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6일의 창조’를 믿는가?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에 이미 작정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그 자신을 위하도록 만드셨다. 그러므로 6일 창조는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성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하나님의 전능성 가운데서 실행된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는 기독교에 대해 참으로 급속하게 현실적 문제들에 답변할 것을 요구하는 분위기다. 이는 서구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주제로 보였던 동성애에 대한 인정의 문제랄지 종교인 과세의 문제를 통해 국가와 종교(특히 교회)와의 관계설정이 어떻게 자리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가 동시다발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런 가운데서 최근에는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와 관련해서 ‘창조과학회’의 주장이 과학적 객관성을 지닌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그야말로 툭 던져지듯이 제기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 신앙은 이 사회의 그러한 변화들과 일방적인 질문에 대해 전혀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밀양』이라는 영화의 여주인공이 교회에 나간 이유가 그저 우연과 알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피안적인 안도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던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기독교는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한 객관적 변증보다는 개인적인 안심입명(安心立命)에 치중해왔었기 때문에 이 사회가 제기하는 갑작스런 물음들이 전혀 뜬금없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천당 가면 된 것이지, 동성애 문제는 무엇이고 종교인 과세니 창조과학이니 하는 문제 따위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화론에 바탕을 둔 세상의 기원과 관련한 참으로 어려운 물음에 대해 장로교회들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4장에서는 “창조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이미 오래 전(최소한 1647년)부터 성경이 말하는 창조를 바탕으로 답변하고 있는데, 제1절에서 이르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께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그의 영원하신 권능과 지혜와 선하심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태초에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엿새 동안에 만드셨으니 모든 것이 매우 좋았다”고 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에서는 제15문에서 “창조의 사역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하는데, 이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창조의 사역이란, 하나님께서 태초에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6일의 기간 안에 모두 매우 좋게 그 자신을 위하여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무로부터 만드셨”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장로교회들의 신앙의 표준문서들에서는 공히 “6일의 기간”에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특별히 대교리문답 제15문의 대답에서는 “…6일의 기간 안에 모두 매우 좋게 그 자신을 위하여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무로부터 만드셨”다고 하여서 6일 창조에 대한 조금의 양보나 절충의 여지도 두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과학계의 입장은 우주의 나이가 수십억 년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학계의 입장에서 볼 때에, 단 6일 만에 모든 천지만물들이 창조됐다는 믿음은 납득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과학계의 입장 가운데서는 지구라는 단 하나의 생물계 안에서조차 한 종의 진화가 이뤄지는 데에 수천, 수억 년의 시간이 요구되는데 어찌 우주만물이 단 6일 동안에 창조되었다고 볼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장로교회들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에서는 왜 6일의 창조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을까? 기본적으로 그것은 성경이 분명 6일의 창조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인데, 특별히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목적을 가지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언급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전능성과 불변성에 상당한 손상을 초래할 것이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은 적잖은 (이론상의) 손실을 입게 된다.
한편 성경의 ‘날’(히브리어 ‘욤’)에 대한 여러 해석적인 견해들이 있기는 하지만,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에서는 분명 6일 만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들을 창조하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세상의 창조에 관해 계시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복잡한 문학·문법적인 수사법을 알고 서야 비로소 이해가 가능한 방식으로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하루들로 이루어진 6일의 창조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더구나 모세에게 계시하신 원래의 말씀과 이를 기록한 성경계시 사이의 차이로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오히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은 성경의 계시 뿐 아니라 보존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반드시 전제한다. 무엇보다 창조에 대한 답변들은 하나님의 속성인 전능성과 불변성을 바탕으로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시행으로서의 두 국면(창조와 섭리) 가운데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6일의 창조에 대한 불신은 결국 하나님의 작정의 시행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소급되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세상을 창조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섭리(燮理)’, 즉 세상 모든 것들의 ‘보존’과 ‘통치’에 적합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그런 하나님께서는 섭리에 합당한 절차로서 6일의 창조를 작정하신 것이다. 6일 창조는 바로 그러한 적합성이 내포되어 있는 명백한 질서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반면에 세상의 창조에 긴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창조의 절차(질서)에 종속된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주(Cosmos)라는 복잡한 세계가 있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이상적인 결합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창조의 질서라고 한다면, 즉 하나님께서도 시간과 공간의 조화와 질서에 구에를 받아야만 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최소한 시간이 확실하게 되기 전까지는 전혀 작정을 완성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럴 경우 하나님의 작정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것이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속성(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성과 불변성)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연관성 가운데서 우리 장로교회들의 신앙의 표준문서들은 창조에 앞서서 하나님의 신적 작정을 다루고, 하나님의 신적 작정에 앞서서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삼위일체를 다루며, 무엇보다도 그러한 모든 지식들의 원천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성경에 대해 항상 가장 우선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신앙이 취할 분명한 입장은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에 이미 작정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그 자신을 위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6일 창조는 하나님의 작정의 불변성이 그대로 적용된 것으로, 하나님의 전능성 가운데서 실행된 일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창조 자체만을 목적으로 작정하셨다면 그런 하나님께서는 굳이 6일이 아니라 하루, 심지어는 한순간에 모든 만물들이 존재토록 하셨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하나님의 전능하신 속성에 근거해서)이다.
사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세상에 관해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도 수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관점을 전제하지 않는 과학적 객관성이란, 사실은 정답을 배제하고서 정답을 찾는 전형적인 역설(paradox)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하고 증명하는 일도 과학자가 아니라 목사들과 신학자들에 의해서나 진정으로 가능하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목사들과 신학자 가운데 수학과 과학적 기초를 지닌 자가 지극히 희소하다는 현실이다. 목사들과 신학자들에게 수학의 방정식과 자연과학의 증명방식이란 지극히 생소하고 부족한 영역이기에, 현실적으로 신학과 과학이 각각 자신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며 그로 말미암는 혼란(바벨의 혼란)을 명백히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1-4.
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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