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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이루시기 위해(히12:1-2)

임진남목사(김제)

by 김경호 진실 2018. 11. 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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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 강단]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이루시기 위해(히12:1-2)
  

성도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원하시는 뜻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무엇이었는지 그 시대 사람들은 바르게 해석하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마찬 가지입니다. 신약시대 이후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히11장을 통해 믿음의 조상들이 살았던 시대를 보았습니다. 한 결 같이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 있었던 그 시대 속에서 오직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살았다고 하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또 다른 질문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믿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록된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음성이라고 하는 이 믿음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11장에서 사도는 이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지금까지 증거하였습니다. 이제 이 믿음으로 우리는 무엇을 또한 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믿음의 모든 조상들이 우리를 구름같이 둘러싸고 있는 증인들로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는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 가운데 둘러 싸여 있습니다.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우리는 늘 인식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내 자신입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늘 우리는 내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내가 기도하고, 내가 예배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렇게 라고 하는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의 지평이 넓어지면 우리는 를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었던 믿음의 조상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배웁니다. 그것을 통해 지금의 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환난과 고난 속에서 자신의 생명과 가족과 형제들의 생명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빼앗기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히121절 이하의 말씀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형경기장 한 가운데 서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11장에 수많은 증인들을 원형경기장에 있는 관중들로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다 경기장 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소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라고 소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신앙의 경주를 위해 무겁게 하는 것들과 얽매이게 하는 모든 것들을 다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경주를 완주하라고 소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미 경기장에 있는 모든 관중들은 다 믿음의 증인들입니다. 한 결 같이 소리를 외칩니다. 이러한 상황은 1세기 시대에 국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1세기 현대에도 여전히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가면서 우리의 신앙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본다면 믿음의 증인들이 허다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물론 1세기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무거운 것을 짊어질 가능성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그중에 가장 무거운 짐이 바로 율법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이 율법을 버릴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구주로 믿는다고 하지만 1,500여 년 동안 조상들이 지켜온 율법을 단 번에 버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믿고 자신들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쉽게 믿을 수 있는 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피가 동물의 피보다 더 뛰어나고 탁월하며 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모든 유대인들에게 가장 무거운 짐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세상은 율법아래에 처해 있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자신들이 정한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을 벗어나면 죽는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을 가장 무겁게 하는 율법을 벗어날 때 하나님의 아들을 온전하게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형경기장 한 가운데 서 있는 사람에게 허다한 증인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 무거운 것을 벗어버리라고 말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행할 경기에 임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버리지 못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율법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만이 구원을 주신다고 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친히 오셨기 때문에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인 율법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을 버리지 못하면 믿음의 경주를 할 수 없습니다. 가장 무거운 짐이 바로 율법입니다. 달리기 선수가 쌀 한가마리를 메고 어떻게 뛸 수 있겠습니까? 한두 발은 나갈 수 있으나 도저히 뛸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짐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끝까지 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는 것과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 된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이러한 삶을 계획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경주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저급한 복음주의 자들은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평탄한 대로로 인도해 주신다고 가르치지만 사실 우리가 임하고 있는 이 신앙의 경주는 어떤 길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때론 협곡일 수도 있고, 때론 말 그대로 좋은 길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써 완주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는 1등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빨리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마치 기복주의 자들이 가르치는 거짓 복음처럼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써 끝까지 하라는 것입니다. 1등도 없고, 꼴지도 없습니다. 살면서 남들보다 더 잘 살게 되었다고 박수를 쳐주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인내로써 경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는 것을 말해주었는데 한 가지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성도가 삶을 사는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명이라고 하면 좀 어떤 특별한 부르심만을 생각하기가 쉽지만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의 방식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착각 가운데 하나는 환난과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는 그저 믿음을 빼앗기지 않고 죽임을 당하면 이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교를 당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벗어버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 잘 믿으면 된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까지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물론 가장 무겁게 하는 짐을 벗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신앙의 경주를 하기 위해 늘 얽매이게 하는 죄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 가운데 하나는 성도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죄 문제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아담의 원죄와 모든 자범죄에 대하여 사함을 받습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아들의 피의 속죄효력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 아래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면죄부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에게 죄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변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에게 죄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분에게로만 가야 한다고 하는 것이지 죄가 남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는 주장이 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아가면서 죄의 유혹을 받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힘들게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도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육체의 선수들도 자신들의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최첨단의 과학이 동원된 신발과 옷과 훈련 등을 통해 실력을 향상시킵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자신의 신앙의 경주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 또는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조상들의 신앙에 대해 배울 때 우리의 신앙에 도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증거되는 복음을 계속 듣는 일들은 아주 좋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성도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과도한 인터넷 게임과 핸드폰 사용, 또는 성적이고 폭력적인 영상을 자주 보는 것들, 도박이나 마약, 돈을 쉽게 벌려고 하는 투기와 사기 등은 성도를 얽매이게 하는 아주 나쁜 것들입니다. 때론 우리가 즐기는 취미가 좋을 때도 있지만 지나치면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신앙의 경주에 장애물들이 될 수 있습니다. 장애물은 피하여 가면 되지만 죄는 훨씬 더 심각해집니다.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듯이 장애물은 선수의 기록의 나쁜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넘어지면 경기하는 선수는 다치고 급기야는 그 경기를 포기하고 맙니다. 이렇듯 얽매이기 쉬운 죄는 결국 성도를 넘어지게 하고 무너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의 삶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죄는 그 모든 것을 다 파괴하고 무너뜨립니다. 성경에 이러한 모습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다윗의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존경을 받던 그가 한 순간에 무너진 것이 바로 간음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아주 비참하고 그의 가문은 다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죄는 결국 여전히 오늘날에도 계속 성도들에게 유혹하며 다가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끝까지 죄의 유혹을 피하고 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전쟁에 소극적인 싸움은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적극적으로 싸워야 그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앞에 늘 있습니다. 세상의 왕은 죄입니다. 이 죄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늘 유혹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이 바로 이러한 영적 전쟁 가운데 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경주를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오늘날 현대교인들은 아주 다른 곳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미래의 일도 가르쳐 준다고 하는 거짓복음에 물들어 이상한 영적 체험을 하려고만 안달이 나 있습니다. 마치 그것이 기독교의 신앙인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한 번 우리 주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난무합니까? 성령체험, 성령의 역사, 성령의 권능, 불세례,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부흥회 광고, 안수하여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는 이러한 것에 관심을 갖게 하는 종교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환난과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서 주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창시자 이십니다. 믿음의 주라고 하는 것은 믿음을 만드신 분이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또한 믿음의 대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믿음과 성자 하나님의 믿음에 대한 내용을 바르게 구분하고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믿음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의 창시자이시기 때문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완성하셨습니다.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라고 할 때 온전하다고 하는 것은 완성하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이고 믿음을 완성하신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는 이 짧은 단어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표어와 같습니다. 성도는 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환경에 있든지 예수를 바라보는 신앙은 가장 위대한 성도를 낳게 할 것입니다. 스데반과 바울과 그리고 사도들, 그 후 수많은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자신에게 닥치는 고난과 환난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저 영광스러운 의의 태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순간마다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단 번에 벗어 버릴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는 것은 불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연상케 하여 줍니다. 하나님께 대항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으로 불 뱀에 물려 죽어갈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높게 달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조건 없이 이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는 자는 살아 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는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시 살아납니다. 비록 죄를 지어 깊은 구렁에 빠졌다고 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혜와 능력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께서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것입니다. 지난주 성찬식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자신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을 기뻐하시고 계십니다. 아버지 보좌 우편에서 오늘도 기뻐하시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잠시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심으로 자신이 누릴 영원한 기쁨을 취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안다면 성도는 당연히 잠시 고난당한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고난을 기꺼이 거부하지 말고 예수를 믿는 그 믿음 때문에 누릴 영원한 기쁨을 바라보고 소망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고 끝까지 이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율법은 그 세력을 잃지 않고 있고, 죄의 유혹은 날마다 성도들을 배도의 신앙으로 가게 하기 위해 온갖 세력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신앙의 경주에서 이탈하면 안 됩니다. 비록 더디고 늦어지는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더라도 우리를 위해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격려하고 환호하여 주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들을 붙잡고 계신다고 하는 이 진리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자신의 백성이 이 신앙의 경주를 완주하게 하시기 위해 친히 먼저 그 길을 걸어가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그리고 순간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 <현대 칭의론 논쟁>, <요한계시록 설교>(우리시대, 2018)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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