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창세기 2장에는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대략)”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내력’ 혹은 ‘대략’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톨레돗’은 사실 ‘계보’(Generations)를 말하는 것으로 창세기 2, 5, 6, 10, 11, 25, 36, 37장에서 족보로서 언급되는 단어다.
그런데 특별히 창세기 2장에서 사용된 톨레돗이라는 단어를 내력(대략)으로 번역한 것은, 창조가 어떠한 절차적인 질서 가운데서 이루어졌는지를 나타내어 구별한 번역이라 하겠다. 즉, 5장 이하의 본문에서는 톨레돗이 명확한 족보의 개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2장에서는 창조의 질서적인 개념으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서의 선후관계는 명백한 질서상의 선후관계이니, 1장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인간의 창조가 2장에서 먼저 언급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질서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의 창조에 관해 언급할 때에 남자를 언급하고 그 뒤에 여자의 창조를 언급하고 있어서, 그 선후관계에 근거하는 명확한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질서 가운데서 여자에 대해 “돕는 배필”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지어진 점과 남자가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지을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녔던 것으로 볼 때에, 남자는 틀림없이 여자에 대한 본질을 통찰하는 가운데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한 것이다.
특히 “돕는 배필”이라는 문장을 RSV에서는 문자적으로 ‘그와 반대된 돕는 자’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그 말은 곧 남자와 반대된 위치에서 그를 돕는 자가 바로 여자임을 뜻한다. 한마디로 여자는 남자를 돕는 조력자로서 창조된 것이고, 바로 그러한 질서를 창세기 2장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선후관계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어떤 점에서 남자의 돕는 배필(조력자)인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4장은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다루면서 2항에서 언급하기를 “결혼은 남편과 아내에 대하여 상호간의 도움을 위해, 합법적인 자손으로 인한 인류의 번성과, 거룩한 씨로 인한 교회의 번성을 위하여, 그리고 부정을 막기 위하여, 제정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앙고백의 문구에서 주목할 것은 “합법적인 자손으로 인한 인류의 번성”과 함께 “부정(부적절한 성교)을 막기 위하여”라는 문장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합법적이고 순결한 부부간의 결합, 그리고 “거룩한 씨로 인한 교회의 번성”이다.
그러나 이 두 문장은 한 문맥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바로 정결하고 거룩한 번성에 의해 교회로서의 가정을 번성시킴이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로서의 여자의 역할은 단순히 육체적(부적절한 성교를 방지하는)이거나 경제적인(맞벌이) 도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함께 가정이 거룩한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인데, 특별히 ‘그(남자)와 반대된 돕는 자’로서 남자가 거룩한 교회인 가정에서 하지 못하는 목회적인 일들을 잘 수행해 주는 것이 바로 돕는 배필로서의 여자의 역할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가정의 소명(교회로서의 소명)이 이미 창세 때부터의 소명이기 때문인데, 창 1:28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명하신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소명이 바로 그 원형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와 관련한 질서, 그리고 그들의 소명에 관해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는데, 엡 5:22-33절에서 사도는 아내들과 남편들에게 권면하고 있지만, 그 모형을 그리스도와 그가 사랑하시는 교회에서 찾고 있다. 그러므로 33절에서 사도는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심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고 하기 전에, 32절에서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인 아내에 대하여, 태초에 아담이 여자의 본질을 통찰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한 것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남편에게 아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도움(조력)은 바로 “복종”(휘포타쏘), 곧 남편의 권세 아래에서 그를 존경하여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에 그 복종은 단순히 남편으로서의 위치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편에게 그렇게 복종하는 원형은, 교회에서 그리스도께서 위치하는 것과 같은 사랑에 대한 복종을 말한다. 즉 가정의 목회자인 남편으로서 존경하여 복종하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랑이니, 그 사랑이란 단순히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엡 5:25) 하는 사랑이다. 따라서 교회를 사랑할 줄 모르는 남편은, 진정한 의미로 아내를 사랑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이처럼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명을 남자와 여자가 감당하는 곳이 가정이니, 그런 가정을 이루는데 어찌 허물 많고 어리석은 인간일 뿐인 자신들의 판단을 따를 수 있겠는가? 오직 말씀(성경의 진리)에 견주어,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되는 판단은 모두 버림이 마땅하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의 이끄심(태초에 남자에게 여자를 이끌어 오신 그 이끄심)으로 짝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기도할 제목인 것이다.
☞ 이 글은 ‘고백과 문답’에서 출간예정인 결혼과 가정에 관한 스터디 교재 『생육하고‥ 다스리라』의 서문 중 일부분입니다.
장대선목사
http://cafe.daum.net/largoviva/WoXQ/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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