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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3:1-11절의 “썩은 베띠 교훈”|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2. 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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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예레미야서와 같이 책망이 가득한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 그저 복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을 듣는 것이 예배에서의 유일한 낙이 되어버린 현대의 신자들은, 목사가 하는 개인적인 꾸지람과 성경에 담긴 훈계의 책망을 전혀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도들이 얼마나 힘든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데, 거기다 대고 위로는 못할망정 책망과 훈계는 참으로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 사회 가운데 있는 개신교인들의 생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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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 어려운 형편으로 치자면, 지금의 형편보다는 과거 우리 사회의 형편이 훨씬 더 어려웠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상대적 빈곤의 문제, 열악한 복지와 인권의 문제 등으로 인해 고달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 우리 사회는 절대적 빈곤과 복지라는 개념 자체의 부재, 그리고 인권과 같은 개념 또한 전혀 알지 못하다시피 한 형편이었다. 물론 그 때라고 신실하고 경건하게 보이는 성도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축첩에 고루한 옛 가부장적 사고를 지닌 채 신자로 있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대부분이 절대적 빈곤과 나라 잃은 설움 가운데서, 그야말로 주님 오실 날만 고대하며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라도 족하다며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던 태도가 개신교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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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렘 13:1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 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다고 말씀하시는데, 그처럼 조선에 개신교가 처음 전파되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던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개신교는 신문물과 더불어 낙후된 사회를 계몽하는 사회적 명성의 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개신교가 순수했었던 때는,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의 초기 선교의 시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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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38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일본 재국주의의 압박으로 신사 참배를 가결해버린 이후로, 한국의 개신교는 사회를 계몽하는 명예로운 자리에 더 이상 위치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신도침례라 일컫는 일본식 침례의식인 미소기바라이’(稧拂)를 집단으로 강행했는가 하면, 조선 예수교 장로회 지도자들이 자의로 일본의 신궁이라 일컫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참배하고 찍은 기념사진에는 조선야소교장로회대표성지참배기념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더욱 통탄할 일은, 그처럼 신사참배를 주도하며 일제에 적극 동조했던 친일파 교회지도자들이 해방 후에도 여전히 한국의 개신교 가운데서 교권을 주도해 왔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의 친일청산이 단행되지 못한 폐단은, 뿌리 깊게 개신교 안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이후로 6·25 동란과 군사독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교권을 주도했던 친일의 세력들이 여전히 한국의 개신교를 주도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국의 개신교는 거의 한 번도 제대로 다룬 적이 없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올 한 해 동안에도, 이 문제를 언급한 기사나 학술활동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면서도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 작금 한국 개신교의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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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필자가 참으로 민감하고 위험스런 주제인 한국의 근대사 가운데 있었던 개신교의 치부를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한국 사회 가운데 있는 개신교의 모습이 렘 13:1-7절에 기록된 베띠 교훈, 그리고 8-11절에 기록된 그 교훈에 대한 설명에 그대로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서의 시대에 표면적으로는 할례 받은 백성들, 곧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표식을 몸에 간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살가죽을 베어내 할례는 행했어도 그 마음에 있는 육체의 소욕을 베어내지는 않았기에, 이방의 온갖 신들을 들여와 그것들을 하나님께 하듯 경배를 드렸다. 마찬가지로 일제시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 또한, 표면적으로는 세례를 받고 하나님께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하지만 일제시대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도 신사 참배의 문제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문제이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를 가결했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무수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보내져서 회개하며 돌이키도록 책망과 권면을 받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던 것처럼,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를 가결했던 조선 예수교 총회도 출옥성도들을 비롯하여 무수한 양심 있는 신자들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 공식적인 참회를 선언한 적이 없다. 심지어 여전히 교계의 기득권을 잡고서 교권주의로 오늘날에 이르는 개신교의 부패와 타락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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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정한 장로교회란, 가장 성경적인 교회정치로 모이는 교회다. 따라서 장로교회가 운영되는 원리는 철저히 성경에 근거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실제적 기초를 구축했던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을 작성했고, 이후로 예배모범을, 그리고 다음에는 더욱 신중하게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을 작성했던 것이다. 56개월에 걸쳐 소집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유산들인 모든 표준문서들에 있어 핵심원리가 바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인 것이다. 이후의 장로교회들은 바로 그러한 기초 가운데서 교회를 운영하고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장로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게 되었을 때에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신앙고백을 비롯한 몇몇 문서들의 내용을 수정하거나 증보하는 역사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에 예수교 장로회 독노회가 1907년에 세워지고 일제시대에 이르기까지 조선 예수교 장로회도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이 교회가 가르칠 중요하고도 유익한 것이라면서 일찍부터 채택한 바 있다. 이어 1922년에는 정치모범이, 또한 1934년에는 예배모범이 들어와 헌법에 수록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신도게요라 이름 붙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비로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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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처럼 이루어지던 장로교회 표준문서들의 수용은, 신사 참배를 허용하도록 한 193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기점으로 무의미하게 퇴색해 버렸다. 그 이후로 조선의 개신교는 친일파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일본 제국주의에 앞장서 충성하는 개 노릇하는 종교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니 조선총독부의 충성스런 개 노릇 하던 조선 예수교 장로회가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과 예배모범, 소교리문답과 신도개요에 충실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야말로 교권주의자들의 전횡에 의해 광복의 때인 1945년까지 조선 예수교 장로회는 철저히 짓밟혀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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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3:1-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이상한 것을 명하시는데, 그것은 베띠를 하나 사서 허리에 두르고 다니되 물에 적시지 말라, 즉 세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서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틈에 감추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여러 날 후에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선지자 예레미야를 부르시어 이르시기를,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령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유프라테스 강 근처 바위틈에 감추어 두었던 베띠를 찾아 다시 가져왔을 때에, 그 베띠는 썩어서 못쓰게 된 상태였다. 그러자 렘 13:9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이어지는 10절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같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벨론 포수기와 귀환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 이르기까지, 늘 전쟁과 침략, 그리고 지배 가운데서의 탄압과 억압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물론 간헐적으로 다니엘과 같은 신실한 인물들의 역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시기까지도 로마의 지배 가운데 있을 만큼, 늘 지배 가운데서의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나라로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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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38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를 받아들이고 가결하게 되었을 때부터, 이 나라의 장로교회들도 제대로 된 장로교회정치, 곧 성경에 충실한 장로교회로서 운영될 수가 없었다. 물론 표면상으로는 일제에 충성함으로서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고, 광복 후에는 미군정에 충성하여 적산가옥들을 제공받아 이후로 급속한 개신교의 외형적인 성장의 발판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이미 1938년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신사 참배를 가결했을 때부터 사실상의 장로교정치는 와해되어 버리고 말았다. 마치 렘 13:1-7절에 나오는 베띠와 같이, 모양은 갖추었으되 썩어 못쓰게 된 상태로 남은 조선의 장로교회는 사회에서의 평판과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그야말로 사분오열로 분열하는 역사를 거쳐서 작금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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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렘 13:1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게 하려고 하셨노라고 말씀하셨다. 특별히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라고 하시어, 허리에 두르는 벨트인 베띠가 얼마나 사람의 몸에 가깝게 밀착되어 있는지를 나타내 말씀하신다. 선지자 예레미야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복식은 대부분 별도의 속옷이 없는 통옷이었으므로, 베띠야말로 사람의 몸에 가장 밀착되어 있는 의복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그처럼 여호와 하나님께 밀착하도록 택함을 입었던 것인데, 그 베띠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과 우상숭배의 부패한 모습 가운데 있었으니, 그처럼 썩은 베띠인 이스라엘을 어디에 쓰겠는가? 마찬가지로 성경에 근거하는 원리로서 정치모범과 예배모범, 그리고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을 지닌 장로교회야말로,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밀착하여 운영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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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더 이상 그럴싸한 겉모습을 지니기 어려울 것이다. 이미 무수히 많은 교회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사라져 버리고, 그저 동호회마냥 종교적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그들만의 리그인 친목단체로서의 교회로 전락해 있으니, 그런 친목교회들이 무슨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와 영광이 되겠는가? 그저 잠깐 자기들끼리 좋아 모이는 친목회인 교회는, 썩어 쓸 수 없는 베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장로교회들만이 지닌 가장 풍성한 표준문서들인 웨스트민스터 정치모범, 예배모범, 신앙고백, ·소교리문답에 담긴 장로교회 신앙의 원리들을 속히 붙잡는 역사적인 대한민국의 장로교단들이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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