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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통해서(per Verbum)”와 “말씀과 함께(cum Verbo)”의 차이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4. 2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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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기점으로 하여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현대의 개신교회들의 모습에 있어서, 다시 개혁해야만 하는 모습은 이제 로마 가톨릭과의 구별만이 아니라 개신교 자체의 확고한 개혁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개혁된 교회들은 개혁의 시대에서부터 참되게 개혁된 것들만이 아니라 무수한 오류와 방종들이 섞여 있었기에 역사 가운데서 그 참된 원형만을 추리기 곤란하며, 오히려 그 원리를 찾아서 그 형태를 시현해 보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오늘날의 개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개혁된 내용에 있어서 성경이 어떻게 우리의 신앙에 확고한 중심으로 자리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고 정확히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로마 가톨릭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온통 미신적인 성사(sacrament)’들과 인간적인 조직(사제주의)에 둔 데 반해, 개신교회들은 가시적인 성사들과 사제주의를 타파하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데에 두었던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해하고 숙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일반적인 원리에 있어서 개신교 신앙은 처음부터 일치를 이루지 못했으니, 재세례파와 열광주의(혹은 성령주의)자들은 일찌감치 종교개혁의 일반적 원리에서 벗어나서, 성경 말씀과 전혀 별도로 성령의 자유롭고 주관적인 사역을 추구함으로써 성령신비주의의 확고한 오류에 치우쳐 있었다.

 


이에 대해 마틴 루터의 개혁된 신앙을 더욱 공교히 쌓아올린 루터파 계열의 종교개혁 진영에서는, 성령께서 항상 말씀을 통해서(per Verbum)” 사역하신다고 하는 입장을 가지고서 로마 가톨릭 뿐 아니라 재세례파와 열광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반대를 표방했었다.

 

특별히 루터파 신학의 공재설(consubstantiatio)’ 개념은 성경 말씀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맥락을 제공하여, 성경 자체에 내재적인 은혜의 효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성경 말씀의 내재적인 은혜의 효력이 마치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여러 미신적인 주장들과 같이 마술적인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그러한 말씀의 효력이 일반적인 차원으로 내재해 있다는 것이 루터파 신학의 기본적인 맥락이다.

 

하지만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경 말씀을 그렇게 이해할 경우, 성경 말씀을 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보편적으로 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직시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제시할 수 없는 결정적인 오류를 부인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 대한 능동적인 참여(읽음과 들음)와 책임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데, 그 가운데서 은혜는 결국 불가항력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이해를 전제하게 되는 것이 루터주의 안에서의 말씀을 통해서라는 이해(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반면에 개혁파로 통칭되는 종교개혁 진영(칼빈, 쯔빙글리 등)에서는 그러한 이해 대신에 말씀과 함께라는 이해를 주장해 왔다. 그러므로 개혁파 진영에서의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경에 대한 이해는, 로마 가톨릭이나 재세례파 혹은 루터파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특별히 말씀과 함께라고 하는 성경의 은혜에 대한 이해는, 루터파가 그러한 이해를 성찬에 있어서 공재설을 주장한 것과 같은 원리 가운데서 수립한 것처럼 영적임재(Spiritual Presence)’의 맥락과 유사한 이해로 된 것인데, 특별히 영적(Spiritual )’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맥락 가운데서 비로소 성경이 어떻게 우리에게 은혜의 방편이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이해의 단서를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잘 언급하고 있는데, 칼빈에게 있어서 영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연관되며, 그처럼 지식과 연관되는 근거는 또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와 그 형상의 모사(模寫)로서의 인간의 형상에서 유례 하는 것이니, 그 때의 형상이란 육신(육체)’이 아니라 영혼이다.

 

쯔빙글리는 이를 지성, 의지, 기억의 세 요소로 보는데, 그는 골 3:10절에서 말하는 새 사람과 관련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무분별한 육신의 욕망이 없으며, 그리스어의 온전한 의미에 따른다면, 하나님의 지식이 더욱더 자라서 창조자의 형상을 드러내고 명백히 하며, 더 빛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엡 4:24절의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에 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와 진리로서의 지식)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을 것을 강조하는데, 바로 그러한 이해 가운데서 왜 종교개혁의 원리에 있어 중심을 이루는 것이 성경에 대한 이해에 있는지에 대한 반석(기반)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해 가운데 있는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성경이란 루터파와 달리 내재적인 은혜의 효력이 아니라, 그것(성경)과 함께 사역하시는 성령을 전제로 하는 것이 바로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진영의 이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 자체는 보편적으로 제공될지라도, 그 자체에 은혜의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성경)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것은 실제적이며 효과적인 은혜의 방편으로 제공된다.

 

여기서 또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성경)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것은 실제적이며 효과적인 은혜의 방편으로 제공된다는 것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주장하는 바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이해에 있어 성령께서 성경과 더불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성령의 사역이 없다고 해서 성경이 죽은 언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있는 것이며, 다만 택하신 자들에게만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더욱 그것은 실제적이며 효과적인 은혜의 방편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미묘한 이해의 차이 가운데 성경이 은혜의 방편이 되는 중요한 태도로서 존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성경말씀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중시하는데, 바로 그처럼 성경말씀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직분이 말씀 사역자라 불리는 목사. 그래서 존 머레이는 그런 목사에 의한 말씀 사역을 특별히(가정예배를 인정하고 귀하게 보면서도 더욱) 중요하게 강조한다.

 

한마디로 말씀과 함께사역하시는 성령(cf: W·C·F 15)께서는 그 자체에 내재하는 효력으로서가 아니라, 유효한 말씀을 가르치고 깨우치는 지성, 의지, 기억의 세 요소 가운데서 더욱 은혜로 삼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은혜는 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더욱 진지하고 깊은 연구 가운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풍성한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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