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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믿음은 사람보다 크다' 중에

믿음

by 김경호 진실 2018. 11. 23.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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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 1:20~21)


쉽게 읽으면 너무나 당연한 고백이고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고 너무나 당연한 헌신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살아서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 존재가 아니고, 내가 죽어서 하나님께 손해가 되는 존재도 아니다, 라는 것을 바울은 압니다. 그것은 바울 한 개인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심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무한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은혜와 긍휼이 넘치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나 하나 편든다고 무슨 표가 나며, 나 하나 방해한다고 한들 무슨 장애가 되겠느냐는 측면에서 한 이야기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은, 이 모든 일이 예수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작정과 일하심을 더욱 두드러지게 할 뿐이다. 나 하나가 있어서 십자가가 더 빛나게 되고, 나 하나가 없어짐으로 그 조명이 어두워지는 게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합니까. 하나님의 일하심과 신실하심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과 온전하심에 대한 사도 바울 자신의 궁극적인 항복 때문에 꺼낸 겁니다. 그래서 살든지 죽든지라는 말은 바울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위기선상에 지금 서서 걷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바울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내일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인되지 않는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가 감옥을 성한 몸으로 걸어 나가 햇빛을 볼 수 있을지, 아니면 여기서 죽어버릴지 사실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와 온 인류의 운명과 온 우주의 주인이시니 나 하나가 어떻게 된들 그것이 내게 무슨 손해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진정한 고백 내용입니다.


나는 아무래도 좋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일종의 체념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여 꺼내놓고, 어떤 눈치를 보려는 제안이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죽을 각오까지 됐습니다. 하나님 이래도 가만히 계실 것입니까 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기왕에 죽을 바에야 멋있게 죽자. 나는 죽어도 좋다. 뭘 벌벌 떨고 사느냐, 이렇게 쉽게 평범한 사람들의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닙니다. 기왕 죽게 된거, 멋지게 죽자 하는 장렬한 것도 아닙니다.


그가 한 이 고백의 귀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현실의 불분명함과 우여곡절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감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의 승리를 가지고 있으나, 슬플 때 울어야 하고 기쁠 때 웃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좌우하는 권세를 갖고 있지 않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유일한 권세자에게 순종하며 살게 된 현실의 어려움을 그가 자기의 육체로 겪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포기하지 않고 신앙을 지킴으로 극복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킴으로 이 현실의 고난을 내 몸으로 다 받아내겠다. 나 울겠다. 나 비명 지르겠다. 하는 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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