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와 종교개혁의 시기까지 유럽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틀은 “소교구제”(parish)의 틀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교구의 기본적인 성격은 강한 공동체성(community. 흔히 미국의 공동체교회들이 말하는 의미가 아니라, 더 넓은 문맥이다) 이었기에, 교회의 권징에 따른 교제권의 상실(출교)은 심리적 충격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에서의 단절이라는 치명적인 충격을 주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소교구제는 종교개혁의 시대에 로마 가톨릭 뿐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강화했었는데, 신앙과 경건에 있어서 공동체성은 실질적인 면에서 아주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화로 말미암아 광범위한 이동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모이는 현대 교회에 있어서의 교구제도는 중세와 종교개혁시기까지 계승된 제도의 공동체성과는 그 차이가 현격한데, 단적으로 그러한 교구에서의 교제가 상실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전혀 불편하거나 피해를 입는 일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현대 교회의 한계는 결코 쉽게 회복될 수 없고, 중세나 종교개혁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현대 교회가 아무리 공동체성을 회복하려 노력해도, 중세나 종교개혁 시대만큼의 공동체성은 필시 회복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성이 기본적으로 교제(κοινωνία, Koinonia) 가운데서 이뤄지는 만큼, 인간 사회의 교제가 상실되는데 따른 충격을 주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본래(본질)적인 교제의 의미 가운데서의 상실로 말미암은 충격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성도간의 친밀한 교제에서의 단절로 말미암은 충격은 거의 무의미해졌을 지라도, 영적인 진리(성경의 참된 진리)에서의 단절로 말미암은 주림과 목마름은 여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현대 교회의 목회자들, 특별히 성경의 진리를 확고히 표명하는 장로교회들의 목회자들이 감당할 몫이 매우 크다. 장로교회의 목사들은 성도들이 영적인 진리를 충실히 공급해 주는데 힘써야 하는데, 마치 매일 먹는 밥과 같이 영적인 진리가 성도들에게 충실히 공급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잠시라도 진리를 공급받지 못하면, 마치 매일 먹는 밥을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느끼는 배고픔과 같은 핍절함을 느끼는 자들이 되도록 성도들을 키워야 한다.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고 하실 때에, “어린 양”이란 곧 젖먹이 새끼 양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말씀의 일꾼들이 주님의 새끼 양들인 성도들을 먹이는 일은, 마치 젖먹이 새끼에게 젖을 먹이듯 쉴 새 없이 말씀의 진리를 공급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잠시라도 그 진리를 공급받지 못하면, 젖먹이 새끼마냥 주리고 목말라 우는 자들이 되도록 성도들을 양육해야 한다(안타깝게도 이런 일들은 주로 이단들에서 일어나는 것 같다). 그럴 때에 교회 공동체란 진리의 양식을 수시로 공급받는 충만의 성격으로서, 그러한 공동체에서의 단절이란 영적인 주림이요 목마름으로 말미암는 죽음의 고통임을 성도들로 하여금 사무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공동체인 교회들은 성도들에게 과연 무엇을 먹이는가? 아니, 그러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성도들이 과연 무슨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느끼는가? 혹여 배고픔은커녕 아무런 아쉬움과 불편함도 없는 이합집산(meeting and parting)은 아닌가?
http://cafe.daum.net/largoviva/WoXQ/65
다윗은 왜 솔로몬에게 요압의 “응징”을 명령했을까?| (0) | 2019.03.07 |
---|---|
‘성경’이 신앙의 ‘표준’이라는 생각에 있어서의 ‘오류’ (0) | 2019.03.07 |
리포메이션 시뮬라크르(reformation Similacre) ?| (0) | 2019.03.01 |
“돕는 배필”은 무엇을 돕는 것일까?| (0) | 2019.02.28 |
과연 100세 시대일까?| (0) | 2019.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