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기독교 독립언론’을 자칭하는 어느 언론사의 기사 가운데서 각 교단 총회마다 여성 인권과 성적 소수자로 지칭하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규정하고 다루었는지를 논평한 동영상을 보았다. 그 동영상은 교회 내 여성 인권에 관련한 문제에 대해, 총회에 참석하여 당당히 착석해 있는 (당연히 남성인) 총대들의 모습과 밖에서 간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여성도들의 모습을 확연히 대비하여 전달하려는 의사를 시각적으로 분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간식을 준비하거나 어떤 행사의 준비하는 일 뿐 아니라 그 행사를 위해 장소를 예비하고 필요한 제반 사항을 준비하는 일들까지를 전부 포함하여 따져보면, 꼭 여자 성도들만 그처럼 부수적인 일에 분주한 것만은 아니다. 틀림없이 교회의 남자 집사들 가운데 혹은 청년들이 회의장의 비품을 준비하고 배치하거나, 차량 안내나 행정적인 업무들을 수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처럼 교회에서 이뤄지는 모든 행사들, 심지어는 예배조차도 준비하고 예비하는 손길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대 교회들의 모습이다. 더구나 대형화 한 교회들에서는 모든 부분들을 전문적인 수준으로 준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작은 교회들이나 개척교회에서 이를 따르다 보면 이미 준비과정에서부터 낙담하거나 현실적인 한계에 적잖이 낙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실 주일성수에 관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the Publick Worship of God. 1645)의 지침만 보더라도, 주일에 교회당에서 특별히 분주할만한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컨대 “주의 날은 마땅히 미리 기억하여 둠이 좋으니, 평상시 종사하는 세상의 일들을 규모 있게 정리하여 적절한 때에 마쳐놓음으로써, 주일을 맞이하였을 때에 주일을 거룩하게 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 날에 하는 식사는 미리 준비해 두어, 어떤 하인이라도 부득이한 일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의 공적 예배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어떤 사람이라도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데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일에 교회에서 특별히 행해야 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다만 예배와 관련한 아주 적은 분량의 업무나 선행과 봉사하는 일에 관련한 몇몇 일들만이 필요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그런 일들을 위해 준비가 필요하다면, 이 또한 주 중에 미리 준비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예배와 교회에 관련한 모든 부분들에 비성경적인 요소가 가득한 현대의 목회현실에서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이 언급하고 있는 지침의 기본적인 맥락이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다. 그런 가운데, 앞서 언급한 여성도들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교회는 일(행사)을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라 ‘안식’하는 곳이다. 그것을 단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 ‘주일성수’다. 그러므로 주일성수에 관련해서는 그 날에 해야 할 일들보다 앞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 전에 모든 것들을 미리 준비해 두어, 안식일에는 특별한 일들을 행하지 않고 통상적인 말씀사역에만 집중해야 마땅한 것이다. 만일에 교회들이 그처럼 특별한 일이 없이 운영된다고 한다면, 여성도들이나 남성도들이나 상관이 없이 모두가 동등하게 안식하는 주일과 교회의 모습이 현실화될 것이다.
그러나 그처럼 되지 못하는 교회들의 여건상, 누군가는 허드렛일 같은 것들을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직분이 소위 ‘집사’(Deacon) 직분이다. 집사의 직분이야말로 돕는 일과 허드렛일을 하는 머슴과 같은 직분이라 여기기에, 남녀를 불문하고 집사들은 교회의 궂은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행하는 직분으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직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 직분을 포기하거나 ‘장로’(Presbyter)의 직분이 되는 길이다. 왜냐하면 장로가 되면 비로소 안내를 비롯한 교회의 온갖 허드렛일들을 탈피하여 교회의 재정과 사무를 관장하는 역할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현대의 장로들이 하는 재정과 관련한 일들은 본래 집사 직분자가 감당할 직무다. 구제와 봉사 및 교회 제반에 관한 제정출납을 총괄하는 업무는 분명 교회의 봉사와 섬김의 직분인 집사직의 직무인 것이다. 반면에 장로들은 목사와 함께 목회의 중요한 영역들을 관장하는 직분인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회의 회원들을 두루 시찰(심방)하여 신앙과 선행을 장려하는 일이다. 바로 그러한 직무를 수행함 가운데서 성찬에 참여하기에 적합한지의 여부를 판별하며 지도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적지 않은 장로 직분자들이 살후 3:11절 말씀에서 언급하는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처럼 자리하고 있다. 본래 감당해야 할 성도들에 대한 시찰과 지도의 업무는 거의 수행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교회의 금고열쇠를 쥐고 재정 출납을 총괄하는 역할을 수행하거나 교회의 집사들을 통솔(?)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경우가 비일비재 한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여성도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교회의 집사로서 허드렛일을 감당하던 여자집사가 소위 ‘권사’(exhorter)가 되면 비로소 잡다한 업무를 여집사들에게 이임하고 자신은 지도 혹은 통솔하는 역할을 수행하거나 기도에만 전념하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살후 3:11절의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란 중세시대의 수사(Monachus)들과 같이 사역자를 빙자하여 무위도식(無爲徒食)하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딤전 5:13절의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는 자들은 교회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젊은 과부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심각한 일만 만드는 사람 가운데 우선적으로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 살후 3:11절에서 언급하는 사람인데, 한마디로 그런 자들은 교회의 각종 행사들을 시행토록 조장하고 자신은 실제적인 일에 가담하지 않는 사역자들을 가리킨다 하겠다.
그러나 사도는 이미 딤전 4:13절에서 특별히 말씀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어떻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했는데, 그것은 “(말씀을)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살후 3:11절에서 지적한 사역자가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꾸만 일거리가 되는 행사들을 기획하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것이 아니라 열심히 말씀을 읽고, 말씀의 교훈을 따라 살아가면서 이를 성도들에게 권하며, 아울러 그 권하는 바를 잘 가르치며 지도하는 일에 그야말로 전념(專念)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럴 때에야 교회는 비로소 할 일들이 잔뜩 쌓여 어느 때보다도 바쁜 주일이 아니라, 그야말로 말씀(강독)을 들으며 그 가운데서 진정한 안식의 주일로 잠잠하고 평안한 교회(敎會)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것들을 개혁하기 이전에 일만 만드는 기독교회의 풍토부터 걷어내도록 하자!
장대선목사
신자들의 “가정”이 “교회”를 세우는가?| (0) | 2019.02.15 |
---|---|
우리는 왜 ‘6일의 창조’를 믿는가? (0) | 2019.02.15 |
렘 13:1-11절의 “썩은 베띠 교훈”| (0) | 2019.02.04 |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0) | 2019.02.04 |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 (0) | 2019.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