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9-14. 믿어야 보이는 것 | |
1. 신기루는 가짜다. 사막에서는 신기루를 따라가면 살 수 없는 것이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이다. 무지개는 사람들의 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빛이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옛 헬라식 사고방식으로는 보이는 것은 진리, 즉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주 면밀하게 보는 것은 잘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보는 법’을 배운다. ‘관찰’은 진리로 가는 아니, 최소한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이 된다. 보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따라다닌다. 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객관성을 띨 수 있다. 무게를 재고, 길이를 재고, 크기를 재는 일들은 객관적인 것이다. 그런 객관적인 일이 쌓여서 문명을 만든다. 한 걸음 더 나가 사람들이 보이는 것을 따라다니는 이유는 보이는 것이 가진 객관성 때문만은 아니다. 당연히 자기가 보는 것이 옳다는 ‘자기 확신’때문이다. 보는 것은 이런 자기확신 때문에 객관적인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더 세밀한 것을 보려고 하고, 더 크고 굉장한 모습을 보려고 한다. 그런 노력이 때로는 너무 주관적으로 흘러 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11:3)’라고 말한다. 보는 것이 다 진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즉, 보이는 것이 다 믿을만한 것이 될 수 없다. 2. 듣는 것 역시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듣는 것은 보는 것과는 다르다. 물론 듣는 것도 중요한 인식의 바탕이지만, 듣는 것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관심없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기가 들으려고 하는 것 외에는 듣지 않는다. 잘 듣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하고, 동의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말하는데 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비칠 때 이거나 싸울 때뿐이다. 싸움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고, 상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나 좋은 소리라고 해도 안 듣는 사람들은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르시우스라는 사람은 믿음은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한 지적 동의’라고 말했다. 이런 면에서‘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10:17)’라는 바울의 말은 시사적이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가복음4:9)’라고 말씀 하셨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명기6:4-7)’라고 이야기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이다. 반복적인 강론을 통해, 그리고 반복적인 들음을 통해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을 따라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열심히 들으며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뜻을 잘못이해 했다. 그리고 복음도 들을 귀 있는 자들만 듣는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3.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 사는 사람들, 특별히 유대인들은 그 삶 자체가 처절했었다. 계속된 민란과 그 민란을 제압하는 과정에서의 학살 그리고 그들에게만 있는 제사장 중심의 종교는 당시의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럽게 ‘메시야 대망’사상이 나왔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상이다. 메시야가 오면 자신들을 괴롭히는 로마를 처단할 것이고, 구약에서 보았던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될 것이라는 생각에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때가 차매 그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빌립보서2:6-8)’셨다. 많은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의하면 헤롯은 별을 보고 따라온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통해‘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마태복음2:6)’라는 미가서의 말씀을 헤롯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메시야 대망’의 결론이 보려고 하는 것대로 혹은 들으려고 하는 것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분명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이사야53:2)’라고 메시야의 모습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대망하는 메시야의 모습과 메시야의 역할을 자신들이 보고 있는 ‘세상의 왕’과 동일하게 생각했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냐는 통쾌하게 로마를 점령하고 자신들의 위상을 온 땅에 떨치게 할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왕으로 생각했다. 4. 오늘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원리는 믿음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말이다. 성탄이 다가오면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있다. 세상 사람들이 성탄을 기다리는 것과는 다른 기다림이 우리에게는 있고, 그 무엇을 기대하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이 점점 세상과 같아질 때 우리도 점점 헤롯 대왕의 말을 듣고 메시야의 오심을 이야기했던 당시의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의 오심이 왜 기쁨인지 예수님의 오심으로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를 잊어버릴 수 있다. 올해 성탄을 믿음으로 맞이하기를 기도하자. 연락처 ☎070-7817-3627, 010-8952-3627(오성환 목사) E-Mail : shsiny@hanmail.net 주소 : 광주시 서구 계수로51번길 4-4(쌍촌동 1318-1) 2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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