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은 어떤 사실(fact)을 해석하며 살아간다. 병에 물이 반이 있어도 우리는 ‘반 밖에..’ 혹은 ‘반 이나..’라는 해석을 하게 된다. 해석은 ‘지금 당장’에 적합한 방향으로도 가능하지만, ‘멀리’바라보면서도 가능하다. 형들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간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현실을 ‘멀리’보며 해석했을 것이다. 현실을 멀리보며 해석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었고,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창세기37:3)’볼 수 있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길 수 있었을 것이다. 형제들을 만나고, 자신의 꿈이 현실로 드러난 후에도 ‘자금 당장’에 적합한 방향으로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을 해석한 형제들은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창세기50:16-17)’라고 자신들의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요셉의 복수를 걱정했지만, ‘멀리’삶의 현실을 해석한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세기50:20-21)’라고 도리어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 믿음은 이렇게‘지금’이라는 현실을 ‘멀리’바라보게 하는 해석적 능력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함이라는 말은 요셉처럼 우리도 우리들의 ‘지금’을 멀리 바라보며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복음10:10)’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에만 관심있는 사람은 영생에 관심을 가질 수 없고,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예수님은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마태복음13:21)’씨앗이 돌밭에 뿌려진 자같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마태복음13:22)’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시밭에 뿌려진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2. 유대인들은 헬라인들이 ‘보는 것’을 지식의 통로로 생각한 것과는 달리 ‘듣는 것’이 지식의 통로이다. 듣는 것은 보기위해 대상을 분해하고 분석하는 것과는 달리 대상과의 인격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잘 듣는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의 말을 순종하고, 말하는 자의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린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의 의미를 하나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친 삶의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놓지지 않았다.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6:4-5)’고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먼저라는 말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마태복음13:23)’는 좋은 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마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을 시작하시면서 고난을 당하실 것을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나타내셨다’. 물론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달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요구에 대하여 요나의 표적을 이야기하신 것으로 보아(마태복음12:38-40), 어느 정도는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마태복음16:21)’드러내셨다. 아주 구체적인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복음16:22)’라고 말했다. 우리말 번역에는 생략되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당신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있기를’이라는 말을 먼저 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단순히 존경한다는 의미로‘주여’라고 부르면서 자신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16:16)’라고 고백한 예수님을 자신의 인간적인 이해에 맞추어 생각한다. 베드로는 ‘예수님, 당신이 메시야라면 고난을 당해서도 안 되고 죽으셔도 안 됩니다’라는 의미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베드로의 이런 입장은 당시에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생각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다는 말이다.
3.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의 특징은 언제나 ‘나’ 중심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런 ‘나’중심적인 생각에 사탄이 침투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태복음16:23)’라고 말씀하신다.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즉, 자기의 뜻을 꺽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삶을 의미하고, 예수님이 제시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혹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가진 자들의 특징은 이렇다.
17세기 계몽주의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들은 ‘눈으로’ 보아야 사실로 받아들이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귀는 없다. 부활절이 다가온다. 예수님께서‘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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