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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 반드시 예배 중에 드려야(혹은 있어야) 하는가?

장대선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9. 5. 1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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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과 관련해서는 기본적으로 집사”(deacon) 직분이 담당하는 것으로서, 교회의 항존(恒存)직인 집사는 헌금을 취합하고 받아서 분배하되,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와 더불어 교회가 부양해야 할 특별한 사람들(목사, 고아, 과부 등)을 부양하고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총괄하는 일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박윤선은 그의 헌법주석(박윤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 정치·예배모범, 1983, p. 80.)에서 이것은 목사, 장로에게 종속되지 않은 구별된 성직(the ministry)”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집사의 직무는 집사들에 의해 자체적으로만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목사와 장로들의 정함에 따라 분별력 있게 행사하여야만 한다고 알렉산더 헨더슨(Alexander Henderson,1583-1646)의 스코틀랜드 교회정치와 그 규범(The Government and Order of the Church of Scotland, 1541, 개혁주의성경연구소 2010년 여름세미나, p. 6 재인용)에서 그 적정(適正)선을 잘 설명하고 있다. 지교회의 유일한 치리기구인 당회(堂會)는 말씀사역에 기반을 두고 치리를 담당하는 기구이기에, 목사와 장로직에 종속되지는 않더라도 당회의 의결에 따른 정함에 순응(conformity)함이 마땅한 것이다.

 


그런데 그처럼 집사직분이 감당하는 헌금의 관리 및 집행업무는, 지교회의 운영에 있어서 가장 표면적으로 실감될 수 있는 영역이다. 인간사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새는 대부분 돈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데, 교회의 운영에서도 재정은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교회의 겉모습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거의 모든 교파들의 예배에서 헌금의 순서는 분명하고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특별히 성도들이 하나님께 올리는 봉헌(offering)의 성격을 강조하는 확고한 순서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심지어 모든 예배(심지어 심방이나 그룹 모임의 예배순서까지)에는 반드시 헌금 순서가 포함되어야 마땅하다는 예배론을 펴시는 분들도 흔히 볼 수가 있다.

 

그러나 헨더슨의 스코틀랜드 교회정치규범에서는 헌금의 시기를 주일이나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날에 하도록 규정했어도, 예배순서 가운데서가 아니라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드리도록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1644년에 작성된 토마스 카트라이트의 교회정치규범(Thomas Cartwright, A Directory of Church-government, London 1644)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되는바, 예배 순서 어디에도 헌금의 순서를 따로 배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왜 헨더슨과 카트라이트(서창원 교수는 칼빈의 제네바 교회에서도 1549년 이후에는 예배당에 들어오면서 헌금을 드리도록 변경했다고 밝힌다. 진리의 깃발통권 제31, p. 65)는 예배 순서에 헌금 순서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와 관련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WESTMINSTER DIRECTORY, 1645)의 예배 순서에 관한 나열에서 단서를 제공하고 있는데, 설교 후 기도 다음으로 이어지는 헌금 순서에 대한 설명에서 공예배에 방해되지 않는 순서로 시행토록당부하고 있다. 비록 성례(성찬)이 중간에 시행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헌금 순서가 설교와 성례의 은혜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한 절제와 주의 가운데서 부수적으로만 이뤄지도록 당부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회들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한 헌금의 시행이 이뤄졌었던 것으로보이는데, 보통 예배당 출입문 안쪽에 곧장 설치된 헌금함의 배치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오늘날에는 타()교인이나 새벽기도를 드리는 교인들을 위한 헌금함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사실은 예배 순서와 구별하여 헌금토록 했었던 신앙의 유산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대부분의 직분자들이 헌금의 순서가 예배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특별히 집사직분의 경우에는 예배 순서 중 유일하게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과 토마스 카트라이트 등의 개혁자들에 의해 정리된 신앙 가운데서 헌금은 당연하고도 거의 필연적인 것으로서, 오히려 영과 진리로”(4:24) 예배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순서로 여겨졌다는 사실에서, 우리 시대의 신앙의 수준이 얼마나 부실한 수준으로 떨어져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영과 진리의 예배에만 집중하기를 원하여 헌금 순서까지도 부수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재정과 관련한 현실적인 부분을 결코 부수적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이 땅에서는 돈이 가히 필수적이다. 집사직이 목사와 장로에 종속되지 않는 분명한 성직이나, 표면적으로는 집행하는 재정의 규모 가운데서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항상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영적 예배) 가운데서, 믿음으로서 비로소 가시적이 된다. 그러므로 그런 교회에는 항상 말씀(성경의 진리)의 선포, 성례(성경의 진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시행하고 드러내는 권징(목회적 치리)을 확고한 표지(sign, mark)로 삼는다. 바로 그러한 교회의 믿음에 있어서, 가시적인 헌금은 마땅히 따르는 것일 뿐, 당장에 예배 가운데서 주의하여 드려져야 할 것은 여전히 영과 진리에만 있음을 예배당의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는 헌금함이 희미하게나마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8:32)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시대는 과연 그처럼 진리가 우리들을 자유케 하는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하다면 그 가시적 실천으로 예배에서 헌금의 순서를 부수적으로 다루어, 말씀(성경의 진리) 중심으로 예배 개혁의 한 걸음을 실천해 봄이 어떨까? 목회적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라 생각지 않고,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규범으로 삼는 실천이라 생각한다면 말이다.





장대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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