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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시작함 (히11:8-16)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8. 9. 2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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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시작함 (히11:8-16)
  

성경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는 당연 예수님의 관한 말씀입니다. 물론 신구약 모든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임에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다음으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12장부터 25장까지의 말씀은 아브라함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사도바울도 아브라함이 어떤 인물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함께 읽고 있는 히11장에서도 아브라함에 관한 부분이 가장 길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에 대한 기사가 기록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인물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된 말씀들을 읽으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단연 최고는 그는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히11장의 인물들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강단에서 말씀을 들을 때 단순히 과거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가 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들을 때는 흥미진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을 들을 때 지금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지금 나와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옛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끝나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이 인물을 통해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를 연관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하게 같은 말씀으로 우리들에게 역사한다고 하는 신앙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할 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나갔다고 합니다.

11장 후반부부터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을 읽어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아주 잘 설명하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구속사 사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을 대한 말씀을 통해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그 일을 시작하실 때 그 사람을 먼저 부르십니다. 그리고 부르실 때 그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십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부모들과 같이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고 우상과 관련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는 자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고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먼저 부르셨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서 그가 어떻게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시작은 하나님의 주도권입니다. 우상을 섬겼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았다고 하는 그 삶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다고 하는 부르심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능력과 의지 때문에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먼저 부르셨다고 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세상에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이방신을 섬기고 한 인생을 살다가 마감한 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한 인생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벌레보다 못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만큼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그를 믿는 자들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은 죄인들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을 부른 것 같이 부르십니다.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에게 믿음이라고 하는 선물을 주셔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방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십니다. 어쩌면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더 명확한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실체를 직접 믿고 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차이가 없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오실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아주 중요한 믿음의 시작이었습니다. 오실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출발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출발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의 모든 후손들은 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에 자세하게 그리고 많이 기록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금 믿음으로 구원 얻는 신앙을 계속 말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친척들과 부모를 떠나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자신의 고향을 떠나 지시할 곳으로 갈 때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야 할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순종하여 갔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가야할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기 위해 주춤하였다면,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곳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살피기 위해 지체하였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가야할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였다고 하는 이 사실에서 참된 회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심할 때 거기에는 삶의 변화가 반드시 있습니다. 믿음은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면서 자신의 죄악 된 삶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옛 사람이 좋아했던 육신적인 삶의 모습에서 떠나기를 계속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른 곳에서 기록되지 않는 중요한 이야기를 하여 줍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난 이유 가운데 또 다른 이유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아브라함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었던 또 다른 성이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이 무엇이 길래 이렇게 순종하게 하였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브라함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또 다른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가지고 우리는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히111-3절을 이미 말씀하여 주신 것을 다시 한 번 들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신의 집을 떠날 때 사람들은 아브라함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려고 이렇게 이삿짐을 싸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고 말하고 그러나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릅니다. 하면서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날 때 사람들은 아마도 아브라함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야할지를 지시하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이라고 하는 땅을 향해 자신의 식솔들을 데리고 갑니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곳은 자신에게 있어 이방지역입니다.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그리고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가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성공적인 삶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인생의 고난 가운데서 그 여정을 되돌아본다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가나안에서 만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역경 속에, 자식도 없었던 그런 환경 속에서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에 만족을 가지고 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에 소망을 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자신의 마지막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모습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정말로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하나님이 준비하여 놓은 천국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성을 바라보고 살면 우리는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지고 살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하면 당연히 우리는 우리의 조상처럼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아브라함이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내용보다는 그들이 자신들의 본향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하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라에 대한 말씀도 그가 믿음으로 자녀를 얻었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낳은 후손들을 얻었고 민족을 이룬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민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하나님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이루시고 그 속에서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비록 약속을 받지 못하였지만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그렇게 증인으로 살다고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여 주신 새로운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믿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다 바라보고 확신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바라보았던 그 예비 된 성이 무엇인지? 우리들도 그 성을 바라보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은 새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한 영적 새 예루살렘 성은 천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상에서 있는 교회에서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우리들은 여전히 천상에 있는 새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확실히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해 놓은 새 성에 우리를 인도하실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 말입니다. 이 믿음에서 순종하는 행위가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정말로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같이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새로운 성이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환난과 고난과 역경 속에서 자신들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순교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다시 유대교로, 세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예비해 놓으신 수많은 약속들이 실제로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잠시 이 세상에서 삽니다. 하지만 영원한 도성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짧은 세상에서 편하게 살기 위해 주님을 버리고 세상과 함께 사는 것은 가장 미련한 짓입니다. 좀 있으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조상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제러마이어 버로우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거기에 약속된 말씀과 마주칠 때마다 그 약속에 손을 얹고 이것은 내 유업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내 것이며 나는 그것을 따라 살겠습니다. 라고 말해야 한다”. 성도에게 가장 큰 유업은 바로 하나님자신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업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석자체를 보지 못합니다. 보석을 둘러난 주변의 것들에 마음을 둡니다. 하지만 결국 보석이 없다면 그 주변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장 중요한 것, 우리가 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다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 예비해 놓은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3007&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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