은 자가 행하여야 할 것은 그의 뜻앞에 부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경건한 자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야고보서1장27절)고 하였다.

첫번째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라(επισκεπτεσθαι ?ρφανου? κα? χ?ρα? εν τη θλιψει αυτων)’고 하는 것과 두번째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라(ασπιλον εαυτον τηρειν απο του κοσμου)’고 하는 것이다.

첫 번째 것은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참으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이웃의 가난을 돌아보지 않는 다면 그것은 헛된 경건이다. 참된 경건은 행동하는 경건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경건이다. 하나님께서 경건하시다고 인정하는 자들은 바로 모든 자들을 소외 되지 않도록 삶의 의미를 심어주는 것이다. 한 사회의 ‘고아와 과부(?ρφανου? κα? χ?ρα?)’는 소외된 계층이다. 그러므로 ‘고아와 과부가 표상(?ρφανου? κα? χ?ρα?)’하는 것은 소외이다. 물질의 가난함 만을 단순히 이 본문에서 ‘고아와 과부(?ρφανου? κα? χ?ρα?)’로 표상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에서 ‘제도권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소외된 모든 자들을 표상하고 있다고 하는것이다. 우리의 이웃이 소외 되었다고하는 것은 그 만큼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야할 이상의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되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것이다.

그러기에 참으로 경건한자들은 소외된 자들의 소외를 제거하고 그들을 어떻게 하든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께 받은 것이 분에 넘치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의 것을 이웃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경건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이웃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다.

자신의 것 만을 챙기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아니하면 단칼에 베어버리는 비정한 행위는 성도들의 생의 모양이 되지 말아야한다. 가장 불쌍하고 가난한자 조차도 하나님 앞에 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없는 한은 그는 결코 경건한 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스라엘에게 책망하신 것은 이런 것이다. 그들의 기도가 헛되었던 것은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을 그들이 난도질 하였다고 하는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접고 그들은 자신들의 길을 간것이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는 그들의 자의적인 신앙 생활을 책망하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오라고 하신것이다. 율법을 알기 전까지는 결단코 그리스도를 알 수 없으며 죄악을 깨닫기 전까지는 결단코 주님의 거룩한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선지자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세아 6장 1-3)라고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기도는 헛될 뿐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경건한 자는 기도를 많이 하는 자가 아니라 단 한마디의 기도라도 그 대로 실천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이 짧어서도 아니고 그가 능력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와 우리의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신령한 축복을 가로채고 있는것이다. 그것을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지 않는 한은 결단코 하나님의 거룩하신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그런 것들이 선행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께 헛되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들은 미신과 어둠에 매여서 무의미(無意味)한 중언 부언의 기도를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뜻은 전혀 다른 곳에서 그들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직 그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고 돌이키기 전까지는 결코 하나님께 기뻐하실 만한 자들이 될 수 없었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WlQp/305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