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라 (히12:14-17) | |||
거의 20년이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1999년에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을 들었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나중에 이 학교에 다녔던 여학생이 총기 난사를 했던 학생에게 받았던 질문이 우리 한국교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캐시 버널이라고 하는 여자아이의 이마에 총구를 대고 살인자는 “하나님을 믿느냐?” 고 했습니다. 그 때 이 캐시 버널은 아주 단순하게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고 그 즉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이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료를 찾던 중에 그의 부모가 하는 말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자신의 딸이 죽기 2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캐시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딸에 대한 죽음으로 일어난 진정한 이슈는 캐시가 살인자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가 아니라 캐시를 이렇게 살인자들에게 맞설 수 있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그리스도인이 주를 위해 죽었다고 하면 그 모습에 아주 큰 감동을 받습니다. 대부분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순교자들의 모습이 그렇게 우리들에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주를 위한 고귀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가 죽는 그전까지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치며 살았는지에 대한 삶의 과정입니다. 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자들은 주를 위해 매일 자신을 부인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이것을 성령께서 말씀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현대교회의 아주 큰 병폐가운데 하나는 분명 결과주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은 반드시 복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사업들과 자손들은 잘되는 축복 가운데 살 것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며 충성을 다하라. 물론 이 말은 언 듯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 담겨 있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성도의 삶에 대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잘되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면 된다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따지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과정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당연히 우리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가에 대하여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뭐 어떻습니까! 남들보다 부족하게 살고, 좀 그렇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도 지금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위에서 살고 있다면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매일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자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갑작스러운 시험과 환난을 신앙이라고 하는 이 반석위에서 당연히 이길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무엇인가 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그 신앙 때문에 성도들이 당하는 박해와 순교입니다. 앞에서 읽었던 히12:2절의 말씀은 성도들이 받을 핍박과 박해의 전주곡처럼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라고 하는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연관되어 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위한 삶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도 이것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과 이웃에 대한 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 부지런히 말씀을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경공부 및 제자훈련이라고 하는 이 모든 훈육시스템들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경의 교리를 배우고 제자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신앙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의 지적욕구를 채우는 것 밖에 되지 않는 어리석은 짓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으로 인해 위선자들만 교회에 가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모습을 이미 심판받은 유대인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그 장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종교교육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는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교회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바른 신앙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타락의 원산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먼저 하나님은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원수들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악을 행하는 자들과 화평하라고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을 가진 모습을 나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공정을 나타내며 친절을 베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악인들에게 불친절하면 결국 다툼이 일어나고 말 것입니다. 특히 1세기 그리스도인은 핍박하는 자들에게 끝까지 친절을 베풀고 그들을 악의로 대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거룩함을 따르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신앙으로 나타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믿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시작한 사람은 거룩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그렇게 이끌기 때문입니다. 믿음 자체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거룩한 모습으로 성화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물론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사는 과정에서 넘어지고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계속 거룩해져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 완전한 거룩함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들에게 계속 거룩해져야 한다고 요구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그 말씀은 진리입니다. 결국 성도는 날마다 거룩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은 거룩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완전히 거룩해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따라야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자세하게 보면 예수를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화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화평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지만 거룩해지지 못하고 죄로 인해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을 이루지 못했다고, 거룩해지지 못했다고 성도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화평을 이루기 위해, 거룩함을 따르기 위해 사는 그 모습을 보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지만 위선자들은 화평을 이루기 위해, 거룩함을 따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배만 채우기 위해 화평한척, 거룩한 척 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계속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도들 간의 신앙의 의무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서로서로 영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덕을 위해 그리고 성도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 교제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약 성도들 간의 이러한 돌보는 일이 사라진다면 교회는 금방이라도 사탄의 노리개 감이 될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죄악에 빠져있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권면으로 다가가서 그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 빠져나오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성실하게 행하지 않으면 교회는 무너지고 화평과 거룩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모습이 교회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목사는 교인이 죄를 짓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교회를 섬기고 양떼를 살피는 목사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목회에 대한 바른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직장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안녕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 성도의 삶을 돌보고 바르게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런 자들이 목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수치이며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도록 서로 권면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모든 사역과 과정을 의미합니다. 창조 전에 선택하시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 부르시며,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 가운데 보내신 구원의 모든 사역들을 기뻐하고 찬송과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쓴 뿌리가 나서 많은 사람들을 더럽게 할 것입니다. 쓴 뿌리가 난다고 하는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저런 핑계를 만들어 예수를 믿는 신앙을 버리는 것입니다. 쓴 뿌리는 복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인하면 누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겠습니까? 쓴 뿌리가 생겨나면 신앙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진리를 의심하게 됩니다. 정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구주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지? 정말로 눈에 보이는 대제사장이 아닌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 중보사역을 하시고 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결국 교회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을 화평하게 만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거룩한 삶을 위해 성도의 노력을 무력화시키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고백은 성경에서 만들어진 내용들입니다. 하지만 거짓교사들은 성경에서 만들어진 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것을 가르칩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게 되고 결국 논쟁이 발생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과 화평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진리를 왜곡하여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과 화평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자와 같이 진리를 강력하게 외치고 사수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교회에 목사와 교사, 그리고 장로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삽니다. 옛 사람의 모습대로 그대로 살려고 합니다. 음행하는 자는 계속 음행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죄의 유혹에 넘어져 다시 일어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그렇게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교회에서 쫓아 버려야 합니다. 음행하는 죄는 단순히 육체적인 음행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 영적인 음행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음행이란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가려고 하는 것을 음행의 죄를 짓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에서의 망령된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삭의 큰 아들 에서는 자신의 장자의 직분을 하찮은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 망령된 자라고 하는 것은 신성한 것을 무시하고 경시하여 깔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에서는 거부하고 하찮은 것으로 여겼으며, 자신의 아버지 이삭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도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결국 장자의 상속권으로 주어지는 축복을 보잘 것 없는 식물 한 그릇에 팔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자신이 누려야할 하나님의 복을 야곱에게 팔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형 에서를 속였다고 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보잘 것 없는, 어떻게 보면 잠시 배고픈 것을 이기기 위해 가장 큰 복을 발로 차 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가장 귀한 보석을 가진 자가 십 원어치도 안 되는 음식부스러기와 바꾸는 어리석고 미련한 짓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에서의 망령된 행동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삶에 일어나는 고난 때문에, 정말로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 배를 주리고 굶주림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를 믿지 말고 다시 돌아오면 정말로 빵을 준다고 유혹하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그것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빵 한 조각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예수를 부인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복을 발로 차 버리고 빼앗긴 자는 다시 눈물을 흘리며 장자의 상속권을 구하였지만 결국은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에서처럼 망령되게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역시 있습니다. 언제나 참된 신앙에서 벗어나 자신들이 원하는 길로 나가는 자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단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복음을 마치 진리인양 믿고 가르치는 자들은 회개하여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계속 자신들이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정말 복음인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지옥의 자식 되게 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는 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사는 자들은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시 일어나 믿음으로 삽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지만 완전히 넘어져서 옛 사람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선자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주 예수를 참되게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의 배를 위해 신앙을 배신하고 망령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녀들에게만 내려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성도들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중심까지 다 보시고 계십니다. 이런 우리의 한계로 인해 우리는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되지만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는 계속 가르치고 전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으면 끝까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계속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는 윤리를 강조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이웃을 위해 섬기고 사는 그런 삶을 강조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망령되게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먼저 심판하십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거짓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오늘 히브리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위해 성도가 어떻게 판단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도 성도는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신앙 안에서 견고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에게만 계속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여기는 자들에게는 단 한 톨의 쌀알 같은 은혜는 내려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명심하고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며 이 예배 가운데 참여한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그 축복이 주어진 다는 것을 믿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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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3082&msection=2&ssection=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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