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함에 있어 쉽게 간과되는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보존되었다는 점이다. 약 1,500년에서 1,600년 정도의 기간을 통해 구약과 신약 66권으로 집대성(정경화)된 성경은 수 없이 많은 필사본들을 산출했으니, 아주 고대에 토판이나 뼈조각 등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물(tablet)을 시작으로 수많은 파피루스(papyrus)와 양피지(parchment)로 보존되어 온 것이다. 아울러 1,500년에 이르는 긴 기간은, 점토판과 같이 딱딱한 판재로부터 두루마리(scroll)형태를 거쳐 최초의 책자 형식(codex)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상의 변화 또한 형성하고 있는데, 그처럼 복잡하고 긴 역사 가운데서도 계시된 내용의 변질이 없었던 점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보존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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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 자체의 그처럼 복잡하고 긴 역사는 성경 본문 자체를 대하는 우리들의 해석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하나 제공하는데, 그것은 바로 성경은 반드시 전체로 드러내고 있는 계시에 대한 통전적인(holistic) 이해를 요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종교(교회)개혁의 중요한 원리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는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원리와 항상 함께 추구되어야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성경은 특정한 구절에 대한 숙지만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이해의 배경 가운데서 특정 구절을 이해하고 숙지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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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종교개혁의 진영 안에서 그처럼 무르익은 성경에 대한 이해를 추구했던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와 동시에 성경을 자구적(literal)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보통 이단(heresy)들에서 강하게 추구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성경을 깊이 상고하지 않은 채, 당장에 자구적으로 이해한 성경을 따라 신앙과 생활을 실천함으로 이단에 치우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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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이단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경의 자구적 이해와 해석의 대상이 되어온 본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요 8:32절의 말씀이다. 그 말씀 한 구절만으로 흔히 생각하기를,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바로 진리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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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 8:32절에서 말한바 자유에 대해, 36절의 주님의 말씀은 이르기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8장에서 말하는 자유롭게 함은, 바로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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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아들(그리스도)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관련된 자유롭게 함인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언약의 자손인 아브라함의 자손)로서의 자유를 얻게 되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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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요 8:32절의 자유롭게 되는 진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누리는 자유롭게 됨인데, 같은 아브라함의 혈통이라 할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8절)고 말씀하시어, 그들의 출처와 예수 자신의 출처가 명백히 다름을 말씀하신다. 더구나 44절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앞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극심한 말씀을 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같은 아브라함의 혈통 가운데서 나온 자들일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 마귀의 자녀들인 것이다. 더군다나 그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부인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를 믿음 유대인들”(31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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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요 8:45절에서 또한 이르시기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즉 32절에서 말씀하신 진리,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말씀은 한 혈통(아브라함의 자손)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자손과 마귀의 자손을 명백히 구별하여 제시되고 있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 가운데, 무엇보다 예수를 믿은 유대인들 가운데에 마귀의 자식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명백히 구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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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진리, 양 때 가운데 있는 얼룩진 놈들(마귀의 자녀들)과 흰 놈들(아버지의 자녀들)의 구별과 관련하여 갈 4:22절은 이르기를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다고 했다. 혈통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나, 한 아들은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23절) 태어난 하갈의 아들이요, 한 아들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라의 아들(약속의 자녀 이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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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갈과 사라, 여종에게서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두 아들을 명백히 구별할 뿐 아니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0절)는 말씀으로 구분하고 있는 “두 언약”(24절)에 관한 말씀에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갈 5:1)다고 하여, 요 8:32절에서의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말씀과 정확히 같은 맥락을 드러낸다. 한마디로 두 언약,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 내쫓기는 자와 유업 이을 자로 명확히 구별된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의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자유롭게 하는 “진리”(더구나 그러한 이중예정은 두 자손들이 스스로 택하는 맥락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서의 예정이다)다. 이중예정은 ‘초칼빈주의’(hyper calvinism)에서나 주장할 수 있는 극단적인 예정론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을 전하는 요 8:32절과 갈 5:1절 말씀이 공히, 이중예정의 내용(특별히 구약성경의 내용) 가운데서 기록되어 제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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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요 8:32절 이하와 갈 4:21절 이하의 이중예정의 말씀을 읽는 마음이 어떠한가? 요 8:59절 말씀의 유대인들과 같이 돌을 들고 싶은 마음인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이 땅에서 받는 박해도 기꺼이 감당하는 진정 자유롭데 된 마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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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것은 오직 자유롭게 된 약속의 자녀들만이, 극단적인 초칼빈주의자라는 비난까지도 기꺼이 감당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모든 능력과 영광이 돌려지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런 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영생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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